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04화
4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됐다.
교실에서 점심을 먹은 후에 우리는 매점으로 이동했다.
축구부 세 명과 반 친구 세 명. 덩치 큰 여섯 명이 함께 움직이니 시선이 모였다. 정확히는 누가 봐도 외국인인 티알 쪽으로 시선이 집중됐다.
당연히 그러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매점의 크기가 크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줄이 만들어져 있었다. 맨 뒤에 줄을 섰다.
“티알, 여기가 매점이야. 쉬는 시간이랑 점심시간에만 여니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빨리 와야 해.”
“오오…….”
티알은 풍겨오는 불량식품들의 냄새 때문인지 입을 헤 벌리고 매점 쪽을 바라보았다.
“너 아까는 살 빼야 한다면서.”
오후 훈련하려면 잘 챙겨 먹으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밥을 반이나 남겼었다.
“……아까는 배가 안 고팠다.”
문득 이 녀석이 전생에서 편식했다는 게 떠올랐다.
“감독님한테 이른다.”
“아니, 현준. 그러면 안 된다.”
“운동선수가 되려면 편식하면 안 돼.”
“……송현준은 엄마 같다.”
얘길 듣던 엄태영이 뒤에서 낄낄거렸다.
“그러고 보니 태영아 안 자냐?”
“종혁이가 자기 발목훈련 해야 한다고 뭐 좀 사다 달라고 해서.”
“나한테 얘기하지.”
“괜찮아, 괜찮아. 종혁이가 2,000원 더 줬어.”
“오? 걔가 웬일이래.”
“쉬는 시간에 다녀오는 거 깜빡했대.”
그렇구만.
다시 앞쪽으로 고갤 돌리니 티알이 말을 걸었다.
“박종혁은 매일 그거 하는 건가?”
“응, 종혁이는 발목이 약해서 매일 점심마다 저거 해. 전지 훈련할 때도 봤잖아?”
“대단하다.”
“너도 점심마다 리프팅 하면 되지.”
“……으음.”
“대답 안 하냐.”
티알에게는 채찍이 필요하다.
“사람은 쉴 시간이 필요하다.”
“웃기시네. 너 앞으로 나랑 30분씩 할 줄 알아.”
“아니, 현준…… 살려줘라…….”
“싫다~.”
박종혁은 알아서 잘하니 이제 티알 차례다. 친선경기에서 질 때도 있었다. 나는 최대한 높은 확률을 원한다.
그때였다.
내 어깨를 날카로운 게 쿡쿡 찔렀다.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의 여자애가 보였다.
“여!”
“어…… 안녕.”
“어색하게 왜 그래.”
왜냐면 많이 친한 사이는 아니니까. 내 앞에는 김채아의 친구들인 정은영, 김혜진, 이지혜가 있었다.
내 어깨를 찌른 장본인인 정은영이 말했다.
“너 채아랑 만나서 밥 먹었다면서, 오올.”
대답도 하기 전에 김혜진이 말했다.
“너 때문에 채아가 우리랑 했던 약속 깨고 도망간 거 알아?”
“그랬어? 아하하, 뭐라도 마실래? 나 용돈 받았는데.”
“정말?”
어색하게 웃으면서 화제를 돌려보려고 시도하니 이지혜가 반응했다.
“사주냐?”
김혜진의 물음에 지갑을 흔들었다.
“용돈 받았다고 했잖아. 김채아 친구니까 사줄게.”
“오올.”
“오오오올.”
“대박, 채아한테 말해야지.”
정은영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걸 왜 걔한테 얘기하는데. 나 좀 그만 놀려.”
“좀? 오늘 처음 놀렸거든?”
여자애들의 눈빛에 장난기가 잔뜩 어려 있었다. 더 반항했다가는 계속 먹잇감이 될 거 같았다.
“됐다, 됐어.”
“설마 삐졌냐?”
“헐.”
“그럴 리가.”
혼이 빠져나가는 거 같았다. 몇 번을 더 그러길래 손을 내저었고, 줄이 줄어들어서 우리가 살 차례가 되었다. 우리는 각자 먹고 싶은 걸 고르고 나는 추가로 김채아의 친구들에게 바칠 음료수를 샀다.
“자, 받아.”
“오오, 고른 거 봐. 센스 좋은데?”
“나 커피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바람둥이네 바람둥이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가라 좀…….”
“얘 우리 보내려고 한다.”
김채아의 친구들이 까르르 웃었다.
“내 친구들이 다 조용하잖아.”
“어? 그렇네? 안녕안녕.”
이지혜의 밝은 인사에 숙맥인 친구들이 당황했다.
