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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인드 축구천재-96화 (77/173)

리마인드 축구천재 96화

프리젠테이션의 첫 번째 장에는 ‘로베르토 그릴로의 인생’이라는 제목만 이탈리아어로 적혀 있었다. 심지어 필기체로.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낸 윤태상과 정두식은 당연히도 이게 뭐지라는 표정으로 멍하니 화면을 보고 있었다.

로베르토는 몇 번 헛기침을 해서 둘의 시선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조금 부끄럽긴 한데, 이건 내가 대학교 시절에 만든 ‘내 인생’에 관한 파일이다. 너희는 내가 이탈리아 프로리그 출신 선수였다는 것만 알고 있지?”

“예…….”

“그렇죠.”

“‘실패’라는 이름의 수업이었지. 첫날에 자기소개서를 내라고 했는데 교수님이 내 이력을 보더니 이 파일 하나 만들어서 발표 한 번 하면 무조건 A+준다고 해서 만들다가…… 생각보다 열심히 만든 파일이다.”진지하게 들으려던 둘이 갸우뚱하자 로베르토는 자기가 딴 길로 빠졌다는 걸 깨닫고 헛기침을 해서 다시 분위기를 잡았다.

“아무튼 난 여기에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았고 축구를 왜 그만뒀는지에 대해 적었다.”

둘의 눈동자가 다시 맑아졌다.

“나는 감독으로서 너희들을 슬럼프라고 판단하고 있다. 둘 다, 슬럼프가 뭔지 아나?”

놀란 기색의 둘이 하나씩 말했다. 먼저 정두식이 말했다.

“훈련해도 발전이 없는 겁니다…….”

“그냥, 다 잘 안 되는 거…… 입니다.”

로베르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둘 다 맞다. 체육학에서 슬럼프는 정말 중요한 현상이고,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서는 과목 하나를 통째로 슬럼프에 대해 분석할 정도였다.”

둘의 얼굴에 흥미가 생겼다.

“슬럼프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평범하고 못 하는 선수부터 세계적인 선수까지. 예외는 없다. 그만큼 이겨낸 사람도 많고, 잘 극복하지 못해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은퇴한 선수도 많지.”

정두식은 덤덤하고, 윤태상은 사색이 되었다.

로베르토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슬럼프 과목에서 당연하게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여러 사례를 통해서 공부했다. 결국 스스로 극복해야 하지만…… 나 같은 주변인들도 도움을 줄 수 있지.”

둘 다 지금까지 중에 제일 크게 관심을 보였다.

“마음이 불안해진 게 큰 원인 중 하나이기 때문에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의 사례를 본다면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게 그 선수의 지도자라면 더더욱.”

로베르토는 마우스를 일부러 세게 클릭했다. 프리젠테이션 파일이 띄워져 있던 것도 잊고 있던 둘은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딸깍, 두 번째 장이 화면에 나타났다. 막 태어난 로베르토의 사진이었다.

“아, 너무 옛날부터 시작하는데…… 그래도 그냥 들어라.”

어쩔 수 없었다. 이 둘을 위해서 따로 뭘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으니까, 로베르토는 그래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조용히 있던 정두식이 입을 열었다.

“……감독님은, 뭘 해도 설명을 다 해주시네요.”

“내 의도가 뭔지 알아야 너희들이 더 잘 받아들일 테니까, 내 교육 철학이야.”

정두식과 윤태상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둘 다 로베르토의 이런 점이 싫지 않았다.

“자, 그럼 얘길 시작하자. 편하게 말하마.”

* * *

피렌체라는 도시를 알아? 난 거기에서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유학 온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어.

피렌체는 정말 아름다운 관광 도시야.

한국에 있는…… 수학여행 많이 가는 도시, 경주시, 그런 느낌의 도시야. 도시에 온갖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흔하게 널려 있지.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될 정도니까.

근데, 그 아름다운 도시에서의 내 어린 시절은 좋지 않았어. 더러웠지.

나는 혼혈이야. 너희들이 당연히 외국인이라고 생각하는 내 외모는…… 이탈리아에서도 동양인처럼 보였나 봐.

유럽에서 혼혈로 태어났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너희들은 잘 알려나? 티알을 잘 대해 주는 모습을 보고 너희들이 참 괜찮은 애들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는데…… 왜인 줄 알아?

보여줄게.

[초등학생도 안 돼 보이는 로베르토가 주먹에 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 있는 사진]

뭘 그렇게 놀라?

그리고 중요한 거 있어. 나 이거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거 아니다? 나도 세 명을 거의 죽여 놨다?

큭큭, 학교에 들어가기 전엔 툭하면 동네 아이들이랑 싸우곤 했거든. 너무 억울했어. 항상 화나 있었어. 아무 이유도 없이 날 싫어하는 애들 천지였는데 당연히 그랬어야 한다고 생각해.

축구 얘기는 언제 나오냐는 표정이네? 아니라고? 괜찮아. 농담이야.

지금 할게. 축구는 그 당시 내 인생의 일부였거든.

피렌체에는 피오렌티나라는 이탈리아 1부 리그 팀이 있어. 한국에서는 세리에 A라고 부르는 리그지.

