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03화
머뭇거리던 티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맨 뒤에 앉은 나와 박종혁 그리고 엄태영을 발견하자마자 표정이 밝아지는 게 보였다.
티알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어색하지만, 허리를 꾸벅 숙였다 펴면서 말했다.
“라, 라에 리베라 류입니다! 이름에 R이 세 개 들어가서 티알이라고 부릅니다. 필리핀에서 왔습니다. 한국말 잘 못하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제 숙소에서 외우는 걸 봤는데 아주 잘했다. 말이 좀 빠르긴 했지만, 알아듣는 데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반 친구들은 티알이 한국어를 상당히 잘해서 놀라고 있었다. 발음이나 빠르기가 어수룩하긴 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정미영 선생님이 손뼉을 짝 치면서 감탄했다.
“너무 잘하네. 자, 저기 맨 뒤, 현준이 옆에 앉으면 돼. 현호야. 책걸상은…….”
“태영이 뒤에다 놨어요. 잠시만요.”
“내가 할게.”
반장 김현호가 맨 앞에서 여기까지 오려고 해서 내가 하겠다고 손을 흔들고 티알의 책상을 가져와 내 옆에 놨다.
티알이 교단에서 내려와 반 친구들을 지나 내 쪽으로 왔다. 반 인원이 홀수라서 박종혁과 엄태영 옆에 혼자 앉아 있었는데 드디어 짝이 생겼다.
티알이 옆을 지나갈 때마다 반 친구들이 빤히 쳐다봤고, 티알은 부끄러운지 앞만 바라보면서 내 옆자리에 도착해서 털썩 주저앉았다. 긴장이 많이 됐던 모양이다.
“자, 티알이랑은 쉬는 시간에 인사하고, 이제는 방학 숙제 내야지?”
정미영 선생님이 한순간에 관심을 가져갔다.
“아아, 쌤~.”
“점심 먹고 걷으면 안 돼요?”
반 친구들의 아우성에 정미영 선생님이 방금 말한 김성환에게 눈을 흘겼다.
“성환이 너 딱 걸렸어. 숙제 안 했지?”
김성환이 헉 소리를 냈다.
“성환이뿐만 아니라 숙제 안 해온 사람들은 다 할 때까지 집에 못 갈 줄 알아. 알겠어? 선생님은 오늘 학교에서 자려고 다 준비해 왔어.”
“안 돼…….”
“아아…….”
친구들이 좌절하는 모습은 재미있었다.
나는 당당하게 가방에서 방학 숙제를 꺼냈다. 방학 숙제는 성인의 관점으로 보면 생각보다 양이 많지 않다. 틈틈이 꾸준히 하면 쉽다. 문제는 미루다가 쌓이는 거다.
“올? 너네도 다 했냐?”
엄태영과 박종혁도 방학 숙제를 꺼냈다. 둘 다 걱정 따윈 없는 얼굴이다.
박종혁이 갸웃하면서 되물었다.
“당연하잖아? 우리 숙제 쉽잖아.”
엄태영이 갸웃하며 내 숙제 노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현준아, 설마 너…….”
그제야 전생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머리를 감싸 쥐었다.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거라 까먹었다.
“망할…… 맞다. 축구부는 방학 숙제 다르지…….”
“멍청이네. 전지훈련으로 체험학습 보고서 써오라고 했지.”
방학 시작하고 축구부에 들어온 것도 문제였을 거다. 모처럼 밀려오는 패배감에 기분이 나빠졌다. 심지어 통지문에도 적혀 있었는데 습관처럼 해버리는 바람에 까먹었다.
“태영아, 송현준 저거 표정 봐라.”
“현준아 괜찮아. 겨울 방학 때 하면 되지.”
엄태영이 위로하는 것처럼 얘기했지만, 입은 키득대고 있었다.
“이 나쁜 놈들. 숙소에서 방학 숙제를 얼마나 했는데. 봤으면 얘기 좀 해주지.”
“네가 일기 쓰는 줄 알았지.”
“나도, 설마 바보처럼 그러는 줄은 몰랐어.”
이미 숙제를 해버린 이상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교단으로 나가서 선생님에게 숙제를 제출했다.
정미영 선생님이 내 숙제를 받아서 펼쳐보고, 놀란 표정을 했다.
“현준아? 이걸 다 했어?”
“예…… 숙제가 하고 싶더라고요…….”
