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07화
다음 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문을 조용히 열었다.
거실 커튼 틈으로 아파트 출입구 쪽을 보고 있으니 박범철이 아주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걸음 소리가 나지 않아 자세히 살펴보니 신발도 안 신고 있었다.
박범철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고개를 뺐다. 아마 자길 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거겠지.
잠시 후 다시 커튼 틈으로 밖을 봤다.
박범철이 신발을 신고 있었다. 다 신자마자 곧장 달려서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갔다. 제 자리에 서서 나가는 방향을 확인하고, 나도 바로 준비해 놓은 운동화를 신고 바로 뛰어나갔다.
박범철이 방금까지 서 있던 아파트 출입구에 나오니 박범철이 뛰는 소리가 희미하지만 들렸다.
고요한 밤이라서 그럴 것이다.
나는 박범철처럼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바로 박범철이 향한 방향으로 달렸다. 희미하지만 소리가 계속 들려서 방향을 찾기는 수월했다.
탁탁탁탁.
“……!”
근데 뒤에서도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박범철 말고 네 명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박범철이 달리는 소리가 희미해졌지만, 일단 근처에 있는 골목에 몸을 숨겼다. 군청색 훈련복을 입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흘깃 보면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이거 범철 선배 소리지?”
“부지런하시다니까.”
골목을 지나간 건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훈련성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로베르토가 지목한 다섯 명 중 두 명이었고, 1학년 축구부원들이었다.
후보 수비수 김성호와 후보 골키퍼 조재근이었다.
나는 그들이 달리는 소리가 작아지는 걸 기다린 후 다시 골목에서 나왔다. 또 한 번 소리를 쫓아서 이번에는 조용히 달렸는데 금세 그들이 멈춰 서 있는 걸 발견했다. 걸음을 멈추고 몸을 숨겼다.
중학교 운동장을 지나길래 김채아와 가끔 운동하던 공원으로 가나 했는데, 내가 체력을 끌어올릴 때 애용했던 초등학교 운동장 앞에서 멈춘 것이다.
그들은 외곽에 있었는데 아무래도 초등학교 운동장 안에 조명이 없어서 길가에 있는 가로등의 빛을 이용하려는 것 같았다.
박범철, 김성호, 조재근, 김귀현, 진상재.
주전 멤버가 아닌 1학년 네 명과 유일한 2학년 박범철, 로베르토가 만든 명단과 똑같은 인원이 이곳에 있었다.
신발은 가지각색이었지만, 다들 운동복을 입고 있었고 무엇보다 박범철의 손에는 축구공 두 개가 있었다.
뭐 하려는 지 딱 보였다.
“다 왔네. 그럼 시작할까?”
“예! 선배!”
“작게 말해…… 앞에 아파트 있는 거 안 보여?”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박범철의 따끔한 말에 1학년은 시무룩해졌다.
“괜찮아. 지금 여기는 더 열심히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인 거니까. 선배 후배 너무 안 따져도 돼. 여기서는 형이라고 불러도 된다니까 왜 자꾸 선배라고 부르는 거야.”
“말실수할까 봐 걱정돼서요…….”
“뭐 어때? 암튼 빨리하자. 12시까지는 돌아가야지.”
“예, 형.”
박범철이 흐뭇하게 웃고, 다 같이 훈련을 시작했다. 공을 가지고 하는 훈련임에도 조용했다. 강한 슈팅은 하지 않고, 큰 달리기 같은 것도 없었다.
이들은 리프팅과 짧은 패스, 짧은 달리기 위주로 소음을 최소화하려는 거 같았다.
“열심히 하네…….”
속이 답답해져서 작게 혼잣말했다.
저들은 사회 통념상 나쁜 짓을 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감독을 두냐에 따라 긍정적인 일을 하는 걸 수도 있다.
저들은 틀림없이 더 잘하고 싶어서, 감독 몰래 추가 훈련을 자율적으로 하려고 모인 것이다.
-너 프로 선수 아니야!? 감독 말을 귓구멍에도 안 처넣을 거면 니가 감독하지 그래? 어? 송현준!?
하지만, 저들을 지켜보고 있으니 전생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첫 번째였나 두 번째였나…… 아니, 둘 다였을 것이다.
이 시기 축구 선수로서 애매하게 끝난 이유는 지금 이 시점…… 그러니까 성장기 때 가혹하고 무식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내 인생 첫 프로 축구팀의 감독님은…… 틀림없이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너는 지금 구단 소유야. 어딜 함부로 몸을 굴려!?
야간에 운동장에서 뛰던 나를 발견한 감독님은 내게 일부러 심한 소리를 하셨다. 나중에야 내 몸을 걱정해서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았지만, 그때는 반항심이 생겼다.
다음 날 프런트에 혼자 살고 싶다고 요구하고, 팀 숙소에서 나와 자취를 시작했다.
그리고 팀 훈련이 끝나면 무식한 개인 훈련을 했다. 감독님이 볼 수 없는 곳에서. 이 행동은 결과적으로 내 무릎 수명을 더 깎아 먹었다.
그 당시 나는 감독님과 코치님들에게서 더 나은 훈련과 관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학창 시절을 자잘한 부상과 방황으로 엉망으로 보냈기에 그 시간을 메꾸고 싶었다.
분명 나는 더 잘할 수 있는데 남들과 똑같이 하면 방법이 없을 거 같았다.
초조하고 불안했기에 그렇게 했다.
“아하하.”
“형, 빨리 공 주워 와요.”
