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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인드 축구천재-97화 (78/173)

리마인드 축구천재 97화

“이 수업은 대학교 1학년 때 들었던 거니까. 유소년 코치로 진로를 정한 건 졸업할 즈음이거든.”

“끝까지 알려주세요.”

윤태상이 로베르토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로베르토는 픽 웃고 말을 계속했다.

“졸업하기 전부터 이곳저곳에 무작정 연락을 돌려보던 때였어. 원래는 날 원하는 팀이 없을 거 같아서……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면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제안이 세 개나 와버린 거야. 첫 번째는 일반인들을 가르치는 취미반 코치, 두 번째는 유소년 팀 코치, 세 번째는 성인 팀 코치였지.”

“인기 많으셨네요.”

정두식의 퉁명스러운 느낌의 칭찬에 로베르토는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

“운이 좋았던 거지.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건, 무작정 일을 시작한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코치가 되고 싶은지 생각해 볼 기회를 자연스럽게 얻은 거야. 세 가지를 고민하면서 자연스럽게 말이야. 정두식, 윤태상. 세 직업의 차이를 알겠냐? 한국식으로 바꿔보면…… 축구 교실에서 조기축구에서 뛸 선수, 축구부에서 전국대회에서 뛸 선수, 구단에서 프로 리그에서 뛸 선수를 가르치는 일이 어떻게 다를까?”

정두식과 윤태상이 생각에 잠겼다. 정두식이 먼저 말했다.

“뒤로 갈수록 부담이 심할 거 같아요. 조기축구는 재미로, 축구부는 프로 축구 선수를 목표로, 프로 축구 선수는 돈 받고 경기를 뛰는 거니까요…….”

“핵심을 찔렀는데? 맞아. 그런 차이가 있어. 그리고 그건 코치를 준비하면서 꾸준하게 고민해 온 내용이었어. 이 셋 중 어떤 선수들을 도와주는 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일까? 선수로 실패해 봤으니 또 실패하긴 싫었거든. 그러니까 선택하는 순간까지 결정 못 하고 고민만 계속했던 거고.”

로베르토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윤태상과 정두식은 로베르토의 눈치를 봤다, 로베르토는 신경 쓰지 않았다.

“공부하면서 학생들한테도 물어보고, 코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축구 관계자들과 이야기도 나눠봤는데…… 다 대답이 다르더라. 생각은 참 많이 했지만, 요약하면 그거였어. 결국 자기가 가장 뜻깊게 생각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거. 생각보다 선택은 쉬웠어.”

로베르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면서 낮아졌고, 윤태상과 정두식은 최고로 집중하고 있었다.

“어린 선수들이 나 같이 헤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더라. 그래서 유소년 코치 일을 시작하게 됐어.”

윤태상과 정두식은 작게 감동했지만, 부끄러워서 티를 내진 않았다. 로베르토는 둘의 속내도 모르고 신나게 자기 얘길 하고 있었다.

“솔직히 축구 지식을 전하는 건 자신 있었어. 선수 시절에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고, 실제로 적용해 보겠다고 이것저것 해본 데다가, 대학교에서는 이쪽 분야 전문가들에게 부족한 부분을 많이 배웠거든. 가장 큰 문제는 그거였어. 유소년 선수들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가.”

로베르토가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고개를 저었다.

“친근하게 대하면 우습게 보지, 강압적으로 대하면 덤비지, 실수 지적하면 삐지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로베르토의 푸념이 이어졌다.

“선수 출신이라 믿었는데 실망이라고 감독은 뭐라고 하지…… 미치는 줄 알았는데…… 이 악물고 버텼다. 그 와중에 착한 애들은 있었거든.”

“송현준처럼요?”

정두식의 말에 로베르토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로베르토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걔는…… 착하다기보단 뭐라고 해야 하지. 내 머리 위에 있다고 해야 하나. 고마운 점이 많고 좋아하는 선수고 대단한 선수가 될 것 같긴 하지만…… 가끔 어른을 상대할 때 같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착한 선수는 우리 축구부에선 박종혁 같은 애들이지. 분위기 만들어주고, 뺀질대는 거 같아도 훈련에서는 열심히 하고.”

윤태상과 정두식이 고개를 숙였다. 로베르토가 당황했다.

“아니, 너희들이 나쁘다는 건 아니고. 너희가 정상이지. 아, 이것도 첫 직장에서 깨달은 거다. 처음에는 유소년 선수는 다 비슷하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었는데, 착한 애들 골치 아픈 애들 귀찮은 애들 얌전한 애들 등등 만나보니까 자연스럽게 다양하다는 걸 알았어.”

로베르토는 급히 화제를 돌렸다. 윤태상과 정두식은 다시금 몰입하기 시작했다.