내 표정을 보고 상황을 눈치채셨는지 정미영 선생님이 풉 하고 웃었다. 그냥 노트를 제출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돌아오니 티알이 축 늘어져 있었다. 티알에게 괜히 말을 걸었다.
전학 첫날부터 뻗어있냐.”
티알이 투정했다.
“현준~ 나 지금 죽을 거 같다~.”
“긴장한 거로 안 죽어.”
전학 첫날이라 부담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건 괜찮다. 그냥 아까 한 훈련 때문…… 아윽, 쥐, 쥐 난다. 풀어줘라. 현준. 준.”
“아.”
갑자기 바닥에 눕히는 건 불편해서 의자에 앉은 채로 종아리에 배긴 알을 풀어 줬다.
숙제를 내고 돌아온 박종혁이 우릴 보더니 티알을 놀렸다.
“으이고, 그러게 살은 왜 쪄가지고~.”
종아리를 쥐고 고통스러워하던 티알이 박종혁을 올려다봤다.
“아니, 어머니가 고향에서 음식을 잔뜩 싸 왔는데 어떻게 거절하냐.”
박종혁이 당황했다. 아까의 복수를 위해서 티알의 편을 들었다.
“와 박종혁 나빴다.”
엄태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종혁이 네가 잘못했네. 반성해야겠네.”
“아니, 그런 사정이…… 쏘리.”
박종혁이 양손을 모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장난이다. 봐주겠다.”
“뭐?”
티알이 킬킬대며 웃었다. 박종혁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이어서 복수심이 얼굴에 차올랐다.
그 순간, 티알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악, 또 쥐 났어! 현준, 현준.”
박종혁이 기회라는 듯 내 양팔을 붙잡았다. 솔직히 힘이 세진 않았지만, 티알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종혁이한테 잡혔어.”
“태영, 태영!”
“응? 잠깐만?”
어느새 자기 자리에서 잘 준비하던 엄태영이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박종혁이 또 막았다.
“미안 티알…… 귀찮아서 못 가겠어.”
“악! 잘못했다 종혁! 안 하겠다! 빨리 알 풀어줘라.”
박종혁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티알에게 향했다. 엄태영은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까불긴.”
다들 친해진 거 같아서 보기 좋았다. 2학기도 즐거울 것 같다.
* * *
“필리핀이면 영어 쓰나? 너 영어 잘해?”
“어…….”
“축구부라면서? 점심시간에 축구 같이 할려?”
“……으.”
쉬는 시간이 되자 티알 주변으로 반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티알은 쏟아지는 질문에 곤란해하면서 날 계속 쳐다봤지만, 주먹을 불끈 쥐어서 보여주기만 했다. 힘내라는 의미다.
스스로 잘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부터 오전수업만 하고 빠지는 날까지 없어지는 거네…… 송현준 이제 꿀 못 빠네.”
박종혁이 책상에 엎드린 채로 팔을 쭉 펴면서 투덜댔다. 티알 주위가 시끄러워지자 몽롱하게 눈을 뜬 채로 깨어 있던 엄태영이 말했다.
“……우리 부모님은 수업 다 듣고 훈련 줄이는 거 엄청나게 좋아하더라. 감독님이 외국물 먹어서 그런지 머리가 깨어 있대.”
“하, 너희도 그래? 우리 엄마 아빠도 처음엔 걱정하다가 축부모 카페 보시더니 태도 싹 바꿨어. 그냥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다 하래.”
축부모 카페라. 어머니도 하고 있을 거다. 전생마다 내가 축구부에 들어가면 꼭 가입했으니까.
부모님들의 하소연과 정보교환이 동시에 이뤄지는 카페로 양질의 정보도 수시로 떠돌아서 아버지 아이디로 몇 번 구경한 적이 있었다. 전생과 뭐가 달라졌나 확인하는 용으로.
덕분에 휴가 중에 우리 팀이 화제가 됐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 두 사람의 부모님은 그걸 보고 로베르토를 지지하는 걸 거다. 로베르토의 훈련 방침을 따르면 좋은 성적을 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기는 것이다.
심지어 축구를 그만두게 돼도 공부를 장려한다고 하니 또 하나의 버팀목이 생긴 느낌일 테고.
여러 전생에서 이런 흐름을 많이 봐서 그러려니 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반 친구들은 하나둘 자기 자리로 향했다.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았기에 여전히 떠들면서.
잠시 후, 정미영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인사는 아까 했으니까 생략. 새 학기 첫 수업은 나야. 시간표 붙였으니까 이따 확인하고…… 바로 수업 들어가 볼까?”
