리마인드 축구천재 83화
김정빈은 세수하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는 깡마르고 멍청해 보이는 자신의 얼굴이 있었다.
“미치겠네…… 감독님한테 당당하게 말하긴 했는데…….”
뭐부터 해야 하지. 밤새 고민해 봤지만 멋진 해결책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로베르토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해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말도 안 된다. 자신도 그러고 싶지 않았고.
하지만 좋은 아이디어 같은 게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모르겠지만, 시간은 참 야속하다. 생각할 시간 같은 건 주지 않는다. 앞으로 30분 후면 또 오전 훈련이 시작될 것이다.
어쩐다. 김정빈은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화장실을 나섰다.
“어?”
“아…… 정빈이 형, 안녕하세요.”
문을 나서자마자 마주친 건, 어제 송현준에게 자기들이 떨거지라며 자조했던 박지훈이었다. 무슨 말을 할지 정해놓지 않아 머리가 하얘지려고 했다. 김정빈은 애써 정신줄을 붙잡으며 손을 흔들었다.
“좋은 아침이야.”
“네, 좋은 아침이요. 그럼 이만…….”
“잠깐만.”
김정빈은 화장실로 들어가려는 박지훈을 불러세웠다. 박지훈은 급해 죽겠는데 대체 왜? 라는 말이 적힌 것 같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김정빈을 바라봤다.
김정빈은 움츠러들 뻔했지만, 애써 두 번째로 찾아온 위기를 참아냈다.
“…….”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 화장실이 급해 보이는 박지훈이 재촉했다.
“할 말 있으세요?”
“……이따가 점심 같이 먹을래?”
“예?”
이번에는 그게 뭔 개소리야, 라고 쓰인 것 같은 얼굴을 한 박지훈이다. 박지훈은 표정이 참 풍부한 중학생이었다.
“너랑, 성동현이랑…….”
일단 운을 떼니 다음 말이 술술 나왔다. 김정빈은 너뿐만 아니라 성동현을 포함한 임시부원 전원과 점심을 먹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랑요……? 아, 못 참겠다! 알았어요!”
박지훈은 할 말이 있는 거 같았지만, 화장실이 급해서 그런지 고개를 끄덕이고 화장실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김정빈은 박지훈이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멀리 떨어진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찻 단추를 끼우기 위해서 바늘에 실까지 꿴 느낌이었다.
미묘한 성취감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걱정이긴 했다. 일단 지르긴 했는데 막상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정빈아, 안 나오고 뭐 하냐? 오늘은 네가 촬영하기로 했잖아.”
“아이고, 죄송합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건물 밖에서 들린 김진호 코치의 목소리에 김정빈은 일단 달리기 시작했다.
점심은 점심이고 일단 오전 훈련부터 해야 했다.
* * *
박지훈은 약속을 지켰다. 점심시간이 되자 임시부원 6명을 전부 데려온 것이다.
“…….”
“…….”
다만 문제가 있었다.
김정빈은 자기가 송현준처럼 능숙하게 말을 못 한다는 걸 깨달았다.
중학생보다도 못하다니. 아니, 걔는 좀 조숙해 보이긴 하던데. 아니, 그래도 지금 말을 못 한다는 사실이 김정빈에게 자괴감을 안겨주었다.
심지어 벤치 하나에 앉을 수가 없어 나란히 붙은 두 개의 벤치에 나눠 앉아 있어서 얘기하기 쉬운 형세도 아니었다.
김정빈이 밥을 먹지 않고 있으니 임시부원 전체가 가만히 있었다.
“……?”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김정빈은 임시부원들의 표정을 살필 수 있었다. 이들은 불안한 얼굴을 하며 김정빈을 힐긋거리고 있었다. 눈치를 보는 것이다.
그들을 보며 김정빈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김정빈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당장 생각나는 말을 꺼냈다. 이들을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밥 먹자고 부른 거야…… 다른 목적 없어.”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다른 목적이 없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몇 부원은 안심한 얼굴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들이 얼마나 축구부에 있는 걸 불안해하는지 김정빈은 느낄 수 있었다.
“일단 먹자.”
“넵.”
“알겠어요.”
친한 형이 되고 싶다고 말할 수도 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달라고 할 수도 있다.
