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89화
노태신이 성시건을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6학년 마지막 전국대회였다.
‘진짜 잘한다…….’
실제로 본 성시건은 나지막한 감탄이 새어 나올 정도로 굉장했다.
노태신은 항상 주변에서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가끔 다른 지역에서 유명하다, 천재라는 소문이 들리는 선수들을 상대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자기가 최고라고 확신했다.
물론 경기에서 질 때도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노태신은 언제나 경기에서 가장 돋보였고, 주변 사람들도 전부 그렇게 말해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시건의 팀에게 패배했을 때는 달랐다. 노태신이 아니라 성시건이 가장 빛났다. 처음 겪는 상황에 노태신은 강렬한 승부욕을 느꼈다.
노태신은 생각했다. 성시건은 명문 초등학교 축구부 소속이다. 자기가 속한 초등학교와 팀원들의 실력 차이가 많이 난다. 같은 조건이라면 자기가 이길 수 있다.
그러니까 열심히 훈련해서 다음에 만날 때는 꼭 이기자.
그런 결론을 내린 노태신은 실력을 키우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아마 이 마음가짐 덕분이었을 거다. 중학교에 올라와서 치열하게 훈련하고 치른 첫 전국대회에서 4강이라는 성적을 낸 것은.
노태신은 4강에서 또 한 번 성시건을 만났고, 또 졌다. 노태신은 화가 났지만 이번에도 팀이 약해서 진 거라며 자신을 위로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대표에 선발되는 영광을 맛봤기에 패배의 쓴맛을 금세 잊을 수 있었다.
-반가워! 노태신 맞지? 4강 때 네가 제일 잘하더라. 같이 뛰면 재미있겠다.
국가대표에는 당연하게도 성시건도 있었다. 성시건은 먼저 인사를 건네며 노태신을 친근하게 대했다.
노태신도 성시건과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소집 후 사흘 만에 치러진 친선경기에서 노태신의 자리를 성시건이 차지하며 미묘한 균열이 생겼다.
성시건은 윙인데 노태신의 공격수 자리를 가져갔다. 감독의 결정이 이해 가지 않았다.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노태신에게 그 당시 국가대표 감독이 말했다.
-시건이가 하는 거 집중해서 봐라.
짧은 말이었지만, 얼마나 잘하나 보자는 심정으로 노태신은 성시건의 동작을, 걸음 하나까지 보겠다는 마음으로 뚫어져라 봤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좌절했다.
분명 윙으로 뛴 시간이 더 길었을 텐데도 성시건은 노태신보다 훨씬 더 잘했다. 노태신의 주 포지션인데도 말이다.
그날 이후 노태신은 성시건을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성시건을 이겨보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투쟁심은 사라졌고 무덤덤해졌다.
축구를 그만두지는 않았다. 축구가 싫은 건 아니었고, 공부를 못하니까 축구로라도 먹고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있었다.
2학년이 되자마자 주장을 달았지만 귀찮은 일은 전부 간섭하지 않았다.
2, 3학년 부원들 일부가 양아치 짓을 해서 후배들을 괴롭히든 말든 눈과 귀를 닫고 살았다.
그러다 축구부원들이 대거 탈퇴하게 됐어도, 3학년의 첫 전국대회에서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둬도 크게 분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진출을 위한 최소 조건은 맞췄고, 프로 선수가 되는 것 정도라면 충분히 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말이다.
자신을 그렇게 좌절로 몰아넣은, 친근하면서 맘에 안 드는 자식이…… 그 성시건이…… 실시간으로 혼이 빠져나가고 있다.
“막아!”
“저거 뭐야!”
휘경 중학교 선수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중앙에서 우측면으로 빠진 이민우가 성시건을 앞에 두고 제자리에서 발재간을 부리다 갑자기 뒤꿈치를 이용해 중앙으로 공을 밀어줬다.
우측 윙백이었던 송현준이 어느새 중앙으로 들어와 공을 받고, 상대 미드필더를 몸짓 한 번에 제쳐낸 후 어느새 성시건 뒤로 달려가고 있는 이민우에게 공을 되돌려줬다.
