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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인드 축구천재-95화 (76/173)

리마인드 축구천재 95화

스포츠에서 재능의 차이는 어느 팀에서나 어느 상황에서나 수시로 느끼게 되는 요소였다.

세계 최고의 팀에 가더라도 그 안에서 재능의 차이가 나타난다. 재능에 대한 질투는 항상 있고,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행복한 선수 생활을 하기 어렵다. 물론, 최고라면 상관없겠지만 최고는 오직 하나뿐이니까.

이 세계는 불합리하다. 하지만 그 세계에서 오래 살아온 경험이 있었기에 나는 정두식 같은 사람이 왜 대단한지 설명할 수 있었다.

“재능 있는 애들은 남들보다 금방 잘하게 되니까…… 더 재미있거든요.”

“지금 기만하냐?”

정두식이 뚱한 얼굴로 불평해서 실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재미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더 열심히 하게 된다는 말이었어요. 열심히 하기 쉬운 거죠. 근데 재능이 부족한 사람이 재능이 있는 사람이랑 똑같이 훈련한다는 건…… 재능 있는 사람보다 마음이 더 강한 거죠. 아니, 에너지를 더 쓴다고 해야 하나.”

“……뭔 소리야.”

정두식이 어렵고 복잡한 말을 싫어한다는 게 떠올랐다.

“그냥 선배 정신력이 재능 있는 선수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말이죠.”

전생의 모든 정두식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정두식이 툴툴대거나 부끄러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두식의 답변은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럼 윤태상이는 왜 그렇게 치열하게 훈련했던 거려나.”

“태상 선배요?”

“난 걔한테 정신력도 못 이기겠던데.”

“……그래요?”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나 열심히 하는 거 걔 때문이야.”

“태상 선배가 어떻게 했는데요?”

내가 본 윤태상은 성실한 건 맞지만 치열하다는 얘기까지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게 말이다…….”

정두식이 갑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두식은 초등학교 축구부 생활 내내 적당히 훈련하면서 별생각 없이 살았다고 했다. 그렇게 중학교 축구부로 진학한 정두식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기보다 재능이 뛰어나면서 악독하게 훈련하는 윤태상을 만났다고 한다.

정두식이 처음 본 윤태상은 대단했다고 했다. 뭔가에 지독하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의 순수했던 정두식의 마음속 무언가를 건드렸다. 그래서 정두식은 윤태상처럼 되고 싶어서 훈련량을 늘리고 윤태상을 쫓아가 보고자 했다.

“윤태상은 치사한 새끼야.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재능도 나보다 위야. 비겁하지 않냐? 어떻게 쫓아가라고 그래.”

일 년 동안 정두식은 윤태상과 똑같은 스케줄을 소화해 보고, 깨달았다고 한다. 자기가 모든 부분에서 윤태상보다 안 되는구나. 그리고 열심히 한 만큼 다른 축구부원이나 선배들과의 격차를 체감했다고 했다.

“습관만 남았어. 안 되는 건 진작 알고 있었는데…….”

“……근데 올해 태상 선배는…….”

“그 정도로 안 했다고? 주장 일 하는 만큼 훈련량이 줄던데? 지상철이 쪼는 것도 줄어들었고.”

“쪼았다고요?”

“너한테 이런 얘기까지 해도 되나.”

“뭔데요? 비밀로 할게요.”

정두식이 내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도 아니니까 괜찮겠지. 1학년 때부터 지상철이 특혜 계속 받고 싶으면 우리 중에 무조건 1등이어야 한다고 다 보는 앞에서 말했었어.”

“아…….”

특혜라는 말을 듣는 순간 상황을 이해했다.

이제 사정을 알 것 같았다. 왜 모든 전생에서 윤태상이 2학년들 사이에서 평판이 안 좋았는지.

윤태상의 재능이 유달리 남들과 깊게 어울리지 않아서 그렇다고 제멋대로 생각했었는데,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에휴, 별 얘길 다 하네. 나도 늙었나 보다. 잘 알지도 못하는 놈한테 이런 얘기를…….”

“……선배님? 아직 중학교 2학년…….”

“한 살 차이가 얼마나 큰데!”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게 선배가 말하는데?”

“죄송하니까 다음에도 훈련 도와드릴게요.”

정두식도 나처럼 웃었다.