“아 선생님 첫날부터 수업하는 게 어딨어요.”
박종혁이 항의했다. 정미영 선생님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프로젝터를 켜고, 바탕화면에 있는 폴더에 들어가 사진을 열었다.
“오.”
수업이 아닌 걸 직감한 반 친구들은 프로젝터에서 송출되고 있는 사진, 그러니까 축구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축구 경기장 앞에는 선글라스를 머리에 쓴 선생님이 팔짱을 낀 채로 포즈를 잡고 있었다.
“뭐예요?”
“놀다 오신 거예요?”
정미영 선생님은 입이 근질근질한지 말을 쏟아냈다.
“너희들이 이럴 줄 알고 준비했지. 딱 10분 동안만 딴짓하고 수업하자. 어때?”
“좋아요!”
“그럼 이제 무슨 얘기를 할 거냐면…… 얘들아, 선생님은 방학 동안 영국 여행을 다녀왔어. 뭘 했냐면…… 축구를 보고 왔지! 시간상 친선경기밖에 못 보고 왔는데 되게 재밌었어.”
정미영 선생님은 방학을 지내고 온 학생들이 수업 듣기 싫어할 걸 생각했는지, 자기가 다녀온 여행을 자랑하기 위한 사진집까지 만들어 온 것이었다.
전생에선 이 시기에 여행을 다녀오신 적이 없었다. 이번 인생에서 내가 축구 하는 모습을 지켜보겠다고 했었는데,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신 걸까.
“경기장에 들어가니까 글쎄, 경기장 안에서 맥주를 팔아서 마셔봤는데 그 맛이 참! 최고더라. 너희도 성인 되면 꼭 해봐. 그리고 옆에 앉은 영국사람들이 먹을 것도 잔뜩 나눠주고. 봐봐.”
노력…… 맞는 건가? 여행 다녀온 걸 자랑하시려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해서 웃음이 나왔다. 즐거워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경기가 끝나고 그분들이랑 같이 펍에 갔는데 응원가를 몇 개 배웠거든.”
선생님은 칠판에 응원가 가사를 몇 개 적었다. 그리고 이건 무슨 뜻이라면서 반 친구들에게 자연스럽게 영어 수업까지 하기 시작했다.
반 친구들은 해외 축구 얘기가 신기해서 그런지 선생님의 수작도 못 알아채고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뭐, 나중에는 선생님도 여행 얘기하느라 신나서 영어 수업과 섞는 수작을 못 했다. 덕분에 45분 동안 여행 이야기가 이어졌고, 나중에 시계를 확인한 선생님이 억울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 반 친구들은 전부 재밌어했다.
* * *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또 한 번 울렸다.
“현준…… 이번에도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티알의 불쌍한 모습에 옆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병자호란.”
“이게 뭐냐면…….”
지금은 세 번째 쉬는 시간이었다. 티알이 모르는 걸 알려주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흘렀다. 티알의 질문에 대답해주면서 알려주다 보니 옆자리에서 박종혁이 교과서에 필기 중인 걸 발견했다.
“웬일로 열심히 듣냐?”
“엄마, 아빠가 이렇게 된 거 수업 제대로 들어보라고 했거든. 너 보면…… 그 말이 맞는 거도 같아서 중간고사까지 마음먹고 해보려고. 어차피 이제 수업도 다 들어야 하잖아. 훈련도 엄청 빡센 건 아니고.”
“그렇지. 웬일로 기특한 소리를 하냐.”
“자꾸 웬일이라고 하지 마라. 네가 1등 하는데 나라고 못 하겠냐? 솔직히 머리는 내가 더 좋잖아~.”
“허어, 이거 봐라.”
무수한 생을 통해 박종혁보다 내 머리가 좋다는 게 증명됐지만 그렇게 생각하게 두기로 했다.
그렇게 세 번째 쉬는 시간이 끝나고 4교시가 시작됐다.
기세등등했던 박종혁은 수업이 시작하고 10분이 지나자마자 졸기 시작했다. 엄태영은 1학기와 다를 바 없이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티알은 두 눈을 부릅뜨고 선생님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여전히 하나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평화로운 모습을 보다 보니 내 마지막 학창 시절이 시작됐다는 게 실감 났다.
계획대로라면 내년에 난 학교에 없을 예정이다. 전국대회의 결과가 좋든 나쁘든 무조건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학기는 학생과 축구부원이라는 두 가지 역할에 충실하면서 최선을 다해 즐겁게 보낼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