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98화
다른 중학교들과의 친선경기는 어제로 끝났다.
-로 감독! 오후에 한 판 더 해! 아니, 이 자식들아! 지고 끝낼 거야?!
마지막 경기를 지자마자 떼를 쓰기 시작한 나준하 감독님을 휘경 중학교의 코치진이 끌고 가는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휘경 중학교에게는 이민우 같은 압도적인 재능을 상대해 본 경험을, 우리는 전국대회 최상위 팀들과 경기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RPG 게임으로 치면 경험치 버닝 이벤트 같은 거였지.
덕분에 우리 대영 중학교 축구부원들은 최소 한 계단 이상씩 성장했고, 몇 주 만에 치른 내부 친선경기조차 치열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
“송현준 좀 살살해!”
오늘은 중앙 수비수 자리에서 정두식과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방금은 박종혁이 노태신에게 찌른 패스를 끊자 둘이 불평하는 거였다.
난 지금 미래에 게임에서 볼 플레잉 디펜더라고 불리는 패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중앙 수비수로서 경기를 하고 있었다.
이제 위험요소는 없다고 판단했기에 패스를 줄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는데 뒤에서 서늘한 느낌이 들어 공을 왼쪽으로 드리블했다.
“아!”
익숙한 목소리의 탄식이 내가 있었던 자리에 갑자기 나타났다.
윤태상이었다.
제쳐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바싹 달라붙는다. 윤태상 쪽의 패스 길이 막혀 버렸다.
“태상이 열심히 하네! 체력 괜찮냐!”
노태신은 윤태상을 걱정하면서도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윤태상 때문에 자극이 된 거다.
충분히 패스 길이 있었지만, 내 패스를 받을 우리 팀원들이 윤태상과 노태신에게 둘러싸이는 걸 보자마자 걸음을 늦췄다. 그래서 패스 길이 사라졌기 때문에 나는 골키퍼에게 백 패스할 수밖에 없었다.
“에구, 헥, 헥. 태상아. 이렇게 뛰는 거 맞냐.”
“어…… 저는 그냥 뛴 건데.”
“……아니, 생각 없이 뛴 거라고?”
“지기 싫어서요.”
노태신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윤태상을 빤히 쳐다봤다. 윤태상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태신은 한숨을 쉬고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기의 어이없음에 동참해 달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방금 좀 위험하긴 했어요.”
지금은 전방 압박이 축구계에 트렌드가 되지 않은 시기였다.
각 포지션의 선수들이 자기 역할에 집중하는 것, 그게 지금 축구계의 흐름이었다. 공격수는 수비를 적게 하고, 수비수는 공격을 적게 하는 것이다. 체력을 보존해서 자기 역할을 더 잘하기 위해서.
노태신은 방금 윤태상의 수비 시도가 팀적으로 불필요한 움직임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송현준이, 나랑 볼 날 얼마 안 남았다고 주장 편드냐.”
“아니 아니, 진짜 위험하게 느껴졌는데요. 목이 서늘했다니까요?”
“됐다…… 늙으면 죽어야지.”
노태신이 투덜대면서 자기 자리로 이동했다. 윤태상을 보니 윤태상도 날 보고 있었다. 우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이 시절에도 수비수나 수비형 미드필더를 마크하는 게 중요한 전술일 때가 있었다.
이탈리아의 피를로 같은 후방 플레이메이커를 책임지고 있는 선수에 대한 압박이라면 유효한 전술이다. 실제로 최상위 리그에서도 상대 팀의 후방 에이스를 견제하기 위해 간혹 나오던 전술이다.
뻥!
“똥 볼이네.”
“골킥 똑바로 안 해!?”
후보 골키퍼가 골킥을 하자마자 갈굼이 쏟아졌다. 이상한 시작이지만 아무튼 경기는 재개됐다.
골킥이 엉망으로 넘어갔기에 상대 팀에게 공이 넘어갔고, 또 한 번 빼앗았다.
다른 선수가 공을 빼앗겼음에도 윤태상이 지치지 않는다는 듯 달려들었다. 윤태상은 지금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아보려고 하는 것 같았는데, 그런 점이 정말 만족스러웠다.
이 경기에서도 유효하고, 미래를 생각해도 좋은 변화였다.
전생의 윤태상들은 국가대표에 간혹 들곤 했다. 윤태상의 마지막 키는 180㎝. 축구화 신고니까 실제는 170㎝ 중후반대였다. 그리고 윤태상은 고등학교부터는 공격수로 뛰었다.