김정빈이 좋아하는 멋지고 리더십 있는 프로 축구 선수들은 그런 식으로 기가 죽은 선수들을 위로했다는 일화가 있었다.
하지만, 김정빈은 그런 말을 자기가 꺼내면 왠지 모르게 가식적으로 들릴 거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 친한 형처럼 잘해줄 수 있는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냐면 자신은 리더십 있는 축구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운동보다는 책상이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옆에 있는 운동부 학생들과 사는 세계가 달랐다.
그래서 김정빈은 절반 정도 밥을 먹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너희들 부른 건 그냥…… 밥도 먹고 하고 싶은 얘기도 있어서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임시부원들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왠지 모르게 각오한 것 같은 얼굴들, 그 모습에 김정빈은 이런 자리를 갖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공부 좀 했으니까, 혹시 다른 길로 가고 싶으면 얼마든지 얘기해, 도와줄게.”
그 말에 임시부원들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왜 그런 얘길 하세요? 우리 잘리는 건가요?”
김정빈은 자기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아직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실패해도 괜찮다는 거야.”
다들 그게 무슨 얘기냐는 듯 김정빈을 집중해서 보기 시작했다.
“솔직히 까고 말해보자. 우리 축구부에서 프로 선수 될 사람이 몇 명일 거 같아?”
김정빈은 구체적인 데이터로도 알고 있었다. 그걸 일일이 설명하기는 뭐해서 간단하게 말했다.
“근 10년 동안 통계를 보면 우리 중 다섯 명만 프로 선수가 돼도 성공한 거야. 우리 중 다수는 실패할 거라는 거지.”
임시부원들이 우울한 얼굴을 했다. 김정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지금부터 실패했다는 게 아니야. 너희들이 실패하는 걸 무서워하는 거 같아서, 실패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려는 거야.”
“…….”
“두려워해서 위축되면 세계적인 축구선수들도 제 실력을 못 내는데 너희들은 오죽하겠어? 나 있지, 너희들이 무슨 신세인지 알아. 어떻게 이 축구부에 들어온 건지도 알고.”
더, 점점 더 임시부원들이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
“지금 유럽 리그에서 날아다니고 있는 셰브첸코라는 선수를 알아? 앙리라는 선수를 알아?”
“네.”
“알죠.”
“둘 다 축구를 늦게 시작했는 데도 성공했어. 세상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일단 도전해 봐야 해. 근데 너희들은 제대로 도전할 생각도 없는 거 같아서 감독님 허락 받고 이렇게 얘기하는 거야.”
흥분해서 막 얘기해 버렸다. 김정빈은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되짚고, 너무했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망했다고 생각했다.
김정빈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고 애쓰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얘기는 끝. 나 간다.”
계속 무표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어 도망치듯 떠났다.
“네…….”
“…….”
힘없는 대답이나 침묵만이 자리에 감돌았다. 김정빈은 건물로 도망치듯 들어와서 포커페이스를 풀었다.
“망했다!”
좋게 말해도 모자랄 판에 나쁜 말만 해버렸다.
“멍청한 새끼.”
김정빈은 주먹으로 화장실 벽을 쳤다.
“아악!”
아팠다.
* * *
실패했다는 생각에 우울하게 오후 훈련을 마친 김정빈은 점심과 같은 벤치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멍하니, 아까의 실수를 자책하면서.
“앉아도 돼요?”
그런데 언제 왔는지 모르게 박지훈이 다가와 있었다.
“어?! 응, 그래! 앉아.”
임시부원들은 오후 훈련에서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김정빈 근처에는 일부러 오려 하지 않는 게 느껴졌다.
점심때 말한 게 실수여서 그렇다. 김정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지훈이 옆에 앉은 게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무슨 말을 들을지 몰랐으니까.
“제가 대표로 왔어요.”
“……어.”
“형, 아깐 말 잘하더니 지금은 왜 그래요?”
박지훈의 목소리에는 친근감이 묻어 있었다. 김정빈이 어색하게 웃었다.
“고맙다고 전해달래요. 저도 그렇고요. 부모님도 아닌데…… 현실적인 얘기를 대놓고 해준 어른은 처음이고, 현실적인 도움을 주겠다고 들은 것도 처음이었어요.”
