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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인드 축구천재-84화 (145/173)

리마인드 축구천재 84화

김정빈은 자기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움직이며 말했다.

“굉장하다 생각은 했었는데요.”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예…… 한 차원이 아니라 몇 차원 위에 있는 거 같은데요. 뭐죠. 쟤…….”

잔디밭 위에 그려놓은 경기장 위에서 내부 친선경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송현준은 축구부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윤태상, 노태신, 박종혁의 팀을 혼자서 박살 내고 있었다.

“막아…… 아니! 그건!”

노태신은 악을 쓰다가 당황했다.

워낙 개인기로 수비진을 휘저어대자 수비수가 흥분해서 거친 백태클을 시도한 것이다.

심판을 보고 있던 김진호도 깜짝 놀라서 휘슬을 입에 물었다. 그런데 송현준이 말도 안 되게 위기를 회피하는 바람에 그 자세로 굳었다.

측후방에서 발목으로 들어오는 위험한 태클을 어떻게 알았는지 태클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공을 뻥 차고 태클을 뛰어넘은 것이다.

로베르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송현준은 그대로 더 치고 나가서 왼쪽 측면에서 왼발로 중거리 슛을 꽂아 넣었다. 당연하게도 골이었다.

윤태상의 유난히도 허탈한 얼굴이 로베르토의 눈에 띄었다.

송현준은 바로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팀 동료들이 축하를 건넸지만, 평소보다 무표정하게 답하는 송현준이었다.

“평소보다 더 제대로 하네요. 그동안은 살살 하는 기미가 있었는데. 야, 현준아, 심호흡 좀 해라.”

“예.”

로베르토의 말에 지나가던 송현준이 짧게 대답했다.

“중학교 축구부 에이스면 다 이 정도는 하나요?”

송현준이 멀어지자 김정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글쎄요. 저도 여기가 처음이라…….”

“아, 그랬죠.”

“그래도 확실한 건…… 쟤 진짜 물건이에요. 제가 유소년팀에 있을 때 이탈리아 국가대표 애들이랑 경기 뛰어본 적도 있는데…… 걔네보다 더 가늠이 안 돼요.”

“그 정도라고요?!”

깜짝 놀란 김정빈이 큰 목소리로 물었고, 로베르토는 덤덤하게 답했다.

“솔직히 당장 유럽으로 보내고 싶은데, 계획이 있는 거 같아서 별말 안 하고 지켜보는 거죠.”

“그래서 훈련 장소를 제공해 줬던 거군요…….”

로베르토가 송현준에게서 김정빈으로 시선을 옮겼다.

“현준이가 말했나요.”

“네.”

로베르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안 도와줬어도 알아서 잘했을 거 같아요.”

조금 쓸쓸해 보이는 로베르토를 김정빈이 위로했다.

“그래도 현준이가 감독님 많이 생각하던데요. 저 도와주는 것도 감독님을 위해서라고.”

그 말에 로베르토는 쑥스러워졌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말없이 다시 시작한 경기를 바라보다가 자길 쑥스럽게 만든 김정빈에게 한마디 했다.

“축구부원이랑 그런 사적인 얘기도 하고 다니는 거 보니까 이제 일이 좀 할 만해진 거 같네요? 오늘부터는 일 좀 더 맡겨도 되겠죠?”

“예? 아니, 그게 아니고…….”

“영상 편집해야 할 게 많았는데 슬슬 본격적으로 일거리 줄게요.”

“어…… 예, 얼마든지요.”

그렇게 말하는 김정빈은 시무룩해 보였다.

로베르토는 그에게 보이지 않게 작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친선경기를 봤다.

일방적이었다.

내부 친선경기도 선수들의 조합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이민우와 송현준이 한 팀이었다.

거기에 송현준이 진심 모드로 임하니 상대가 되질 않았다.

상대 팀은 당연하고 같은 팀원들마저 둘의 기량을 보면서 기가 죽는 게 느껴졌다.

이러면 안 된다.

비교 대상이 너무 높다.

적당한 목표는 선수를 성장시키지만, 까마득해서 보이지 않는 목표는 선수를 좌절시킨다.

특히, 분명 좋은 기량을 갖고 있는 윤태상이 날이 갈수록 위축되는 게 눈이 보였다.

로베르토는 엄지와 검지로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 * *

“혼자서 뭐 보는 거냐?”

“이거요.”

벤치에 앉아서 PMP를 보고 있으니 김정빈이 옆에 앉았다.

김정빈에게 재생되고 있는 경기 화면을 보여줬다.

“오…….”

“무슨 경기인지 맞춰보실래요? 축구 마니아면 알아야 하는데.”

“좋아.”