아무튼, 피오렌티나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응원하는 팀이고, 세계에서 가장 낭만이 넘치는 팀이야.

아버지는 피오렌티나의 팬이었고, 난 아버지가 안고 다닐 수 있을 때부터 아기용 유니폼을 입을 채로 경기장에 매주 갔었어.

시즌권이라고 시즌 전체 표를 한 번에 판매하는 게 있는데, 시즌권을 구매한 사람들은 항상 비슷한 자리에 앉아.

그렇다 보니까 나와 아버지 주변에는 항상 아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어.

그 사람들은, 피오렌티나의 팬들은 내가 혼혈이든 아니든 신경 쓰지 않았어.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터 ‘비올라!’, ‘잔카를로!’ 같은 말을 하니까 다들 반응이…… 아, 비올라는 피오렌티나의 별명이고, 잔카를로는 피오렌티나에서 위대했던 선수의 이름이야.

아무튼, 그곳에서는 피오렌티나를 응원하는 사람이면 전부 하나였어.

그게 너무 좋아서 피오렌티나 유소년팀에 들어가서 피오렌티나 선수가 되겠다는 목표가 생겼어.

다른 또래보다 열심히 했고, 유소년팀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어.

피오렌티나는 우리 도시에서 최고의 팀이라고 했잖아? 그 유소년팀에 들어가니까 아빠, 엄마가 좋아하는 건 물론이고 차별 같은 것도 많이 사라졌어. 물론 같은 팀에 있는 애들이 시비를 걸 때도 있었지만…… 그 당시 나는 축구를 잘하는 그룹에 있었거든. 금세 인정받게 됐지.

유소년팀에서 뛰면서 학교도 다니고…… 재밌게 지냈어. 학교에서는 같은 팀에 있는 친구들이랑 놀고 축구 하고…… 그렇게 한 살, 두 살 먹으면서 한 단계씩 유소년팀을 올라갔어.

14살인가 15살인가. 지금 생각해 보면 너희 나이쯤부터 신체 능력으로는 벅차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아. 그때부터 몸으로 하는 훈련보다 이론 쪽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거든. 남들이 모르는 걸 할 수 있으면 경기에서 유리해질 것 같아서. 실제로도 잘 먹혔고.

솔직히 이론 공부가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이쯤부터 코치에도 관심이 생기긴 했어. 하던 게 있으니까 억지로 마음을 접어뒀지만.

근데, 18살이 되는 해에 큰일이 생겼어.

옆 라커룸 쓰던 친구가 떠났어. 한국 나이로는 19살이구나? 아무튼. 걔가 어디로 떠났는지 알아?

바로 내 꿈이었던 피오렌티나 성인팀으로 승격된 거야.

난 유소년팀에 남아 있는데 친구는 세계 최고의 프로리그에서 뛰는 거야.

볼 보이 자리에서 그걸 보는데…… 미치겠더라. 그 친구는 바로 주전이 되었고, 지금도 뛰고 있어. 부러운 자식이야.

아무튼, 거의 한 달인가 훈련이 손에 안 잡히더라.

이게 내 첫 번째 슬럼프였어.

그래서 더 아득바득 훈련을 했는데…… 1년 동안 달라지는 게 없었어.

아니다, 달라진 게 있지.

재계약 제안을 못 받아서 팀에서 나오게 됐어.

너희들 표정이 왜 그래.

그때 생각하면 씁쓸하긴 하지만, 이젠 괜찮아.

아무튼, 그땐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머리에 든 것도 없는 놈들이, 멍청하게 경기를 하는 놈들이 나보다 잘한다는 사실이 믿어지겠어?

그래서 닥치는 대로 팀이랑 테스트를 찾아다녔어. 운 좋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4부 리그 팀에 들어갔고, 한 시즌을 주전으로 뛰었어.

그땐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어. 꿈꾸던 피오렌티나 주전 선수가 곧 될 수 있을 거 같았지.

심지어 시즌이 끝나니까 세리에 A의 한 팀에게서 영입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은 거야.

당연히 가겠다고 했지. 완전 헐값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미친 짓이었어.

그때는 내가 어린데 값도 싸니까 부담 없이 영입하기 좋은 놈이라는 걸 몰랐어. 축구 팀 입장에서는 그런 식으로 열 명 영입하고 한 명만 터져도 이득이거든.

나머지 아홉 명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내가 경험해 봤으니까 알려줄게.

아까부터 표정이 왜 그래. 괜찮다니까.

아무튼, 나는 세리에A에서 교체로 한 경기 출전하긴 했어. 그리고 그 이후에 전부 2군 리그에서만 뛰게 됐지.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인정하기 싫었어.

그 마음가짐 때문이었을까. 또 슬럼프를 겪었어. 의욕이 뚝뚝 떨어지더라.

그래도 팀 훈련은 성실히 했어. 그러다 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난 잘 할 수 있을 거 같은 거야.

그래서 임대라도 보내달라고 주장했어. 생각보다 쉽게 풀리더라? 덕분에 2부 리그로 갔어.

