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91화
친선경기가 끝나고, 우리 축구부는 주전 후보 할 것 없이 운동장 중앙에 모였다.
“선배님! 오늘 왜 이렇게 잘하십니까?”
“너는 어떻고.”
“으흐흐.”
“너 아까 패스 뭐냐?”
“쟤네 표정 봤냐?”
부원들이 서로를 칭찬하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친선경기에서 승리했다.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꼭 들어가는 휘경 중학교를 상대로 말이다. 내가 크게 개입하지 않은 후반전에서도 마지막까지 좋은 경기력을 보여준 덕에 축구부원들은 이 결과를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너희들, 똑바로 들어! 오늘 경기처럼 상대가 잘한다고 정신줄 놓으면 전국대회에서도 바로 탈락이야. 세상에 잘하는 선수가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그런 선수들 만날 때마다 오늘처럼 정신줄 놓을 거야?! 프로 가서도 그럴 거야?!”
“아닙니다!”
“상대가 우리보다 잘하면 그거에 맞는 대처법이 있어. 축구 선수라면 현실을 받아들일 줄 알고,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마음을 다잡아야 해. 오늘 경기는 지적할 것도 없어. 너희들이 스스로 무너졌으니까.”
운동장 측면에선 나준하가 진지하게 쓴소리를 하고 있었다. 휘경 중학교 축구부원들은 전부 뒷짐을 진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박종혁이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말했다.
“우리가 이기긴 이겼나 보다.”
“우리 팀 잘한다니까.”
“빈말인 줄 알았지.”
“난 거짓말 안 해.”
“뭐? 이게 어디서 거짓말을.”
박종혁이 느닷없이 헤드락을 걸었다. 예상하지 못해 붙잡혔다.
“아악! 아파 이 자식아!”
우리의 촌극을 보며 옆에 있던 티알, 엄태영, 이민우가 웃었다.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경기에서 이겼기 때문이기도 하고 로베르토가 몹시 흡족한 얼굴로 잠깐 쉬고 있으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로베르토는 지금 노트에 무언가를 휘갈기고 있었다.
아마도 자기가 생각한 우리들의 기량을 재조정하는 걸 거다. 오늘의 결과는 로베르토의 예상과 달랐다.
친선경기 일정을 잡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로베르토는 친선경기에서 무조건 질 걸 알지만, 강팀과의 친선경기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길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예상이 깨졌다. 그것도 로베르토가 가르친 방식이 효과를 내면서.
“자, 다들 집합!”
로베르토가 노트를 접으며 말했고, 축구부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로베르토 앞으로 옹기종기 모였다.
“…….”
로베르토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편한 분위기는 없었다. 오히려 기분 좋은 침묵이었다.
“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다.”
로베르토가 운을 뗐다.
“승리해서 그런 게 아니다. 너희가 내 훈련을 성실하게 따라왔다는 증거가 경기력에서 나타나서 그렇다.”
로베르토가 아무리 한국인 혼혈이라고 해도, 근본은 이탈리아에서 살던 사람이었다.
“나는 체력과 기본기를 강조했다. 왜 그런지 아나?”
자기 어필을 서슴지 않는다. 로베르토는 축구부원들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자기 이론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기본기가 좋아지면 공을 다루는 시간이 단축된다. 팀원 전체의 기본기가 좋아진다면 어떨까? 당연히 단축되는 시간이 더 커진다. 상대가 공격할 때 10초가 걸린다면 우리는 8초가 걸리는 거다. 어떠냐.”
로베르토가 모두를 둘러봤다.
“방금 경기하면서 속도를 못 따라가겠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지?”
“예!”
“체력도 같은 맥락이다. 체력이 떨어지면 선수의 기본기 자체가 떨어진다. 90분, 120분 동안 기본기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체력과 기본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너희에게 훈련 시킨 거다.”
축구부원 중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사람들도 로베르토의 얘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방금 확실하게 훈련의 효과를 봤으니 로베르토를 본격적으로 신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남은 전지훈련 동안 체력훈련은 계속한다. 겨울 방학 때도 일부는 체력훈련에 쓸 계획이다. 그리고 기본기는 학기 중에도 계속한다. 알겠나?”
“예!”
로베르토도 신이 났는지 평소보다 더 텐션이 좋았다.
“그리고 원래 여기서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서 다들 갸웃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로베르토가 씩 웃었다.
“오늘 점심은 내가 산다. 먹고 싶은 거 말해 봐.”
“정말입니까?!”
“치킨이든 삼겹살이든 말만 해.”
“오오.”
반응이 몹시 좋았다. 치킨, 피자, 탕수육 등 바로 생각나는 음식부터 별의별 음식의 이름이 다 나왔다.
그러고 있으니 박종혁이 대표로 손을 들었다.
“저희 정말 많이 먹습니다.”
“괜찮다.”
“감독님 오늘 진짜 멋있습니다!”
한 축구부원이 외쳤고 다 같이 크게 웃었다. 이어서 축구부원들은 먹고 싶은 음식을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럼 소고기 먹자.”
