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05화
야간 자율 훈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직도 안 씻고 누워 있냐?”
방에 들어가자마자 본 건 어머니에게 전화한다고 먼저 숙소에 들어갔던 박종혁이었다. 녀석은 팬티차림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녀석의 옆에는 물 한 방울 안 묻은 샤워 용품이 놓여 있었다.
“선배들 씻는 중.”
“아하. 작은 화장실은?”
“다른 선배가 쓰는 중.”
“아이고.”
덜컥하고 큰 화장실 겸 샤워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야! 씻어!”
박종혁이 벌떡 일어났다.
“오오! 역시 샤워도 빠른 두식 선배님. 사랑하는 거 알죠?”
“뭐라는 거야.”
정두식의 정겨운 투덜거림이 거실에서 들려왔다. 박종혁이 손을 들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랑 같이…….”
“나! 두 명 씻는 거 가능하잖아. 빨리 씻고 잘래.”
“세 명도 될 거 같다.”
씻자고 할 사람을 찾기도 전에 엄태영과 티알이 손을 번쩍 들었다. 언제 준비한 건지 샤워용품도 다 품에 안고 있었다.
“티알 넌 늦었어.”
“아니다. 된다. 답답해 죽겠다.”
티알은 단호했다. 난 혼자 샤워하는 게 더 좋았기에 티알의 편을 들었다.
“그냥 해~ 할 수 있잖아.”
“와, 혼자 씻으려고.”
눈치 빠른 놈이라고 하지 않고, 티알을 더 부추겼다.
“티알, 그냥 먼저 들어가 버려.”
“좋은 생각이다.”
티알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박종혁이 다급하게 쫓아갔고, 자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던 엄태영은 티알보다 빨리 방을 나갔다.
나는 꼴찌더라도 혼자 느긋하게 씻는 걸 선호한다. 로베르토는 원래 1, 2, 3학년으로 나눠진 숙소를 전지훈련처럼 또 섞어놨다. 다만, 이번에는 선수들끼리 알아서 머무를 숙소를 정하라고 했다.
덕분에 이 숙소에 1학년은 우리 넷뿐이었다.
“현준아~.”
“예!”
익숙한 목소리에 달려가니 3학년 숙소에서 늘어진 채로 내게 손을 흔드는 노태신이 보였다. 정두식에 노태신에. 우리 숙소는 각 학년의 사실상 실세들이 모여있는 방이었다.
그래서 1학년이 우리뿐인 거였다.
덕분에 다른 방보다 더 넓은 공간을 사용할 수 있어서 좋았다. 노태신이 손가락으로 내 옆을 가리켰다.
“불 좀 꺼줘라.”
“……예?”
“헐, 송현준 이제 나한테 이런 것도 안 해주는 거야?”
목소리나 분위기나 장난을 치는 게 느껴졌다. 노태신을 비롯한 3학년들과 전지훈련을 거치면서 깊이 친해졌기 때문이었다.
“어휴, 태신 선배 자꾸 그러면 살 늦게 빠집니다.”
“그거…… 진짜 일어나야 할 거 같은데…… 너무 피곤하다.”
“맞아.”
“죽을 거 같다니까.”
7명의 다이어트 실패자 중 4명이 3학년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다 모여있었다.
“이불도 덮어드릴까요?”
“좋지.”
“현준이 역시 에이스.”
“축구천재.”
“인성도 좋아~.”
3학년들이 띄워주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불을 덮어줬다.
“다들 거짓말 그만하시고, 안녕히 주무십시오.”
“고마워~.”
가장 먼저 씻고 잘 준비도 먼저 한 덕인지 문을 닫고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방으로 향하는 도중에 열린 방문을 통해 정두식과 눈이 마주쳤다. 정두식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헐, 송현준 훔쳐보고 있냐.”
“아니, 선배. 뭘 볼 게 있다고.”
“헐…… 범철아 쟤 봐라. 축구 잘한다고 선배 잡아먹으려고 하네.”
“아하하.”
박범철은 정두식의 농담에 어색하게 웃었다. 예전에 체육대회에서 맞붙었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박범철은 말 그대로 무던한 성격이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축구부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사과한 것이다.
“범철 선배, 아까 우리 패스 대단했죠?”
“응? 아, 그거. 괜찮긴 했지.”
훈련 때 박범철과 호흡을 맞춰서 5번의 패스 끝에 골을 넣었다. 이런 멋진 플레이는 지겨울 수도 있는 훈련의 활력소였다.
“그럼 내일 봐요. 불 끌까요?”
“내가 끌게. 잘 자라.”
“감사합니다.”
정두식과 박범철을 뒤로하고 우리 방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샤워를 마친 친구들이 돌아왔고, 나도 샤워하고 뒤늦게 돌아왔다.