침착함을 잃은 성시건은 송현준을 쫓았다가 이민우를 쫓는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보였다.
노태신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성시건이 저런 표정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아서 그런지 몸이 굳었다.
“이 정도일 줄이야…… 시건이를 아예 박살 내는구만.”
“대단하죠.”
나준하의 극찬과 로베르토의 긍정이 들려왔다. 나준하는 노태신이 존경하는 공격수였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저 상황을, 광경을 당연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자기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생각했던 성시건이 유린당하고 있었다.
“태신 선배!”
그리고 그 당사자인 송현준은 누구보다 즐겁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경기를 즐기고 있었다.
“아…… 미안.”
충격적인 장면이 연이어 나타났기 때문일까, 노태신은 송현준의 완벽한 공간 패스를 쫓지 못하고 머뭇대다가 찬스를 놓쳤다.
“괜찮습니다! 다시 드릴게요! 이민우 나이스다!”
“좋아 좋아! 또 가자고!”
노태신을 위로한 송현준은 이민우와 웃으면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성시건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눈빛도 죽어 있었다.
국가대표 첫 소집 때 자신의 표정이 저랬던 걸까.
“망할…….”
기분이 나빴다.
이 감정이 뭔지 모르겠지만, 열 받았다.
송현준과 이민우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다. 다만, 이 정도로 대단한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이들은 평소에도 정말 열심히 한다는 사실이 노태신을 흔들고 있었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둘이 자기보다 더 열심히 하고 있다.
노태신은 불현듯 그 당시 성시건에게 이기지 못했던 이유가 지금처럼, 송현준과 이민우처럼 모든 걸 바쳐서 준비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겼다.
“기분 개 같네…….”
뭣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저 둘이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전지훈련 동안 이민우와 송현준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봐왔다.
-이런 건 해봐서 익숙해.
체력훈련을 할 때 송현준이 박종혁에게 한 말이었다.
-킥을 어떻게 이렇게 하냐고? 십만 번은 넘게 차면 돼.
이민우가 조언을 구하는 1학년에게 해줬던 말이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아왔으면서도 지금도 하루를 전부 축구로 채우고 있었다. 이민우는 심지어 잘 때까지 공을 끌어안고 잤고, 송현준은 무릎 부상이 있는 상태에서 이론 공부까지 해댔다.
똑같은 수준으로 훈련을 했을 때, 결과가 다르다면 재능의 차이가 맞다.
그렇지만 지금은?
저 둘이 자신보다 열심히 하는데?
적어도 똑같이 열심히 하고 그런 말을 해야 하는 게 아닌지.
자신은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었는지.
뭣보다, 노태신에게 좌절했던 그 당시 더 열심히 할 수 있던 게 아니었는지.
이제는 늦은 게 아닌지.
헛되이 날려 버린 시간들과 의심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채웠다.
삐익!
“선배님?”
“아.”
어느새 근처까지 온 송현준의 아주 쉬운 패스를 노태신은 또 놓쳤고, 공은 바깥으로 나갔다. 정신이 다른 데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통이 떨어질까 두려워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로베르토 쪽을 봤지만, 로베르토는 팔짱을 낀 채로 덤덤하게 노태신을 보고 있었다.
“어디 아프십니까?”
“아니, 아니야. 집중할게.”
“네, 그러면 됩니다.”
송현준이 노태신의 두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건방진 행동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송현준의 눈동자는 바라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깊게 느껴졌다.
노태신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떠오르는 그 눈동자에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송현준이 이어서 위로하듯 말했고,
“안 늦었습니다. 아직 전반전은 10분밖에 안 지났으니까요.”
그 말이 노태신의 고민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아서.
“지금부터 하면 됩니다. 또 멋진 패스를 찔러 드리겠습니다. 저 선배님한테 한 방 먹어야죠.”
성시건을 보며 목소리를 낮춘 송현준을 보며 노태신은 웃었다.
그리고 노태신은 전반전이 끝날 때까지 두 골을 넣었고, 대영 중학교는 전반전을 2-0으로 마쳤다.
* * *
“더 뛰고 싶은데…….”