“어…….”
“어, 어.”
친구들은 전부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박종혁을 빼면 여자애들이랑 놀 일도 없고 놀 생각도 안 하는 녀석들이었다. 그저 게임하고 공 차고 만화책 보는 게 재미있는 놈들이다. 물론 여자애들한테 관심이 없는 건 아니고, 앞에 서면 굳을 뿐이었다. 아, 지상준은 예외다.
이지혜가 까르르 웃었다.
“어어가 인사야? 넌 근데 누구야? 처음 보는데.”
이어서 내 뒤로 숨으려고 하는 티알을 보며 물었다.
“…….”
전생의 모든 기억을 동원해 보면 이 중에 가장 숙맥인 건 티알이다.
“티……알……이……다…….”
티알은 용을 쓰면서 대답했다. 그 모습이 애처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티알? 으음…… 하하, 다음에 인사하자~.”
“…….”
“그만해야겠다. 괜히 미안하네. 그럼 송현준 우리 갈게~ 내가 채아한테 너 칭찬도 해줄게.”
“아니, 안 해도 된다니까.”
“안녕 안녕~.”
“또 봐~.”
이지혜가 손을 흔들었고 김혜진도 따라 말하면서 등을 돌리고 떠났다.
그리고 정은영이 물러나기 전에 내게 물었다.
“송현준, 제법이야.”
“뭐가?”
“네 덕에 채아가 엄청나게 밝아진 거 같단 말이지? 나중에 떡볶이 한 번 사줄게.”
“정문 앞에 거기?”
“응. 채아까지 해서 같이 보자.”
“좋아.”
그렇게 정은영도 떠났다. 폭풍이 휩쓸고 간 것 같았다.
“이따 피시방 갈까?”
“현준이 넌 못 가지?”
“당연하지.”
“까비, 스타 발라줘야 하는데.”
언제 부끄러워했냐는 듯 말짱해진 친구들을 보니 재미있었다. 그렇게 교실로 돌아가니 박종혁이 한쪽 발 앞꿈치만으로 중심을 잡고 서 있었다. 정말 많이 늘었다.
“엄! 엄! 내 초코롤!”
“받아.”
“땡큐~.”
박종혁은 엄태영이 살짝 멀게 던진 초코롤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받아냈다. 이어서 그 자세로 초코롤을 뜯어서 먹기 시작했다.
제자의 성장을 흐뭇하게 보고 있는데 티알의 작은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현준…… 인기 많다.”
그 순간 머릿속에 번득이는 게 있었다. 전생에서 티알의 동기부여를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했지만, 그중 가장 효과적인 걸 사용할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티알, 귀 좀 대볼래?”
“응? 응.”
다른 친구들한테는 안 들리게 작게 속삭였다.
“축구 잘해지면 인기 금방 많아져. 여자애들이랑 얘기하기 편해진다니까?”
“축구? 정말인가?”
“당연하지.”
티알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금세 움직였다.
“이거 빌려도 되나?”
내가 가끔 가지고 노는 야구공 크기의 스펀지 볼을 내 서랍 속에서 꺼냈다.
“왜? 훈련하게?”
“당연하다. 난 축구를 잘하고 싶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렇게 티알은 점심시간마다 리프팅을 시작하게 됐다.
“갑자기 옆에서 뭔데? 어? 야 이쪽으로 튕기면 어떡해!”
박종혁은 당황하긴 했지만, 자기랑 같이 훈련할 동료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기뻐했다.
* * *
오후 수업까지 마치고 학교 건물 뒤편 컨테이너에 마련된 축구부 건물에서 축구화와 유니폼을 챙겨서 운동장으로 나왔다.
축구부원들은 1, 2, 3학년 할 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서 개학 첫날의 소감을 얘기하고 있었다.
“수업 들었냐?”
“전혀. 온종일 잠만 잤는데.”
“원래 월요일은 점심 먹고 훈련이었잖아.”
“이래도 되나?”
훈련량이 줄어들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자 다들 혼란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오후 훈련은 힘들겠지?”
여전히 이렇게 생각하는 축구부원도 있었다.
그렇게 떠들고 있으니 로베르토와 두 코치가 시간에 맞춰 나타났다.
“자, 일단 7명씩 조 짜서 론도부터 시작.”
로베르토는 시간도 아까운지 연설 같은 것도 하지 않고 바로 훈련을 시작했다. 축구부원들은 당황하면서도 로베르토의 지시에 따랐다.
“코치님들이 그린 사각형 보이지? 이 안에서 공격팀은 계속 패스해야 하고 수비팀은 공을 빼앗아야 한다. 한쪽이 다섯 번 이기면 승리고, 진 팀은 쟤네들이랑 합류해서 훈련한다.”
