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90화
“아!”
중앙 수비수 정두식이 패스하자마자 탄식했다. 목적지인 엄태영보다 다섯 걸음은 옆에 떨어진 곳으로 공이 향하고 있었다. 패스 실수다.
어떻게든 공을 받은 엄태영은 패스를 하려 전방을 바라봤지만, 전부 중구난방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엄태영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상대 팀원들이 달려들자 전방으로 대충 공을 찼다.
당연하게도 패스가 바로 올 줄 몰랐던 노태신과 박종혁은 공을 쫓아 한 곳으로 뛰는 실수를 저질렀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공격수는 다른 공간으로 침투해야 하는데, 기본마저도 지키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집중 안 해!? 다들 뭐 하는 거야!”
공을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상대 수비수가 헤딩하는 모습을 세 번째로 본 노태신이 소리를 질렀다.
분위기를 잡아야 할 주장 윤태상마저도 패스 실수를 두 번 저질렀기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경기가 시작한 지 5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 지경이었다.
후반전, 우리 팀은 엉망이었다.
“전반전처럼 천천히 하면 되잖…… 뭐 해!? 안 막아!”
전반전의 깨달음으로 침착함을 유지하는 노태신만이 선수들을 다독이려 했지만, 방금 빼앗긴 공이 순식간에 우리 팀 골대 근처까지 와서 말을 멈추고 다급하게 수비진영으로 합류하려고 뛰었다.
우리 팀 미드필더들은 상대 선수와 공이 지나가고 나서야 뒤늦게 쫓아오고 있었다.
나 또한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급격하게 전체가 무너져 버리면 나 혼자서는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틈이 생기니까.
“막아! 막으라고!”
노태신이 발악하듯 외쳤다. 모처럼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데 팀이 개판이 났으니 열 받을 만하다.
나와 상대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어느새 중앙으로 이동한 성시건이 막 공을 받고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패스 경로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연습한 전술이었던 건지 성시건은 망설임 없이 왼쪽으로 패스했다.
왼쪽에는 엄태영이 마크 중인 국가대표 오른발 윙어 중앙으로 이동한 성시건이 공을 막 받았다. 최대한 빠르게 패스 경로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성시건은 더 빠르게 엄태영이 상대하던 신정호가 폭발적인 속도로 치고 나왔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일대일 찬스.
삐익!
골이 들어가는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골! 휘경 중학교 득점!”
심판의 외침을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수비수들부터 공격수 박종혁까지.
노태신을 제외한 전부가 잔뜩 흥분해 있었다.
시작은 사소한 실수에서였다. 우리 공으로 경기를 시작했는데, 평소대로 패스를 이어나가던 우리 팀은 윤태상이 공을 잡자마자 평소보다 약간 더 빠른 속도로 박종혁에게 패스했다.
당연하게도 휘경 중학교에게 이런 실수는 먹히지 않는다.
휘경 중학교는 공을 뺏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천천히 다시 가다듬으면 되니까.
근데 박종혁과 윤태상이 공을 뺏기자마자 다시 뺏어오겠다고 진영을 깨뜨리며 조급하게 적 선수를 쫓아가면서 비극이 시작됐다.
공을 빼앗은 상대 수비수는 침착하게 공을 뒤로 돌리고, 골키퍼는 롱 킥으로 단 한 번에 발 빠른 신정호 앞으로 패스했다.
상황을 미리 파악한 내가 신정호를 막긴 했지만, 우리 선수들이 당황한 게 보였었다.
그리고 그 흐름이 5분 내내 이어지다가 실점으로 방점이 찍혔다.
축구를 비롯한 모든 팀 스포츠는 ‘기세’를 정말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 팀은 지금 기세가 꺾여 있었다. 그리고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이 상태가 유지된다면 대참사는 예정돼 있었다.
공격수가 뛰어 들어갈 준비도 안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패스할지도 모르고, 미드필더가 공을 받을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앞에 공을 줬다가 가로채질지도 모르고.
십 년 뒤에 ‘이렇게 축구 하면 망한다.GIF’라는 제목으로 돌아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최악의 플레이가 이어질 것이다.
“전부 뭐 하는 거야! 너희들 그것밖에 안 돼!? 하던 대로만 하라고 했잖아!”
로베르토도 이대로면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근데, 감독 말이 잘 통한다면 그게 게임이지 실제 축구일까.
다들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저 상태가 뭔지 잘 알고 있었다.
귀와 볼이 뜨겁고 머리도 꽉 차서 아무리 들어도 인지하지 못하는 거다.
“뭐 해? 시작 안 해?”
심판의 재촉에 멍하니 있던 박종혁이 노태신에게 패스했다.