박지훈은 쑥스러워하면서도 당당하게 말했다.
고맙다는 그 말에 김정빈은 안심했다. 그리고 기뻤다.
코치라는 직함은 달았지만, 코치 자격이 없는 자기가 이 집단에서 할 일을 찾아낸 것이다.
내가 도움이 됐다는 사실은 꽤, 아니, 정말 기분 좋은 일이라는 걸 김정빈은 처음 깨달았다.
* * *
김정빈과 박지훈이 친근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때, 건물 옆의 그림자 진 장소에서 송현준과 로베르토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망했다며? 안 망한 거 같은데.”
“……그러게요?”
송현준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밝은 박지훈의 얼굴을 보니 안도감이 들며 나른해졌기 때문이었다.
온종일 임시부원들 앞에서 더 좋은 말을 해줬어야 했는데 라며 후회하다가 로베르토를 불러 자기가 한 일을 털어놓은 송현준이었다.
축구부 관리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솔직하게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일이 잘 풀린 것 같았다. 송현준 본인의 힘이 아닌 김정빈의 힘으로.
“그럼 걱정할 필요 없는 거지?”
“예…….”
송현준은 힘없이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이 상대였다면 더 잘 말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임시부원들이었기 때문에 말문이 막혔다.
왜냐면 저들 중 단 한 명도 프로로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송현준이 기억하는 모든 전생에서 그랬다.
그것 때문일까, 송현준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제가 실패했네요.”
“실패라니. 그동안 해준 게 얼만데.”
로베르토는 송현준의 우울한 모습을 처음 봤고, 신기해했다. 그만큼 더 위로하려고 애썼지만 송현준은 더 땅을 뚫고 들어가려고 했다.
“정빈이 형이 잘 안 해줬으면 다 꼬였을 거예요. 반성할게요. 실패 안 하게 더 열심히 할게요.”
“으음…….”
로베르토는 그 모습에 뜸을 들이다가 솔직한 자기의 바람을 이야기했다.
“나는 네가 더 부담 없이 축구만 즐겼으면 좋겠는데.”
“축구 한 경기에 얼마나 많은 인원이 개입하는데요. 그걸 아니까 그러기가 어려워요. 거기에 개인 훈련도 어려운 상황이니 이런 도움이라도 줘야죠.”
로베르토에게 낯선 모습이었다. 로베르토는 송현준에게 이런 일면이 있다는 걸 깨닫고 기억해 두기로 했다.
“에이, 됐다. 아무튼 무슨 일 있으면 얘기해라.”
송현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어깨동무하면서 말했다. 송현준이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겠어요. 이제 저녁 훈련 봐주러 가야죠.”
“그래야지.”
로베르토는 떠나는 송현준의 뒤통수를 보며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 * *
“현준아!”
저녁 자율 훈련 시간, 김정빈은 복잡한 얼굴로 지나가려는 송현준을 불러 세웠다. 송현준은 느릿하게 김정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형.”
“있잖냐.”
김정빈은 고맙다고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송현준은 녹록지 않았다.
“감독님이 형 칭찬하더라고요.”
“그래? 그건 그렇고 있잖냐.”
“나중에 축구 얘기 또 해요.”
“아니, 있잖냐.”
김정빈은 고맙다고 얘기하려고 했지만, 송현준은 그 말 자체를 틀어막으려는 듯 능수능란하게 말을 돌렸다.
김정빈은 몇 번 더 그러고 송현준의 의도를 깨달았다.
고맙다는 말이 부끄러운지 듣기 싫은지 아무튼 얘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김정빈은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축구는 참 좋아. 그렇지?”
송현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좋아요.”
“너 말도 잘하지만…… 축구 할 때가 최고더라. 솔직히 유럽 프로리그 선수들이 떠오를 정도야. 내일 내부 친선경기지? 나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기대할게.”
그 말에 왠지 모르게 송현준은 복잡했던 마음이 풀리는 걸 느꼈다. 당장 내일 할 일이 떠오르니 기분이 나아졌다. 내일 경기에서는 상대 팀에게 미안하지만, 전력으로 해야겠다고 송현준은 다짐했다.
“네, 멋진 모습 보여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