애매한 키의 공격수가 선발되는 이유는 신체적인 조건을 이겨낼 만한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국가대표 윤태상은 축구부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오래 뛴 덕인지 준수한 패스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공격수 중에서 유난히 활동량이 많고 전술적 움직임도 현대 축구에 적합했었다.
최전방은 아니지만, 최전방 바로 밑에서 상대 수비수들을 적극적으로 압박하고, 공격진 중 아무 곳에나 넣어도 제 몫을 하는 게 윤태상의 장점이었다.
국가대표 윤태상의 모습이 지금의 윤태상에게 겹쳐 보였다.
아직 발전할 부분이 많았지만, 올해가 지나고 내가 떠나더라도 잘할 거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몇 개월 뒤에 있을 전국대회에서도 좋은 기량을 펼칠 거 같다는 기대감도 들었다.
“……아.”
윤태상의 입에서 또 한 번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 있었기에 윤태상의 폼은 좋지 않았고, 익숙하지 않은 수비를 시도하는 것이기에 한 템포씩 느렸다.
그래서 나는 변하기 시작한 윤태상에게 숙제를 내기 시작했다.
윤태상의 절망스러운 얼굴이 보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 나는 더 압도적인 기량으로 윤태상을 찍어 누르고, 뭘 목표로 할지 보여줘야 했다.
윤태상이 또 슬럼프에 빠질까 걱정되지만, 내 두 번째 은사인 로베르토를 믿었다.
“왼쪽!”
최후방에서는 화려한 개인기보단 최소한의 시간만 써서 최대한 빠르게 공을 앞으로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
“오른쪽!”
수비수가 공을 빼앗는 상황은 대부분 상대가 공격을 위해서 진영을 바꾸고 앞으로 쏠린 상태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상대가 뒤로 물러나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앞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다.
“다시 오른쪽! 티알!”
배운 대로 자기의 이름이 불리자마자 상대 수비 라인과 겹쳐 있다가 뛰쳐나가는 티알의 앞에 정확하게 패스를 배달했다.
“막아!”
“아 진짜! 송현준!”
상대 팀에 있는 수비수들이 거칠게 말하면서 티알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티알은 한 달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능숙하게 골키퍼를 제쳐내고 툭 밀어서 골을 넣었다.
삐익!
김진호 코치의 휘슬 소리가 득점을 알렸다.
자기 진영으로 달려갔던 윤태상이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윤태상을 바라봤다. 윤태상도 나를 봤다.
윤태상이 그동안 날 보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던 것의 정체를 확실하게 깨달았다.
막막한 벽을 마주했을 때의 절망이었다.
윤태상은 씁쓸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괜찮다는 확신이 들었다.
윤태상은 내 눈을 피하지 않았고, 다음 휘슬이 울리자마자 또 도전했기 때문이었다.
* * *
“그랬구나…….”
내부 친선경기가 끝나고, 오후 훈련을 마친 뒤 어김없이 찾아온 자율훈련시간이었다.
나는 로베르토와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로베르토가 윤태상과 정두식에게 해줬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잘 말한 건지 모르겠다…….”
“후련해 보이는데요?”
“내 인생 얘기하니까 재미있더라. 너도 들어볼래?”
“좋죠. 근데, 그러기 전에…… 말은 잘한 거 같아요. 오전에 태상 선배 때문에 고생 꽤나 했거든요.”
“고생?”
로베르토는 ‘네가?’라는 글자가 써진 것 같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로베르토가 입을 열었다.
“여태까지 본 것 중에 제일 잘하던데?”
“태상 선배가 쫓아오니까 더 열심히 했어요.”
“……참 나.”
로베르토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다. 아시아 최초로 발롱도르 받는 거 아니야?”
“그건 당연히 먹고 가야죠.”
로베르토는 반 농담으로 했던 말이겠지만, 내 목표를 위해서라면 반드시 받아야 하는 상이었다. 이번 생에서 무조건 한 번은 받을 생각으로 열심히 할 것이다. 운이나 상황 때문에 못 받더라도 발롱도르 수상자에 버금가는 성과를 낼 것이다.
“너무 진지해서 가볍게 될 거 같다.”
“절대로 가볍지는 않죠.”
메시, 호날두, 카카, 리베리 등 머릿속에서 발롱도르 3위 안에 들었던 굉장한 선수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가볍지는 않겠지만, 그만큼 재미있을 거 같아서 설렜다. 경쟁자가 강한 만큼 큰 보람을 느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발롱도르 수상만큼은 모든 전생에서 단 한 번도 쉬웠던 적이 없었기에 더 기대된다.
“그래도 재밌을 거 같아요.”
“재미라니…… 진짜 미친놈. 그러면 말이다.”