“안 자냐?”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티알과 박종혁은 이불을 깔아놓고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물론 엄태영은 집에서 가져온 건지 안대를 하고 자고 있었다.
꿀꺽.
티알의 목에서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박종혁은 새우깡을 아주 맛있게 먹고 있었다.
“맛있겠지? 먹을래?”
“박종혁 나쁘다…… 나 살찌면 하루 더 뛰어야 한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
티알은 부들부들 떨고, 박종혁은 낄낄거렸다. 이러면서 놀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엄태영의 옆에 마련된 비어있는 이부자리에 앉았다.
“빨리 자자, 감독님이 일찍 자라고 했잖아.”
지금은 10시 40분.
로베르토는 최종적으로 9시 30분에는 다 불을 끄고 자게 할 거라고 했다.
성장 호르몬이 나오는 아주 중요한 시기라면서 오후 훈련을 줄이고, 야간 자율 훈련 시간은 유지하면서 새벽 훈련 시간을 늘리는 게 장기적인 계획이라고 말했다.
“배고픈데…… 이거 다 먹고.”
박종혁은 놀리듯이 옆자리에 앉아 있는 티알의 눈앞에 대고 새우깡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면서 파도처럼 흔들었다.
과자에 따라 티알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게 재미있어서 나도 구경하고 있었다.
“안 자냐.”
그때, 로베르토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깜짝 놀라서 우리는 움직임을 멈췄다.
“푸우~ 후우~.”
엄태영의 숨소리만 방 안을 채웠다.
로베르토가 우리의 몰골을 확인하고는 박종혁에게 도끼눈을 떴다.
“숙소 문을 다 뜯어 버려야겠어. 다들 빨리 누워.”
“아, 감독님~.”
“남자 놈이 더럽게 애교야.”
“너무하십니다!”
박종혁이 그러건 말건 로베르토는 엄격한 표정을 유지했다.
“저녁에도 말했다시피 너희들은 성장해야 하는 시기다. 성장 호르몬은 평균적으로 오후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나오고, 이 시간에 너희들은 반드시 잠들어야 한다.”
틀린 말이 없었기에 티알과 박종혁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바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잘 준비를 마쳤다.
“그럼, 다들 잘 자라. 오늘 수고 많았다.”
불이 꺼지고 문이 닫혔다. 옆 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로베르토는 모든 방을 순회하고 있는 거였다. 전생에서도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축구부원들의 생활 방식을 바로잡았다.
로베르토가 3학년 방까지 들리고, 우리 숙소에서 나갔다. 그리고 5분 후, 방 바깥에서 발소리와 함께 현관문 여는 소리가 또 한 번 들렸다.
“누구지?”
박종혁의 목소리였다.
“감독님이 우리 자는지 감시하다 나간 거 아니야?”
내가 말했다.
“감독님 아까 나갔잖아.”
어? 그러고 보니 그렇네. 티알이 떨리는 목소리로 신음성을 냈다.
“헉…….”
“티알, 귀신이 뭔지 알아?”
“당연하다…….”
“그러면…… 빨간 마스크 알아? 요즘 학교 주변에 나타난다는데.”
“빨간…… 마스크? 그게 뭔가?”
“입이 귀까지 찢어진 여자가 빨간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닌다는 건데…… 우리 반에 빈자리 하나 있는 거 봤지…….”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도 티알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소리가 들렸다.
“걔가 빨간 마스크에 당했대…….”
“정말인가?!”
티알은 겁에 질렸다. 그 격렬한 반응에 나는 웃음을 참기 어려워서 입을 막았다. 오늘 우리 반에 하나 있던 빈자리는 해외여행을 갔다가 태풍 때문에 하루 늦게 돌아오기로 한 친구의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빨간 마스크가 노리는 학생은 말이야…….”
“응, 응…….”
로베르토가 빨리 자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한 시간 정도 뒤에야 잠들었다. 박종혁이 무서운 이야기를 하니 티알의 리액션이 정말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밤마다 움직이는 이순신 동상의 이야기를 했다.
모든 게 계획대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그냥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하루 잘 못 자면 남은 6일을 잘 자면 되니까.
* * *
“드릉…… 푸…… 드르릉…… 푸우…….”
거의 이 년 동안 들어서 익숙해진 정두식의 코골이를 듣던 박범철이 조용히 상체를 일으켰다.
로베르토가 숙소를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5분가량이 흐른 것 같았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박범철은 정두식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짐을 챙겼다. 축구화와 체육복을 미리 놓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푸…… 푸우…….”
정두식이 자는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는 화장실에 가기 편하도록 옅은 조명이 켜져 있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박범철은 뒤꿈치를 들고 소리를 내지 않으며 현관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현관문을 빠르게 열었다. 소리를 낼 수 없었기에 신발은 신지 않았다.