노태신은 얼굴을 찌푸리며 누구에게 패스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런 고민의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듯 휘경 중학교의 선수들은 늑대 떼처럼 노태신에게 달려들었다.
“선배님! 뒤로요!”
손을 들고 소리쳤다. 노태신은 망설임 없이 내게 패스했다.
성시건을 비롯한 상대 팀 선수들이 이번에는 날 그물에 가두듯이 둘러싸면서 압박하려고 했다. 나는 그들이 모여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의 골키퍼에게 정확하게 패스했다.
골키퍼는 공을 받았고, 그대로 머뭇거렸다.
골키퍼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거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수이자 내 인생 최고의 주장이었던 선수가 해줬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경기를 하다 보면 같은 팀이라도 말이 안 통할 때가 있어.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 거 같아?
난 그때 같은 팀 선수의 등짝을 후려치겠다고 했다. 주장은 껄껄 웃으며 재밌어하다가 진지하게 답을 말해줬다.
-그것도 나쁘진 않지. 말이 안 통하면 행동을 유도하면 되거든.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결국 신체 반응을 따라가게 돼 있거든.
“공 내놔!”
막 롱 킥을 하려고 자세를 잡던 골키퍼에게 외쳤다. 골키퍼가 어리둥절하자 한 번 더 말했다.
“내놓으라고!”
같은 1학년이라서 더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골키퍼는 어리둥절하면서도 내게 공을 넘겨줬다.
내 이상한 행동에 우리 팀도, 휘경 중도 당황한 게 느껴졌다. 내가 천천히 공을 몰고 전진해도 아무도 달려들지 않았다.
물론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성시건을 비롯한 적들이 내 공을 뺏기 위해 달려들었다. 아까처럼 포위망이 완전히 좁혀지기 직전, 다시 골키퍼에게 패스했다.
“어어?”
“뭐 하는 거야.”
성시건이 불평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압박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다시 외쳤다.
“패스!”
골키퍼는 내 말을 순순히 따랐다. 공은 다시 내게 왔고, 나는 또 한 번 천천히 공을 가지고 전진했다.
수비진에서 느릿하게 돌리는 패스.
축구 팬들은 프로 경기에서 이런 모습이 나오면 답답해하며 야유를 보낸다. 하지만, 지금은 이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위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우리 팀원들은 조급하거나 느리게 움직이다가 제 자리로 돌아오길 반복하다가 이제 슬슬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패스할 의도가 없다는 걸 하나둘 깨달은 것이다.
심장 박동이 느려지며 머리에서 피가 빠지고 있을 타이밍이었다.
이제 들릴 거다.
“차분하게 합시다! 우리가 이기고 있습니다!”
몇몇의 눈빛이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나는 팀이 심호흡할 기회를 만든 거였다.
내가 외치는 그 틈에 앞에서는 성시건이 뒤에서는 공격수가, 왼쪽에서는 중앙 미드필더가 모든 방향을 틀어막으며 압박했다.
이번에는 골키퍼에게 향하는 길까지 막아버렸다.
역시 이래서 명문 중학교랑 축구를 하면 재미있는 거다.
이번에는 다른 답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난 오히려 우측 사이드 라인으로 공을 몰며 그들을 내 쪽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성시건이 날 향해 발을 뻗는 순간, 공을 툭 차서 성시건의 발을 맞췄다. 공은 성시건을 맞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니까, 다시 우리 공이다.
“하, 진짜!”
항상 웃는 낯이었던 성시건이 열을 냈다.
“공 자꾸 끌래! 그거 비매너인 거 몰라?!”
언성이 점점 높아졌지만, 침착하게 대처했다.
“우리 선수들이 흥분해서 템포 조절하는 게 비매너라고요?”
“뭐? 이게 따박따박!”
삑, 삐빅, 삑!
말다툼이 격해지자 심판이 끼어들었다.
심판도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먼저 날 보고, 성시건을 향해 화를 냈다.
“성시건! 정신 안 차리지! 그게 화낼 일이야! 언제나 침착해야 한다고 내가 말했어, 안 말했어!”
심판은 휘경 중학교의 수석코치였다. 감독 바로 아래의 위치, 성시건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프로 경력도 꽤 있는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성시건, 내가 상황에 맞는 플레이를 하라고 했지? 그게 무슨 추태냐.”
심지어 근처 터치 라인에 있던 나준하 감독마저도 성시건을 질책했다. 나준하는 성시건에 대한 기준이 높았다. 상황에 맞는 플레이는 나준하가 성시건에게 내린 숙제였다.
자기 팀 감독마저도 내 편을 들자 성시건은 쳇 하는 소리를 내며 자기 위치로 돌아갔다.