론도가 끝나고 로베르토는 다음 훈련을 지시했다. 그리고 로베르토가 말한 쟤네들은 일곱 명의 체중 관리 실패자들이었다. 그들은 아침처럼 또 운동장 측면에서 인터벌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론도밖에 안 했는데 저들은 벌써 지옥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빨리 안 뛰어!”
김진호 코치의 재촉에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보니 저쪽으로 가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훈련했고, 패배한 팀들은 저쪽으로 가서 10회의 인터벌을 하고 돌아왔다.
“이번엔 6대 6 미니게임이다. 경기장이 왜 이렇게 작냐고 너희들의 종합적인 능력을 키우는 데 이만한 게 없다. 그럼 명단을 불러주겠다.”
우리가 다른 훈련을 하는 동안 김성빈 코치가 그려놓은 한 개의 작은 경기장에서 우리는 미니게임을 했다.
다른 훈련도 비슷한 방식이었다.
몸풀기부터 마무리까지 모든 걸 공을 가지고 하는 실전 위주의 훈련, 놀이 같은 훈련.
처음에 긴장하던 축구부원들은 어느새 훈련을 즐기고 있었고, 마지막 훈련에서는 다들 농담도 하면서 틈틈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럼 오늘은 해산!”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훈련하다 보니 순식간에 7시가 되었다.
우리는 땀 범벅인 채로 숙소로 이동해서 이모님이 해주는 맛있는 밥을 먹었다.
“으어어…….”
“살려달라…….”
물론, 티알을 비롯한 체중 관리 실패자들은 너무 훈련해서 입맛이 떨어진 건지 밥도 제대로 잘 못 먹었다.
“태신아~ 오늘 훈련 재미있었는데.”
“뒤진다. 내가 기필코 내일모레까지 살 다 빼서 그쪽으로 합류한다. 이거 못 해 먹겠다.”
노태신이 눈에 불을 켠 채로 말했다.
“티알, 살 좀 빠진 거 같은데?”
“정말인가?”
“거짓말이지~.”
“…….”
박종혁의 장난에 티알이 대답도 안 하고 입술만 삐죽 내밀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재밌어하면서 낄낄거렸다.
식사가 끝나고 난 이후엔 10시까지 야간 자율 훈련 시간이었다. 우리는 이걸 야자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 시간은 사실 완전 자율은 아니었다.
“……현준, 나 좀 알려줘라.”
로베르토가 처음으로 내밀었던 기준인 한 번도 안 떨어뜨리고 리프팅으로 운동장 다섯 바퀴 돌기를 할 수 있는 부원만이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전지훈련에서 상당한 인원이 통과하긴 했지만, 이 기준은 일주일에 한 번씩 통과해야 했다.
이번에도 일 등으로 통과하고 쉬고 있던 나는 기본기가 약한 티알을 위해 조언을 해줬다.
“솔직히 네가 공 다루는 실력은 좋은데, 시야가 너무 좁아. 의식적으로 더 멀리 보려고 해봐.”
“멀리?”
“응, 공도 눈에 담으면서 어디로 가는지도 보라는 거야. 대충 이 정도?”
리프팅하고 있는 티알의 머리를 붙잡아서 시야를 유도했다. 티알은 몇 번 더 퉁기다가 공을 떨어뜨렸다.
“집중이 안 되니까 어렵다…….”
“그걸 고치면 축구를 두 배는 잘하게 될걸?”
“그럼 하겠다.”
아까의 말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티알은 순순히 말을 들었다.
역시 아직 통과하지 못해 리프팅 연습 중이던 박종혁이 물었다.
“쟤는 아까부터 네 말 잘 듣는다?”
“축구 잘하면 인기 많아진다고 했거든.”
“인기?”
박종혁이 갸웃했다. 티알의 얼굴 쪽을 뚫어져라 봤다.
“음, 축구 실력이 아니라 얼굴이 중요…….”
“거기까지, 축구 잘해지면 인기 많아지는 건 사실이잖아? 응?”
혹여나 티알을 놀린다고 그런 소리를 할까 봐 나는 다급하게 박종혁을 설득하듯 말했고, 박종혁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건 그렇긴 하지…….”
“우리 전국대회에서 잘해야 하잖아. 잘하는 선수를 하나라도 늘려야 한다고. 티알은 제대로 축구 배운지 얼마 안 돼서 실력이 쑥쑥 늘 거란 말이야.”
박종혁이 감탄했다.
“그런 뜻이……! 알겠어. 협조할게.”
박종혁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