김정빈은 진지한 얼굴로 PMP를 붙잡고 영상을 뚫어져라 봤다.

그동안 고개를 들어 하늘에 수 놓인 별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개인 훈련은 하루에 30분 이상 하지 않는다.

같이 지내는 축구부원들은 못 느끼겠지만,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고 있었다. 오죽하면 성장통이 느껴져서 팀 훈련도 빠질 때가 있었다.

“굴리트가 있네…… 일단 세리에 경기고…… 밀란 대 나폴리고…….”

“오, 제법인데요.”

“후후.”

김정빈은 이상하게 웃으면서 여전히 경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슨 경기인지까지 맞춰보고 싶은 거 같았다.

김정빈이 오고 일주일이 지났다. 김정빈은 잘 적응했다.

선출이 아니라는 점에 무시하려는 축구부원들도 있었지만, 애초에 전문적인 축구 지식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영상 편집이나 시간 재기 같은 잡일들을 도맡아 했기에 그런 부원들은 전부 사라졌다.

그냥 공부 잘했고 아는 게 많은 친근한 형으로 축구부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아! 마라도나까지 나오네. 87-88시즌 경기 맞지? 그 이상은 못 맞히겠다.”

“맞아요. 사실 구체적인 날짜까진 몰라요. 아마 리그 2차전일 거예요.”

“이거 어떻게 구했냐. 나도 주면 안 되냐?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게.”

“그냥 드릴게요.”

“정말?”

김정빈은 아이처럼 기뻐했다. 참고로 이민우도 이 영상 보더니 달라고 난리 쳐서 전지훈련 끝나면 주기로 했다.

영상이 신기한지 계속해서 돌려보던 김정빈이 물었다.

“근데 이 귀한 걸 어떻게 구한 거야? 우리나라에 중계도 안 했을 텐데.”

“아버지가 세리에 마니아시거든요. 막, 별의별 방법으로 구했대요. 보통 일본에서 비디오나 DVD로 가져오셨다던데.”

“오…… 멋지다. 근데 이거 보면서 뭐 하는 거야?”

“이미지 트레이닝이요.”

아버지는 내가 어린 시절부터 세리에 마니아였다.

구하기 힘든 영상을 어떻게든 구해왔고, 어린 내게 늘 자랑했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대단하다고 말하니 봤었던 거 같다.

하지만, 영상에서 펼쳐지는 플레이는 나를 매혹했고, 아버지보다도 더 많이 영상을 돌려보면서 축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배웠다.

그래서 몸으로 훈련을 할 수 없을 때는 이 시절의 영상들을 찾아서 본다.

영상을 보다 보면 머리인지 영혼인지에 틀어박혀 있던 기억들이 튀어나오고, 영감을 얻는다.

뭣보다 아버지가 어렵게 구해서 옮겨준 소중한 보물이기에 우울할 때 보기도 좋았다. 보통 몸으로 훈련할 수 없는 시기는 부상을 입었을 때기 때문이었다.

“화이트보드도 그래서 가져온 거? 이거 네가 적은 거야?”

“네.”

영상을 보는 것과 화이트보드에 끄적거리는 걸 동시에 하면 전체적인 흐름을 연상하기 더 좋았다.

뭣보다, 꼭 육체적으로 가혹한 훈련뿐만 아니라 이런 식의 개인 훈련도 있다는 걸 축구부원들에게 보여주기 딱 좋았다.

마침 박종혁이 다가왔다.

우물쭈물하는 모양새가 용건이 뻔했다.

“도와줘?”

“헤헤, 땡큐.”

“아, 진짜, 귀여운 척하면서 웃지 마.”

“흐헤헤.”

“그건 더럽고.”

“너무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친구들의 훈련을 돕는 것 정도는 괜찮았다. 격한 동작만 아니면 성장판에는 큰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전 가볼게요. 계속 보실래요?”

“응.”

“근데 감독님이 영상 편집 맡기지 않았어요?”

“…….”

“저기요?”

“나도 가끔은 힐링하고 싶어. 15분만 있다가 돌아갈 거야.”

김정빈의 우울한 말에 박종혁과 나는 웃었다. 요 며칠 김정빈이 잠도 거의 못 자고 일한다는 건 축구부원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형 영상 보면 도움 많이 되니까 잘 부탁해요.”

“맞아요.”

박종혁의 말에 동조하자 김정빈이 쑥스러워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이 자식들, 그래도 쉴 거야.”

“에이.”

“안 먹히네.”

* * *

가장 구석에 있는 방은 로베르토와 코치들의 숙소였다.

로베르토와 코치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전지훈련 성과를 정리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기록이 오르고 있어요. 아주 순조로워요.”