“회는 어때. 여기 남해니까 참치회 팔지 않으려나. 참치회가 그렇게 비싸고 맛있다고 그러던데.”
“대게! 대게 좋다.”
로베르토는 한국에서 조기축구회에 다닐 정도로 잘 적응했다. 그런 만큼, 이들이 말하는 음식의 가격이 얼마나 하는지 머릿속에 바로 그려진 모양이었다.
로베르토의 얼굴에서 어느새 승리의 기쁨이 사라졌고, 눈동자를 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랍스타도 먹어보고 싶었는데.”
“스테이크는 어때?”
“…….”
순수하게 비싼 음식들의 이름을 말하는 축구부원들과 초조해하는 로베르토,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혼자 킬킬거렸다.
* * *
“아쉽지만 이게 최선이다.”
“예에…….”
축구부원들이 기운 빠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래 축구부원들이 최종적으로 정한 메뉴는 소고기였다.
그런데 이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있으니…… 여긴 시골이라는 점이다.
고급 음식점은 당연히 적었고, 약 30여 명의 남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식당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전라도식 떡갈비 집에 와 있었다.
“먹자.”
“감사히 먹겠습니다!”
“와, 진짜 맛있는데?”
이곳저곳에서 감탄이 새어 나왔다. 고기의 결이 많이 살아 있는 떡갈비라서 엄청, 그냥 엄청 맛있었다.
전생에서 이곳으로 전지훈련을 올 때마다 한 번은 챙겨 먹는 음식이었다.
왠지 모르게 안심한 것 같은 로베르토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옆에서 엄태영이 말을 걸었다.
“감독님 대단한 거 같아.”
“그렇긴 해.”
적당히 긍정해 주니 박종혁도 끼어들었다.
“맞아, 우리끼리만 할 땐 몰랐는데 휘경 중을 상대로 이 정도까지 할 수 있게 됐을 줄은 몰랐어.”
이번에는 이민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게 많은 거 같아. 궁금한 거 있을 때마다 모르는 게 없더라. 그냥 한국에 남을까…….”
“빨리 브라질 가서 프로 데뷔나 하고 메일이나 써.”
“쏭…… 왜 자꾸 날 보내려고 하는 거야…….”
“궁금해서 그렇다니까.”
“참나…….”
이민우는 불만 섞인 얼굴로 떡갈비를 한 점 뜯어서 입에 넣고, 행복한 얼굴을 했다.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로베르토는 구석에 앉아서 코치들과 모처럼 술을 마시고 있었고, 축구부원들은 로베르토에 대한 긍정적인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선수들이 로베르토를 믿어준다면 훈련이 더 효율적으로 변할 테니까. 축구는 팀 게임이다. 그렇기에 선수들이 능력 있는 감독을 전적으로 신뢰해 준다면 선수들의 기량 이상의 결과가 나올 확률이 올라간다.
“냠.”
기분이 좋다.
“왜 귀여운 척하냐.”
박종혁의 태클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근데 잠깐만, 로베르토가 왜 술을 마시고 있지. 오후 훈련도 남았는데.
그때 로베르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자, 다들 주목. 먹으면서 들어라.”
그렇게 말했지만 부원들은 음식을 내려놓고 로베르토의 말에 집중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로베르토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한 마디 내뱉었다.
“오늘 오후 훈련은 없다. 휴식이다.”
“……예?”
“정말요?”
“오오오오오!”
부원들이 가게가 떠나가라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로베르토는 다수결을 통해 이곳 해변에서 놀다 가자는 얘기까지 했다.
너무 기분 따라 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된 나는 손을 들고 말했다.
“저…… 정말 오후 훈련 안 해도 되나요?”
분위기가 좀 싸해졌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로베르토도 사람이니까 실수할 수 있잖아.
로베르토는 여유 있게 대답했다.
“훈련 일정을 수정하면 된다. 뭣보다, 지금은 이 기분을 즐기는 게 중요해. 얘들아.”
로베르토의 말투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술기운 때문일까. 로베르토가 부원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너희들 나이에 하는 축구는 재미있어야 해. 그게 바로 내가 어린 선수들을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야. 축구에서 최고의 재미는 승리하는 거니까, 승리를 위해서 지금까지 지독한 훈련을 한 거야. 근데 승리했잖아. 그러면 그 재미를 즐기는 법도 배워야지.”
머리가 띵 해졌다.
부원들이 멍하니 로베르토를 바라보았다.
“난, 너희들이 즐겁게 했으면 좋겠다. 뭣보다 오늘같이 강팀을 잡았을 때의 기쁨을…… 천천히 곱씹으면서 다시 한번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게 노력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뭐, 그런 거다. 그러니까 오늘 휴식은 필요하다. 알겠냐 송현준? 너도 오늘은 훈련하지 말고 쉬어. 감독 명령이다. 그럼 끝! 다시 먹자!”
“……예!”
“예!”
부원들의 대답이 훨씬 더 기운차졌다. 손을 내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던 건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감독 명령대로 오늘은 훈련을 쉬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치열하게 사는 건 즐기기 위한 거니까.
잠깐 잊고 있었던 사실을 일깨워 준 로베르토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로베르토를 봤는데.