“맞아. 다양해. 유소년 선수들은 다양하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 뭣보다 유소년 선수들은 프로 선수들처럼 축구 경기만 생각해야 하는 애들이 아니야. 다른 꿈을 꿔도 되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아이들이야.”

정두식과 윤태상이 보고 있는 로베르토의 눈은 맑았다. 목소리는 곧았다. 이 모습이 또렷한 신념을 가진 사람의 분위기라는 걸 모르는 둘은 로베르토에게 본능적으로 감명받았다.

로베르토의 말이 빨라졌다.

“다양한 선수들을 상대로 여러 방식의 코칭법을 사용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도 그즈음 깨달았어. 그래서 나는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철학을 정리했어. 유소년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뭘까? 축구 선수가 될 선수들에게 최고의 코칭을 하는 건 당연한 거야. 난 거기에 미래에 축구 선수가 되지 못할 다수에게도 도움이 될 코칭을 하고 싶었어. 내가 헤맸으니까. 그래서 두 가지 목표를 다 이루기 위해서 세 가지 방침을 정했는데…….”

로베르토가 뜸을 들였다.

정두식과 윤태상이 재촉했다.

“뭘 정했는데요?”

“그다음이 뭔데요.”

로베르토가 멈칫하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너희들 앞에서 이것까지 말할 줄은 몰랐는데…… 부끄럽지만, 진정으로 최선을 다하는 태도 갖추게 하기, 기본기 갖추게 하기, 체력 갖추게 하기 이렇게 세 가지야.”

“이번에 한 것들이네요?”

“그래. 이 세 가지가 갖춰져야 자기가 가진 재능을 끝까지 발휘해 볼 수 있거든. 그리고, 재능을 끝까지 발휘해 봐야 시원하게 포기할 수 있어.”

로베르토의 시선이 정두식에게 잠깐 향했다가 떨어졌다. 정두식은 로베르토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왜냐면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떨어뜨렸기 때문이었다.

로베르토는 정두식의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축구부의 상당수가 그렇다는 것도 진작 파악했다.

실패가 예정된 결과는 몹시 슬픈 일이지만, 로베르토는 그런 선수들이 다시 기운차게 일어나서 새 목표를 찾길 바랐고, 자기가 그런 선수…… 아니, 아이들을 많이 배출할 수 있는 유소년 감독이 되길 원했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 가지가 뭔지 깨닫고, 일을 그만뒀어. 그리고 공부를 다시 시작했지. 뭘 목표로 공부해야 할지 알았거든. 그리고 사람도 많이 만났어. 축구를 그만두고 새로운 시작을 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만났고, 축구로 성공한 친구도 만났어. 그러면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지.”

윤태상과 정두식은 이제 로베르토를 존경하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근데, 그러다 보니까…… 돈이 다 떨어지는 바람에 어머니의 나라인 한국으로 일하러 왔어.”

“…….”

“…….”

어이없다는 둘의 반응에 민망해진 로베르토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사람 만나러 다니고 공부한 게 도움이 됐는지, 내가 예전에 뛰었던 피오렌티나에서 유소년 코치를 해 보겠냐는 제안도 왔었다? 근데 그거 거절하고 여기 온 거야.”

친정팀이자 세리에A의 터줏대감인 피오렌티나의 제안을 받았다는 사실에 로베르토는 인생에서 두 번째로 큰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파트타임이었지만, 로베르토는 자신 있었다. 물론 첫 번째 기회는 피오렌티나의 유소년 선수 시험에 합격한 일이다.

그래서 이사장의 제안을 거절하고 이탈리아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송현준의 설득이 그 상황을 뒤집어 버렸다. 같이하고 싶다는 송현준의 설득도 설득이긴 했지만, 로베르토는 송현준의 재능 때문에 넘어갔다.

로베르토는 자기가 이끄는 유소년팀 전체가 좋은 결과를 내는 게 목표였다. 프로 선수가 되지 못할 선수들이 후회 없이 뛰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만큼 로베르토는 훌륭한 재능을 가진 선수가 꿈을 펼치게 도와주고 싶었다.

로베르토는 윤태상을 바라보았다. 윤태상도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훈련을 함께하고 경기를 몇 번 뛰는 걸 보면 금방 느낌이 온다. 윤태상은 외부적인 문제만 아니라면 분명 프로 선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송현준은 그런 차원과는 달랐다. 이탈리아에서 본 모든 선수보다 대단한 것 같았다. 로베르토가 가장 좋아하는 피오렌티나 선수였던 바티투스타나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서 가장 좋아하는 델피에로보다 더 대단한 선수가 될 것 같았다. 아직 추측인 건 결과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로베르토가 한국에 남은 결정적인 이유는 송현준을 통해 자신의 안목을 실험해 보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로베르토는 정두식과 윤태상이 자기가 할 말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봤다. 둘의 눈동자는 또렷했다.