근데 거기서도 벤치인 거야!

아오, 생각하니까 열받네.

처음에는 열심히 했는데 몇 개월 지나니까 또 슬럼프가 왔어.

열심히 해야 한다는 건 아는데 하기도 싫고, 막상 하면 성의가 없고. 가끔 나가는 친선경기에서는 엉망이고.

너희랑 비슷하지? 슬럼프 걸린 사람들은 다 비슷해.

계속 얘기할게. 거의 끝났거든.

그러고 있으니 어린놈이 열정이 없다면서 고참한테 갈굼 당하고, 동기들한테 무시당하고…… 너희들 외국에는 위계질서나 나이 얘기 없고 자유롭다고 알고 있지? 그거 다 거짓말이야.

한국만큼이 아닐 뿐이지 사람은 다 비슷해. 있을 건 다 있어. 위계질서가 강하면 장점이 될 때도 있는데…… 이건 쓸데없는 말이니까 넘어가고.

아무튼, 처음부터 후보에도 못 들어갔는데 잘도 나중에 주전이 되겠다. 또 어영부영 1년이 끝났고 원래 팀으로 돌아갔어.

계약이 아직 1년 남아 있었으니까.

3년 동안 삽질하고 4년째가 되니까…… 내가 변한 게 느껴졌어. 피오렌티나의 선수가 되겠다는 목표가 어느새 희미해져 있었어. 그렇게 되는 날 떠올릴 수가 없었어.

뭣보다…… 내가 실력이 부족해서, 재능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걸 깨달았어. 내가 원하는 것보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었던 거야.

심지어 더 비참한 건…… 나보다 재능이 뛰어난 놈들이 나보다 더 간절하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였어. 축구 인생을 되돌아보면 항상 그랬어. 연습도 안 하는데 잘하는 선수는 만나본 적이 없었거든.

내가 만난 천재들은 다 독종이었어. 성격은 좀 그런 놈들이 많았지만.

아무튼, 마음이 꺾인 채로도 팀 훈련은 꼬박꼬박 참여했어.

당연히 재계약 제안은 못 받았고, 덤덤하게 라커룸에서 내 옷이랑 축구화를 챙겨서 나왔지.

근데, 라커룸 입구에서 고참을 만났는데 그 고참이 그러더라.

-꼬맹아, 잘하는 거 해.

당연히 금방 까먹었어.

왜냐면 백수 생활이 엄청 편했거든.

게임도 잔뜩 하고, 책도 잔뜩 읽고. 축구랑은 거리를 뒀어. 축구 하는 것만 봐도 마음이 복잡해졌거든.

고참이 했던 잘하는 거 하라는 말이 가끔 생각나긴 했어.

그렇게 6개월째에 게임 CD 찾다가 우연히 유소년팀 시절에 열심히 축구 공부했던 걸 발견했어. 생각보다 덤덤하더라. 아니, 오히려 반갑더라. 같이 축구 했던 애들도 생각나고.

유소년팀에서 축구 할 땐 정말 즐거웠거든.

오랜만에 연락 돌려보니까 다들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더라. 아까 말한 잘나가는 친구 놈이랑 몇 명 빼고는 다 다른 일 하고 있던데?

근데 잘나가는 친구 놈이 경기 끝나고 술 한잔하자는 거야?

요즘 경기장에 안 간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모처럼 경기장에 가기로 했어.

아버지한테 경기장에 간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나한테 표를 줬어. 아버지는 내 시즌권을 꼬박꼬박 사고 있었던 거야.

찡해지더라.

그렇게 경기장에 가게 됐는데…… 눈물이 나는 거야.

난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이 계속 드는 거야.

볼 보이를 하고 있는 어린 선수들을 보는데, 정말 열심히 하는데 그 위에 어린 내가 겹쳐 보이는 거야.

계속 눈물이 쏟아지는 거야. 아버지는 내 어깨만 토닥이고.

전반전이 끝나기도 전에 난 경기장을 뛰쳐나가 집으로 갔어.

그리고 예전에 정리했던 자료들을 꺼내서 하나씩 읽기 시작했어. 약속 펑크낸 친구한테는 욕을 먹었지만, 나중에 꼭 맛있는 거 사겠다고 해서 용서받았어.

아무튼, 자료들을 반쯤 읽었을 때, 코치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재능 있는 편이 아니어서 어떻게든 효율적으로 훈련하고, 경기하려고 공부했던 과정이 즐거웠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거든.

심지어 자격증만 딴다면 난 선수 생활 경험이 있는 코치가 되는 거야.

내가 코치가 되기 위해 살아왔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전부인 줄 알았던 게 과정이었던 거야.

그래서 프로 생활하면서 벌어둔 돈으로 대학교에 입학해서 이론 공부를 시작했어.

끝이야.

* * *

“끝이요?”

“벌써요?”

칙칙했던 윤태상과 정두식의 눈동자가 그 나이대 학생들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로베르토는 내심 만족하며 그들에게 물었다.

“소감은?”

정두식이 불평했다.

“아니, 코치가 되겠다는 건 알겠는데 유소년 코치를 하는 이유는 못 들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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