“안 된다는데 어떡하냐.”
이민우에게 단호하게 말하며 김진호가 사온 바나나 한 개를 까서 꾸역꾸역 삼켰다.
“브라질로 돌아가면 많이 뛸 수 있겠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빨리 가. 나도 네가 프로에서 뛰면 어떨지 궁금해.”
“빨리 가라고……? 쏭, 섭섭하게 왜 그래.”
“농담이야.”
사실 진짜 궁금해서 그랬다. 전생에서는 풋살만 줄창 하다가 국가대표까지 갔던 녀석이 11대 11 축구에서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가.
내 안목으로는 부상만 없으면 무조건 월드베스트에 들 재목 같은데 어떨지 모르겠다.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축구부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냐.”
“성시건이 아무것도 못 하는 거 봤지?”
“우리 올해 설마…….”
로베르토의 후반전 전술 지시는 진작 끝났다.
이민우 교체 아웃, 티알 투입에 나머지는 그대로.
그리고 나는 무릎을 생각해서 후반전에는 최대한 뒤에 머무르기로 하고 엄태영이 오버래핑을 한다.
이게 전부였다.
시간이 남은 덕인지 우리는 각자 흩어져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물론 중간마다 나와 이민우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우리가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 했을 거다. 이해한다.
전반전은 계획대로 흘러갔다. 노태신의 플레이가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또, 모처럼 만난 프로랑 유사한 팀이라 전력으로 부숴 버렸다. 물론 슈팅 찬스까지 가면 다 양보했지만.
굳이 튀려 하지 않아도 지금 선수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나준하는 나와 이민우의 가치를 눈치챘을 테니까.
“저쪽 살벌하다…….”
“쟤네 입장에서 우리는 3-0으로 이겨야 하는 팀인데 반대로 됐으니까.”
“아하.”
이민우와 얘기하고 있으니 옆에서 묵묵하게 앉아 있던 엄태영이 입을 열었다.
“저기, 현준아…… 나 어떡하지.”
“뭐가?”
“너만큼 할 자신 없는데…… 그리고 민우도 없고 너도 공격에 합류를 안 하면…….”
공격이란 최선의 수비라는 말이 있다. 전반전은 그 말이 가장 잘 구현된 경기였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두들기자 휘경 중은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했고 우리는 수비를 편하게 할 수 있었다.
엄태영도 다른 모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내가 안 해도 우리가 우세할걸?”
휘경 중에 속한 국가대표급 선수들은 정신적인 면보다는 감각적인 면과 신체적인 면이 훌륭한 선수들이었다.
전반전 내내 정신적으로 고통받던 그들을 불과 15분 만에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또, 무엇보다 로베르토의 훈련이 우리 선수들의 체급을 전체적으로 끌어올렸다.
나와 이민우가 활약했다지만 축구는 둘이서 하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다른 선수들이 최소한을 받쳐주니까 그게 가능했던 거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데…….”
물론 엄태영은 믿지 않았다. 다른 선수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다.
여기서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경기장에서 이들에게 주도권을 맡기고, 흐름 정도만 잡아주면 알아서 깨달을 테니까.
“진짜 걱정할 필요 없어. 그리고 이거 친선경기잖아? 잊었어?”
“아.”
“편하게 해. 편하게.”
“그래야겠다.”
엄태영의 표정이 약간 편해졌다.
삐익!
“후반전에 출전할 선수들은 운동장으로 나와주세요!”
심판을 맡은 휘경 중 코치의 외침이었다. 휘경 중이 당하고 있어서 그런가 목소리가 왠지 한 톤 내려간 듯했다.
“잘할 수 있을까?”
엄태영이 또 불안해했다. 그런 엄태영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기말고사를 떠올려 봐. 내가 말한 대로 하니까 잘 됐잖아? 이번에도 똑같아. 그냥 하면 돼. 날 믿어봐. 난 우리 팀이 정말 잘한다고 생각해.”
엄태영이 날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네 말대로 하면 다 잘 됐지. 이번에도 믿을게.”
엄태영은 순하고 착한 친구였다. 경기가 끝나고 엄태영이 기뻐할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