“으어어…… 우욱…… 욱.”
로베르토가 토를 하고 있었다. 왠지 감성적인 말을 하더라. 술에 잔뜩 취한 거였구나. 지금 보니까 테이블에 소주병이 7병이나 있었다. 여기 온 지 30분밖에 안 됐는데 세 명에서…… 어이가 없었다.
내 감성적인 기분을 돌려줬으면 좋겠다.
부원들도 잠시 얼이 빠졌다가 깔깔대면서 웃었다. 어처구니없는 회식이었다.
* * *
통화 연결음이 끝나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을 든 나준하는 인사부터 하려고 했다.
-밥 먹는데 왜 전화하고 지랄이야, 끊는다.
“아니, 잠깐만, 끊지 마! 후회한다!”
나준하는 다급하게 외치고 휴대폰 너머에 있는 상대에게 속으로 욕을 했다.
-뭔데?
나준하는 이 망할 녀석을 국민들이 2002년 기적의 월드컵의 주역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 분했다.
축구 좀 잘하고 리더십 있는 게 다인 녀석인데. 나이가 가장 많다고 주장 자리 맡았을 뿐인데.
까칠하고 욕 많이 하고 싸가지 없는 녀석이 왜 인기가 많은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론은 참 대단하다.
강재범, 전 국가대표 주장이자 20년 지기 친구에게 나준하가 말했다.
“그냥 본론만 얘기하자. 너희 팀 데리고 용잠군에 올 수 있냐?”
-뭔 헛소리야. 우리 서해에서 전지훈련 하고 있는데. 거기 남해잖아.
강재범은 은퇴하자마자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나준하와 마찬가지로 중학교 축구부 감독부터 시작했지만, 강재범이 맡은 학교는 광주에 있는 프로팀의 산하 유소년 팀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일종의 새로운 시도였다. 전국대회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프로 준비를 하는 선수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만큼 실력 있는 선수들이 많았다.
“여기 진짜배기 보물이 있다고.”
-아 또 이상한 비유하네. 유망주가 있다고?
“어, 니네 애들 얘랑 경기시키면 많이 배울 거다. 틀림없어.”
-그래도 안 돼. 전지훈련 비용이 푼돈인 줄 알아?
“아.”
-너 또 생각 안 하고 전화했지.
나준하는 뭔가에 집중하면 세세한 건 다 놓치는 성격이었다. 심드렁한 목소리의 강재범에게 나준하는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아니, 근데, 전지훈련 비용을 또 써도 가치가 있다니까?”
-……그 정도라고?
강재범이 본격적으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네가 그 정도로 말하는 거 보니까…… 설마 졌냐?
“……그건 그런데.”
-어느 학굔데?
“대영 중학교.”
-……어디라고?
“안 유명한 데야. 몇 년 전에 한 번 4강 가긴 했는데 운이라는 평가가 많았었고. 근데 거기에 대형 유망주가 들어왔어.”
-고작 유망주 하나 보러 팀이 다 이동하는 건 손핸데.
당연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나준하는 답답했다.
“하루 버스 대절 해서 원정와도 되잖아? 아니면, 너 혼자 구경이라도 와 봐. 절대 후회 안 한다니까.”
-대체 어느 정도길래 그러는 거야. 코치 보내면 안 되냐?
“안 돼. 네가 직접 와. 살다 살다 이런 놈은 처음 봤다. 모든 능력이 프로급인데 심지어 침착하고 성실하기까지 해.”
-…….
생각하는 중인지 강재범은 말이 없었다.
-……언제까지 어디로 가면 되는데.
“모레까지 와. 오전 10시에 친선경기 한 번 더 하기로 했다.”
로베르토는 점심을 여기서 먹지 못하겠다고 죄송하다고 말하며 친선경기를 또 잡고 갔었다.
-일단 가긴 가는데…… 만약에 별로면 넌 죽는다.
“에이, 그럴 일 절대 없어.”
-허세는.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나준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분명 여기서 송현준을 보고, 선수들을 다 데려올 거다. 틀림없다.
나준하는 휴대폰을 조작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화했다.
“어이, 남 감독~.”
이번에는 프로축구팀의 후배였다. 역시 중학교 축구부 감독이고 한창 전지훈련 중인 사람이었다.
“여기 괴물 하나 있는데 구경 와라. 기왕이면 선수들 데려와서 친선경기 해도 좋고.”
-……뭔 소립니까?
말투만 달랐지 똑같은 반응이 돌아왔다. 나준하는 다시 한번 설득을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하루 시간 내보죠.
전화가 끊어지자 나준하는 또 아는 중학교 감독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송현준도 마음에 들었지만, 이건 로베르토를 위한 거였다. 인맥이 부족한 로베르토에게 인맥도 늘려주고 전국대회 강팀들에게 그 위의 레벨을 체험시켜 줄 계획이었다.
겸사겸사 자신의 휘경 중학교 축구부원들의 친선경기 상대도 편하게 불러들이고.
“모레까지 오면 돼.”
또 한 명의 감독을 불러들이는 데 성공한 나준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