김진호가 프린트한 종이를 보며 얘기했고, 같은 종이를 들고 있는 로베르토와 김정빈도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워했다.

꾸준하고 강도 높은 훈련이 축구부원들을 성장시키고 있었다.

특히, 학교에서부터 이어온 기본기 훈련은 수치로는 보이지 않지만, 선수들의 실력 자체를 향상시키고 있었다.

“애들이 공 차는 것도 훨씬 안정적으로 변했어요. 리프팅이 중요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진작 시킬 걸 그랬어요.”

김진호가 그 점을 짚어줬고, 김정빈은 눈을 부릅뜬 채로 회의 내용을 노트북에 기록하고 있었다.

수면이 부족한 김정빈의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기록도 향상되고, 실력도 느는 게 보이는데…… 문제가 있어요.”

로베르토가 말을 시작하자 두 코치가 집중했다.

“선수들이 그걸 몰라요.”

“아.”

“…….”

김진호는 동감한다는 듯이 탄성을 내뱉었고, 김정빈은 잘 몰랐기에 묵묵히 그 내용을 적었다.

축구부원들은 분명 성장하고 있었다.

문제는, 전부 실력이 오른다는 점이었다.

다 올라버리니 상대적으로 자기들 실력이 정체돼 있는 걸로 착각하는 것이다.

심지어 친선경기도 내부에서만 하니 더 알 수가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송현준 같은 괴물의 존재 때문에 자기들을 더 낮게 보는 부분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간단했지만, 쉽지 않았다.

“친선경기를 해야 하는데…… 미치겠네요. 죄다 거절, 거절, 거절, 거절, 거절.”

로베르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산 좋고 물 좋고 잔디가 넓게 펼쳐진 이 훈련장의 최대 단점은 외부 팀과 친선경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로베르토는 외국인에 한국 축구계를 겪지 않은 외부인이었기에 이 문제는 더 심각했다.

인맥이 없었다.

이사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사장은 이 지역에 있는 축구부 감독들의 연락처를 구해줬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든 축구부가 거절했다.

로베르토는 자기의 인맥이 부족하고, 주전들이 많이 빠져나간 걸 다른 감독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외부에서 볼 때, 친선경기를 하면 도움이 되리라 여길 만한 실력적인 부분에서도 메리트도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머리가 아파요. 근처 1시간 거리에 축구팀들이 전지훈련 오는 장소들이 여럿 있는데, 어느 팀이 왔는지도 모르니…… 아무래도 직접 돌아다녀야 할 것 같아요.”

로베르토의 푸념을 듣던 김진호가 갸우뚱했다.

“그거라면 금방 알 수 있는데요?”

“예? 어떻게요?”

“이쪽으로 오시죠.”

이 방에는 인터넷이 연결돼 있었다.

로베르토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김진호와 김정빈은 인터넷을 자주 했다.

그리고 회의 직전에는 김진호가 사용하고 있어서 웹사이트가 그대로 떠 있었다.

“보시죠.”

로베르토와 김정빈이 김진호가 가리키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축부모 : 전국 축구부 학부모 모임>이라는 대문이 걸린 카페가 열려 있었다.

그 밑에는 닉네임 ‘떠돌이코치’, 그리고 그 밑에는 ‘우수회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학부모 모임이요?”

“예. 축구부 아들들을 둔 학부모들이 주로 가입하는 카페인데 전국에서 가장 큽니다. 여기 구경하고 있으면 어느 축구부가 어디로 전지훈련 갔는지 다 나와요. 정보 공유가 가장 활발한 곳이거든요.”

로베르토는 바로 떠오르는 궁금한 점을 물었다.

“……대체 여기에 어떻게 가입했습니까?”

“인터넷으로 만난 같은 게임 하는 사람이 여기 운영자라서요. 제가 중학교 축구부 코치라고 하니까 가입시켜 주더라고요.”

“좋군요. 아주 좋아요. 그럼 일단 이것부터 찾아보죠.”

이 지역 근방에 어느 중학교 축구부가 전지훈련 왔는지를 알아내야 했다.

연락처는 학교 홈페이지를 찾아보면 되니 학교명만 알면 됐다.

“찾았네요!”

“티알이 살던 데네요.”

“정말요?”

그렇게 티알이 살던 곳에 전국구 명문 중학교가 네 곳이나 머무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친선경기를 치르고 있다는 정보까지 확인했다.

활로가 뚫리는 것 같다.

로베르토는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김진호 코치님, 잘했어요.”

“에? 뭘요…… 하하.”

“내일 직접 가봐야겠네요. 내일 훈련은 김진호 코치님에게 맡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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