“그래라. 도움이 될진 모르지만, 해준다는 걸 거절하진 않을 거다.”

그리고 나는 정두식도 아직 축구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아무리 훈련하는 습관이 남았다고 해도 의욕이라는 연료가 없다면 지속되기 어렵다. 꾸준히 연습하는 건 그만큼 열정이 있다는 뜻이다.

훈련을 끝마치는 대로 로베르토를 찾아가자고 결심하고, 정두식에게 말했다.

“쉬는 시간은 끝입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훈련 시켜 드릴게요.”

“뭐? 1학년 주제에.”

그렇게 말하면서 주섬주섬 훈련하기 위해 일어나는 정두식이었다.

정두식은 말과 행동이 많이 다른 선배였다.

* * *

“……여기까지예요.”

정두식과 나눈 얘기에 전생의 정보를 더해서 로베르토에게 설명했다. 지금은 윤태상의 집안 사정을 모르는 거로 되어 있었기에 그 점을 섞어서 말했다.

특혜라는 단어만 말해도 로베르토는 알아들을 수 있다. 감독이 되자마자 모든 축구부원의 신상정보를 세세한 부분까지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절은 개인정보의 중요성이 정말 떨어졌기에 민감한 부분까지 서류로 정리돼 있었다.

로베르토는 내가 얘기하는 내내 침묵을 지켰고, 얘기가 끝난 지금까지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얼마 뒤 생각을 정리했는지 로베르토가 입을 열었다.

“고맙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자리에서 일어나자 로베르토가 의문 가득한 얼굴을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웬일로 네가 다 해결 안하고?”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았지만, 장난을 담아서 되물었다.

“감독이 할 일이잖아요? 부원한테 그런 거 떠넘기면 안 되죠.”

“……아니, 애초에 떠넘기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로베르토는 억울해했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다.

“네가 맨날 먼저 해결해 버리고 결과만 말해줘 놓고 나한테 그러면…….”

그동안 찝찝했던 건지 로베르토는 줄줄 얘기했다. 더 놀리면 안 될 거 같아서 말을 끊었다.

“농담이었는데.”

로베르토의 눈썹이 꿈틀댔다.

“망할 놈. 난 그동안 네가 날 못 믿나 생각도 했었다. 이 자식 날 허수아비로 두고 써먹으려고 감독해 달라고 부탁한 건가? 생각도 들었고…….”

“저, 저기 절대 그런 거 아닌데…….”

쌓인 게 많았었나 보다. 정말 화난 것 같았다. 효율을 생각해서 직접 나섰던 게 로베르토에게는 여러 생각이 들게 했나 보다.

티알을 데려오기도 했고 전지 훈련장을 구해오기도 했고…… 생각해 보니까 많이 하긴 했다. 내가 로베르토였다면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거 같다.

“네가 날 못 믿나 싶기도 하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근데 저 조금 억울한데…….”

로베르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나도 장난이다.”

“아니. 저기요.”

“이거 꽤 재미있는데?”

이어서 킬킬거리는 로베르토를 보니 어이가 없어졌다. 말문이 막혀서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로베르토가 말했다. 왠지 모르게 개운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아무튼, 네가 날 안 믿는 줄 알았는데 지금 일로 믿어주는 걸 알았으니까…… 열심히 해야겠다.”

“아니, 저기, 그동안은 정말 우연이 잘 맞아서.”

안 믿는다는 말은 나에게는 데미지가 조금 셌다. 정미영 선생님과 똑같이 은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변명이 절로 나왔다.

“알아, 알아. 더 말 안 해도 돼.”

“정말이죠?”

“그래.”

그제야 난 다음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근데…… 태상 선배를 북돋아 줄 방법이 있어요?”

“보통 이럴 땐 비슷한 길을 걸은 선배의 말이 가장 잘 먹히잖아?”

전생에서 들었던 로베르토의 과거를 떠올려 봤다.

“저도 궁금한데 나중에 얘기해 주시면 안 돼요?”

“얼마든지. 근데 실패하면 어떡하냐?”

“……자신 있게 말해놓고 바로 태세전환이에요?”

“감독 되고 너무 잘 풀려서 슬슬 꼬일 때가 됐으니까. 내가 이래 봬도 프로에서 한 번 실패한 사람이야.”