둘에게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로베르토에게 있어서 둘은 똑같은 부원일 뿐이었다.

“왜 포기하셨어요? 어릴 때부터 응원하고 뛰던 팀이라면서요.”

시작은 송현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목표도 이룰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러게, 왜 포기했을까.”

질문에 애매하게 답하자 정두식과 윤태상이 갸웃했다. 딱 그 나이대 학생 같아서 로베르토는 웃음이 나오는 걸 참아야 했다. 로베르토는 웃음기를 담아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건 나중에 너희가 어른이 되면 말해줄게.”

“……어른이요?”

“한 직장에서 6개월 이상 지냈을 때? 그 정도면 되겠네. 프로 축구 선수가 된다면 반 시즌 하고 찾아오고.”

“되게 구체적이네요.”

“그렇지. 기왕이면 어른 되고도 찾아갈 수 있는 감독이 되고 싶거든.”

“감독님 오늘 되게 감성적이시네요.”

“진지하다고 해줄래.”

“예.”

옆에서 윤태상이 키득거리다가 둘이 쳐다보자 정색했다. 로베르토는 이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내가 지금 해주고 싶은 말은 내 훈련을 따라오라는 것뿐이야. 기본기와 체력을 다지고,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재촉해서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몸에 익히게 해줄게. 그렇게 전력으로 전국대회에서 부딪치면 자기 안에서 해답이 나올 거야.”

윤태상과 정두식은 몇 번이고 로베르토의 말에 집중했다. 진심으로 자기 얘길 들어주는 거 같아서 로베르토는 찡한 감정을 느꼈다.

“만약에 실패하면 그다음 방법을 찾으면 되는 거야. 유소년 축구 선수와 프로 축구 선수의 차이점 중 가장 큰 건 ‘실패해도 괜찮다.’라는 점이야. 절대 끝나는 게 아니야.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면 다른 분야를 노려도 늦지 않고, 축구에서 계속 도전하려면 포지션을 바꿔도 되지.”

로베르토는 이 순간 어린 시절 자길 가르쳤던 감독과 자신이 겹쳐지는 걸 느꼈다. 덩달아 열심히 해왔다는 게 느껴져서 묘한 충족감이 들었다.

“실패해도 성실하게 해야 해. 정두식, 내가 널 고평가하는 건 언제나 성실하다는 거야.”

“……감사합니다.”

“일부 게으른 천재는 포함 안하고 말할게. 보통 천재들이 더 열심히 한다는 건 너희들도 잘 알지?”

“예.”

“예.”

“천재들은 유소년 때 더 열심히 해. 왜냐고? 재밌잖아. 배울 건 산더민데 연습 조금만 해도 스물두 명 중에 가장 잘하고 칭찬받는데 안 재밌고 배기겠어? 이민우나 송현준, 송현준은 가끔 헷갈리지만 아무튼, 걔네는 축구가 재밌을 거야.”

로베르토는 윤태상을 봤다.

“윤태상, 너도 그전에는 에이스였다고 알고 있는데…… 너도 알지? 배우는 게 재밌다는 거.”

“아뇨…….”

“팍팍하게 살긴 했구나……. 그럼 너는 앞으로 숙제다. 축구, 재미있게 해.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재능을 즐겨. 자기가 가진 걸 최대한 활용할 수 있으면 보통 행복해지더라.”

윤태상이 눈을 크게 떴다. 로베르토는 이어서 정두식을 봤다.

“널 이해해. 성실하게 했지만, 넘지 못할 벽이 보이는 거지? 근데, 너 그럴 때마다 마음이 꺾일 거야? 그런 일은 틀림없이 또 있을 거야. 난 코치 일하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거든. 경력이 얼마 되지 않는데도 말이야.”

“…….”

정두식이 진지하게 자기를 되새겨보는 거 같았다.

“한번 꺾였다고 끝이 아니야. 실패해도 괜찮다고 내가 말했지? 난 기다려 줄 수 있어.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지만, 더 중요한 건 꺾여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해. 안 꺾이는 놈들이 이상한 거지.”

이번에는 정두식이 놀란 얼굴을 했다.

“자, 면담은 끝이다. 뭘 느꼈을진 모르겠는데 난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 다 했다. 이거 오히려 내가 속이 후련한데?”

로베르토는 그렇게 말하며 혼자 키득키득 웃었다. 정두식과 윤태상이 서롤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나가 봐. 내일 훈련 준비해야 하니까.”

“아, 네. 감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둘은 벌떡 일어나서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힘차게 인사했다. 그리고 나가는 걸음걸이는 생각할 게 많은지 뻣뻣했다. 하지만, 힘없이 들어오던 아까와는 달랐다.

로베르토는 문을 열고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잘 자고, 내일부터 잘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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