심판이 침을 퉤 뱉더니 날 향해 말했다.
“그리고 너, 한 번 더 그러면 옐로카드야. 고의적인 경기 지연도 파울 사유인 거 몰라?”
“죄송합니다.”
경고를 받더라도 해야만 하는 플레이라는 말은 삼켰다. 굳이 시비 걸 필요는 없었으니까. 구두 경고로 끝난 게 다행이었다.
“경기 재개해. 쓰로인부터.”
“네!”
심판이 던진 공을 양손으로 받았다.
고의적인 경기 지연에 상대 선수와의 분쟁, 심판의 중재까지. 대충 3분은 끌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모든 선수의 심박 수가 정상으로 돌아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뭐 해? 티알, 뛰어! 다시 시작이야!”
“어…… 응!”
주변에서 눈치를 보던 티알이 내 외침과 함께 던져진 공을 받고, 내게 돌려줬다.
“태신 선배님!”
나는 크게 외치면서 노태신이 뛰어 들어가는 움직임이 시작되는 걸 확인하고 길게 패스했다. 노태신은 한 번에 일대일 찬스를 맞이했고, 아쉽게도 골을 넣지는 못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기세가 돌아왔다. 선수들이 패닉에서 빠져나온 게 눈에 보였다.
* * *
송현준은 방금 경기를 고의로 지연시키고, 상대 선수와 말다툼을 했다.
말로만 늘어놓으면 전혀 멋지지 않은 그 일련의 과정에서 나준하는 전에 없던 감탄을 하고 있었다.
축구만 30년을 했다.
천재라는 선수들을 많이 봐왔다.
자신도 동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
그런데 저건 뭔가.
천재가, 유망주가, 기술 뛰어나고 신체 능력만 좋으면 됐지…… 전술 이해도도 뛰어나고 팀 전체가 패닉에 빠졌다고 자기가 직접 나서서 팀 전체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나준하는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감탄을 입 밖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미쳤네. 미쳤어. 진짜 쟤…… 미쳤네.”
송현준을 중학교 최고의 재능이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풋살대회에서 데려오지 못한 걸 아쉬워했고, 어느 축구부로 갔는지 찾아낸다면 U15 국가대표에도 추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송현준은 그릇 자체가 다르다는 걸 방금의 플레이에서 깨달았다.
“로 감독.”
“예?”
다시 페이스를 찾은 선수들을 독려하던 로베르토가 나준하를 봤다.
“현준이 무리시키면 내가 몽둥이 들고 찾아갑니다?”
“예에?”
“소중하게 잘 관리해 달라는 말이에요.”
“저희 선수니까 당연하죠. 근데 갑자기 왜…… 오오! 그거다! 태신아!”
로베르토의 외침에 나준하가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대영 중학교가 공격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송현준 없이.
정두식과 윤태상이 공을 주고받다가 윤태상이 티알에게 패스, 티알은 윤태상에게 바로 공을 돌려주면서 전진. 윤태상은 티알의 앞으로 패스.
티알은 측면을 쭉 달려 나가다가 속도를 잠깐 늦추면서 개인기를 통해 한 명 제쳐내고 긴 크로스.
헤딩으로 중앙에 패스하는 노태신, 노마크 상태에서 공을 받은 박종혁.
이어지는 침착한 슈팅.
삐익!
“그거지!”
골을 알리는 휘슬과 동시에 로베르토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준하는 입가에 미소가 절로 생기는 이 상황이 즐거웠다.
방금 골은 단순하지만 기본이 정말 잘 지켜져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팀의 방향성이 보이는 한 수였다.
나준하는 그 점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좋은 감독이 될 자질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팀을 일관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나준하는 유럽에서 뛸 때 우리나라와 유럽 나라들의 유소년 지도자의 수준 차이를 늘 아쉬워했었다. 그래서 첫 코치직으로 중학교 감독을 선택한 거였다.
근데, 지금 좋은 감독이 될 자질을 가진 감독이 한국 유소년 축구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이 너무 기분 좋아서 나준하는 느닷없이 로베르토에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억?! 왜 그러십니까.”
“나 참, 송현준만 볼 게 아니구만. 로 감독, 잘 왔어. 앞으로 연락하고 지내자고.”
“예? 음…… 감사합니다.”
자기와 친분을 다지는 게 좋은 일이라는 걸 로베르토는 금세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런 점마저도 나준하는 마음에 들어서 팀이 지고 있는데도 껄껄 웃었다.
물론, 친선경기에서 전국대회 예선에서 떨어진 팀한테 세 골이나 먹힌 휘경 중학교 축구부원들은 오후 훈련에서 지옥을 맛보게 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