어이가 없었지만, 실패의 아픔을 수없이 겪었던 나로서는 이렇게 시원한 얼굴로 말할 수 있는 로베르토가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해야 할 게 있었다.

“실패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성공해요.”

“알지, 아는데…….”

열 번의 전생이 지나갔고 이번은 진짜였다. 로베르토에게는 몰라도 적어도 내겐 마지막이었다. 기왕이면 실패보단 성공한 모습을 많이 보고 싶었다. 실패는 전생에서 한 것들로 충분하다.

“인생은 한 번뿐이잖아요?”

진지하게 말하는 나를 보며 로베르토가 혀를 찼다.

“애늙은이 같은 놈.”

* * *

정두식은 코치 숙소 앞에서 윤태상과 마주쳤다.

“쉬던 거 아니었어?”

“……감독님이 불러서.”

느릿하게 대답한 윤태상에게 정두식이 한 번 더 물었다.

“너도?”

“너도?”

정두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들어오라는 건가……? 뭐지? 일단 노크부터 하자. 감독님?”

“둘 다 들어와.”

숙소 안에서 로베르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서로를 한 번 보고 코치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숙소 안에는 학교에서 가져온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로베르토는 그 앞에 앉아 있었고, 로베르토 옆에는 접이식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앉아.”

윤태상이 머뭇거리자 정두식이 로베르토 옆에 앉았다. 이어서 윤태상도 앉았다.

로베르토는 이탈리아어로 된 문서 작업이 한창이었다. 문서에는 축구부원들의 이름이 간혹 적혀 있어서 윤태상과 정두식은 그게 축구부원들에 관한 파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잠깐만, 아직 정리가 안 끝나서. 이거 마시면서 기다려.”

“예.”

“예…….”

둘은 오렌지주스를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로베르토의 문서 작업을 구경했다. 로베르토는 키보드를 두들기면서 둘에게 물었다.

“둘 다 요즘 무슨 일 있어?”

둘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질문이 애매한가? 둘 다 요즘 왜 이렇게 어중간한지 이유 좀 들어보려고 불렀어.”

윤태상이 창백해졌고, 정두식도 표정이 굳었다.

로베르토의 말이 계속됐다.

“내가 지금 적고 있는 게 뭔지 알아?”

둘의 시선이 이탈리아어가 잔뜩 적힌 모니터로 향했다.

“김진호 코치가 내가 부임하기 전의 너희에 관해서 정리한 보고서를 줬어. 그 보고서를 내가 보기 편하게 이탈리아어로 고치고, 최근의 너희에 관해 내 생각을 추가해서 만든 게 이거야.”

둘은 눈치를 보면서 얘기를 다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진호 코치가 만든 보고서는 훌륭했어. 내가 생각하는 선수들의 특징과도 대부분 일치했으니까. 근데.”

로베르토가 정두식을 봤다.

“2학년에서 가장 믿을 수 있고 기복 없는 경기력을 보여준다는 정두식이랑…….”

이번에는 윤태상을 봤다.

“주장이면서 노태신의 뒤를 이어서 에이스 역할을 맡았었다는 윤태상이…… 내가 부임한 후에는 왜 그런 모습을 안 보여주는 거지?”

로베르토가 마치 둘을 노려보는 것처럼 눈을 부릅뜨며 차갑게 물었다.

“…….”

“…….”

둘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태도에 로베르토는 화를 냈다.

“고개 숙이지 말고 대답해. 일방적으로 나만 얘기할 생각 없어. 왜 그런 건지 너희 입으로 듣고 싶은데.”

“…….”

“…….”

로베르토도 예상했지만, 둘은 한참 동안이나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유교 문화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에 로베르토는 인상을 찌푸렸다. 한국은 정말 좋아하는 나라였지만, 상급자와 하급자의 위계가 지나쳐서 지금처럼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이 올 때 적응이 되질 않았다.

로베르토가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내가 얘기할 테니까 들어.”

둘이 다시 고개를 들어 로베르토를 쳐다봤다.

로베르토는 미리 찾아놓은 프리젠테이션 파일을 실행했다. 파일의 제목은 이탈리아어로 ‘자신의 실패에 관하여’. 교양 수업에서 만들어놓은 파일인데 여기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로베르토가 정두식과 윤태상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머리를 싸매다가 어제 발견한 파일이었다.

로베르토는 이게 잘 먹히길 간절히 바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인생 얘기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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