뚜뚜.
어쩔 수 없는 현관문 소리는 최소화해야 한다. 빠르게 닫았다.
띠리링.
아무도 듣지 않길 바라면서 박범철은 코치 숙소 앞을 조용히 걸어서 빠져나갔다.
숙소와 꽤 멀어졌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박범철은 축구화를 신고 달리기 시작했다.
축구부가 매일 훈련하는 대영 중학교 축구부를 지나서 초등학교 운동장 쪽으로 달려갔다. 초등학교 운동장의 측면은 가로등 근처라서 밝다. 박범철은 그곳에 멈췄다.
초등학교를 꾸미기 위한 빽빽한 회양목들 사이에 박범철은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숨겨놓은 축구공을 꺼냈다.
박범철은 곧바로 리프팅을 시작했다.
초조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박범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생각에 잠겼다.
로베르토의 훈련은 정말 좋았다.
처음 부임했을 때는 의문이 있었지만, 박범철은 솔직히 첫날부터 로베르토의 훈련이 좋았다. 로베르토는 그날 이후도 꾸준히 능력을 보여줬고, 전지훈련 기간에 한 훈련은 여태까지 중에 가장 도움이 많이 됐다.
박범철은 자기가 발전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뭔가 배운다는 기분이 드는 건 초등학교 시절 축구부에 들어간 시기 외에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몇몇 축구부원들을 보면서 어느 순간부터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처음은 송현준이었다.
체육대회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음에도 먼저 손을 내밀어준 송현준은 인성도 바를 뿐만 아니라 축구도 정말 잘했다.
심지어 성실했다. 무릎이 아프다고 해서 쉴 줄 알았더니 그 시간에 1학년 친구들의 훈련을 돕거나 영상으로 전술 공부를 하기도 했다.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더 열심히 한다는 사실에 박범철은 불안해졌었다.
두 번째는 친구 정두식이었다.
정두식은 전지훈련 초반과 중반이 매우 달랐다. 감독과 면담을 한 이후 훈련이나 경기나 한결 여유가 느껴지고 많이 웃고 있었다.
덕분에 경기력도 상승한 게 느껴졌다.
친한 친구의 발전에 박범철은 기쁘기도 했지만, 내심 자기가 초라하다고 느꼈다.
세 번째는 기존 축구부원 사이에서 중고 신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1, 2, 3학년들이었다. 이들은 김성빈 형과 함께 야간자율학습 때도 성실하게 훈련했다. 그들의 눈을 보면 흔들림이 없어서 왠지 모르게 시선을 피하게 되곤 했었다. 이들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어떤가?
전지훈련 중반부터 박범철은 회의감을 많이 느꼈다.
똑같은 시간을 훈련하고 있음에도 발전 속도가 느렸다. 훈련할 때도 더 조급해지고, 쉴 때는 지나치게 멍해지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컨디션이 좋아서 취침 시간에도 체력이 남아돌아 밖을 산책했었다. 그러던 중 길가에 굴러다니던 공을 발견해서 한 번 차봤는데 불안한 마음이 살짝 희미해지는 걸 느꼈다.
그날 이후 박범철은 밤마다 몰래 나와서 훈련하기 시작했다. 부족하다면 잘 시간까지 쪼개서 훈련하면 된다. 해결책을 찾은 거 같아서 박범철은 기뻤다.
물론, 로베르토에게 몰래 훈련하다 걸려서 된통 혼난 적도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오히려 안 걸릴 만한 장소를 찾아서 훈련했다.
숙소보다 더 멀리 가고, 공도 강하게 차지 않았다.
전지훈련이 끝난 후에도 야간 훈련을 계속할 생각이었기에 하루 일찍 숙소에 복귀해서 주변을 살폈고, 초등학교 운동장이 괜찮겠다는 결론을 내린 후에 축구공을 숨겨놨다.
그래서 지금 야간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선배님!”
무표정하던 박범철의 표정이 밝아졌다.
동료들이 왔다.
“왔냐?”
“네! 되게 빨리 오셨네요.”
“당연하지. 모범을 보여야 할 거 아냐.”
“역시 선배님입니다. 멋져요.”
띄우기는.
1학년 네 명이 박범철을 보고 있었다.
이들은 주전도 아니고 중간에 들어온 부원들도 아닌 말 그대로 평범한 인원들.
전지훈련 중에 박범철이 야간 훈련을 하다가 만난 후배들이었다.
얘기를 해보니 이들도 박범철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어서 함께 훈련하기로 했다.
서로가 똑같은 불안함을 느낀다는 사실이 이들을 더 뭉치게 했다.
“오늘도 열심히 해보자.”
따라잡을 수 없다는 불안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이들은 오늘도 야간 훈련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