이어지는 로베르토의 말은 기습적이면서도 신선했다.
“……나중에 발롱도르 받으면 시상식에서 내 이름 들어간 인터뷰해 줘.”
“예?”
“내 꿈이거든.”
잠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순간 전생의 기억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전생을 다 합치면 발롱도르를 탄 건 스무 번이 넘는다.
시상식에 올라가기 전에는 도움을 준 모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겠다는 다짐을 항상 하지만, 나는 막상 거기 올라가면 머리가 하얘져서 부분 부분만 말하는 타입이었다.
세 번째였나, 로베르토한테 고맙다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왜 그때 로베르토가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앞으로 잘하라고 격려 전화를 했었다. 다음 날 무척 부끄러워했다.
그 반응이 재밌어서 이후에도 생각날 때마다 로베르토의 반응을 보려고 가끔 언급했는데 매번 신선한 반응을 보여줬었다.
이제야 로베르토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갔다.
진작 좀 얘기하지, 그럼 손바닥에라도 적어놓고 얘기해 줬을 텐데.
“……뭐, 알겠어요.”
10번이나 살았고 11번째를 살고 있지만, 새로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는 점이 신선했다. 그래서 매 인생이 다르게 흘러갔던 것 같다.
기분이 좋아져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평소보다 들뜬 상태로 말했다.
“그런데요. 로베 형. 큰일 났어요.”
“큰일? 뭐가?”
“며칠 전부터 무릎이 엄청 시려요. 훈련량을 더 줄여야 할 거 같은데…….”
로베르토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눈은 내 무릎을 향했다.
“진작 얘기하지. 많이 심각하냐?”
“꽤요. 그래도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라고 생각하려고요. 전지훈련 동안 저 키 6㎝ 컸어요.”
“뭐?!”
로베르토가 깜짝 놀랐다.
“키가 큰 건 알았는데 그 정도라고?”
“아마요? 혼자서 대충 잰 거라서 정확하진 않은데 얼추 비슷해요.”
“믿어지지 않는데. 어, 그러고 보니 눈높이가 달라졌네.”
“매일 보면 모르죠.”
그리고 앞으로 한 달 동안 더 큰다. 내 성장곡선은 몹시 이상해서 중학교 1학년 2학기가 끝날 무렵에는 185㎝를 찍는다. 1학기 때 160㎝ 후반에서 2학기 때 185㎝. 한 달에 15㎝가 커서 종아리 경련이 일어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심한 훈련을 하면 치명적인 시기다.
지상철이 감독을 맡은 전생에서는 이 시기를 무식한 훈련을 하면서 보내서 원래도 강한 편이 아니었던 무릎을 망쳐서 축구 인생을 전부 망친 거고, 로베르토를 만난 이후부터는 그 문제를 로베르토가 상당 부분 해결해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훈련량을 더 줄여야겠네. 다른 부원들한테는 뭐라고 설명해야 하려나.”
“이제는 키 때문이라고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막 들어왔을 때 그런 소리 하면 낙하산 소리를 들었겠지만, 이제는 뭐.”
입지를 꽤 다졌다. 이제는 솔직해져도 될 시기 같았다.
“알겠어. 그래도 경기는 나갈 거지?”
“네, 전부 뛸 생각은 없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다 나갈게요.”
“좋아, 그러면 그렇게 계획을 짜야겠다. 윤태상을 굴려야겠네.”
“태상 선배는 원래 잘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앞으로도 잘할 거예요.”
폼은 바로 돌아오지 않겠지만, 시간문제였다. 마음가짐이 변화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되고 멍하니 훈련하고 있는 우리 축구부원들을 봤다.
“이 짜식아! 그것밖에 못 하냐?”
박종혁이 드리블 돌파를 시도하다가 정두식에게 빼앗겼다. 정두식이 평소보다 훨씬 신난 듯한 목소리로 박종혁을 놀리고 있었다.
박종혁은 발끈한 거 같은 얼굴이었지만, 애써 웃으며 한 번 더 하자고 빌고 있었다.
옆에서 박범철과 윤태상이 그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정두식도 많이 밝아진 것 같았고, 윤태상도 예전보다 얼굴이 편해 보였다.
둘의 위치는 크게 변한 게 없었다. 오전에 친선경기를 하고, 오후에 훈련하고, 저녁에 자율 훈련을 하는 평소와 똑같은 일과를 보냈다.
하지만 그 일과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바뀐 게 느껴졌다.
전생에서 로베르토가 이 정도로 선수를 변화시킨 건 몇 년이 지나서였다. 전생과 달라졌지만, 로베르토와 빠른 성장과 선수들의 변화가 몹시 기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