박범철이 트래핑 실수를 해서 공이 내 쪽으로 굴러왔다. 가로등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나는 아예 불빛 하나 없는 근처의 골목에 몸을 숨겼다.
“누가 있었던 거 같은데…….”
박범철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나는 몸을 더 숨겼다.
“형, 빨리 와요.”
“그래, 갈게.”
1학년들의 외침에 박범철이 공을 주워 들고 가려고 했다. 나는 골목 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박범철은 공을 막 팔에 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더 힘내야지.”
나도 들어버린 혼잣말을 한 박범철은 운동장으로 힘차게 뛰어가서 훈련에 합류했다.
마음이 더 싱숭생숭해졌다.
더 잘하고 싶어서 더 열심히 한다.
저 마음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비슷한 상황에 있어 봤기에, 저들이 얼마나 간절해서 저러는지 안다.
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수십, 수백 명의 선수를 봐 왔기에 저 행동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저들보단 잘 알고 있었다.
소수는 오히려 벽을 깰 수도 있다. 하지만, 다수는 아니다. 나조차도 안 됐다.
입맛이 씁쓸해서 한쪽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여전히 입맛이 썼다.
로베르토가 부탁한 건 왜 저들의 훈련성과가 나오지 않는지 파악하는 것이었다.
일은 끝났다. 이제 자러 가야 했다. 내일 훈련을 위해서는 저들처럼 어리석게 하면 안 된다.
그걸 알면서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저들이 훈련을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 멍하니 지켜봤다.
* * *
“아하하! 그것도 못 받냐.”
정두식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정두식의 패스를 놓친 박범철이 금세 공을 가져와서 정두식에게 강하게 패스했다.
정색하며 집중한 정두식은 슛이나 다름없는 패스를 평소보다 훨씬 부드럽게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오오.”
멋진 플레이였다. 주변 축구부원들도 감탄했다. 정두식은 우쭐했다.
“이게 나야!”
“이익…….”
박범철과 정두식은 평소처럼 사이좋게 훈련하고 있었다.
오후 훈련은 순조로웠다. 수업을 전부 듣고 훈련한다는 생활 패턴에 축구부원 대부분이 적응을 끝마쳤다.
지난 학기보다 훈련량이 줄어든 만큼 로베르토는 축구부원들이 더 집중할 수 있게 매번 다양한 훈련을 가져왔다.
덕분에 훈련의 질은 떨어지지 않았다. 아주 좋은 흐름이었다. 특히 윤태상과 정두식의 발전이 눈에 보였다.
로베르토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니 쉴 때는 전력을 다해서 쉬어버리고, 훈련할 땐 몇 배의 집중력으로 해내고 있었다. 로베르토도 둘을 아끼는 게 느껴졌다.
다만, 지금 보고 있는 다섯 명의 선수들은 지난 학기와 크게 다르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각자의 무리에서 성실하게 하고 있긴 했지만, 발전 속도가 더딘 게 내 눈에도 보일 정도였으니까.
로베르토는 내게 어떻게 됐나 묻고 싶은 건지 가끔 날 쳐다봤지만, 내가 쳐다도 보지 않자 따로 물어보지는 않았다.
“어디 아프나?”
“……깜짝이야. 왜?”
“우리 쉬는 시간 끝났다.”
“아…… 미안.”
공을 손에 든 티알이 날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티알은 갸웃하면서 물었다.
“내가 물어본 거 왜 대답 안 하나?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닌가?”
녀석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어.”
“정말인가? 안색도 안 좋은데.”
티알이 고개를 들이밀면서 내 얼굴을 뚫어져라 봤다. 부담스러워서 고개를 뒤로 빼면서 손으로 티알을 밀어냈다.
“컨디션이 별로긴 해.”
티알이 깜짝 놀랐다.
“헉! 그러면 안 된다! 자라, 자라. 감독님에겐 내가 말하겠다. 내가 책임진다.”
“뭐? 푸흡…….”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찝찝했던 마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어떻게 책임지게? 나 대신 훈련 두 배 할래?”
“……으음, 그건 좀…….”
티알 덕분에 한 번 더 웃었다. 머리가 한층 더 맑아졌다.
“일단 공이나 차자.”
“좋다.”
“근데 티알, 물어볼 게 있는데.”
“물어봐라.”
티알과 1m 거리에서 짧은 패스를 빠르게 주고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해서 점점 멀어졌다가, 가까워 지기를 반복한다. 동시에 잔발을 쉬지 말아야 했다.
한두 번 해본 훈련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훈련을 하면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가 너한테 가끔 뭘 못한다고 어떻게 연습해야 한다고 말할 때 있잖아.”
티알은 아직 배울 게 많았다. 그래서 야간 자율 훈련 시간에 뭐가 부족하니까 이렇게 연습하자는 말을 자주 했다.
“뭔 소린가? 길어서 못 알아듣겠다.”
“예를 들면 티알 너는 크로스가 별로, 패스가 별로, 축구 머리가 나쁘다, 슈팅이 별로다…… 뭐 이런 식으로 내가 얘길 시작할 때 있잖아.”
“……너무하다 현준! 몰아서 들으니까 머리가 아프다…… 악! 공 주우러 가야 한다. 기다려라.”
티알은 심지어 패스를 놓쳤다.
말이 너무 심했나 싶어서 티알이 다시 공을 가지고 돌아오자 사과했다.
“미안…….”
“아니! 괜찮다! 근데 그걸 왜 한 번에 말하나?”
“그런 말 들었을 때 네 기분이 어땠나 해서.”
이런 건 당사자만 안다. 물론 나도 어떤 기분인지 잘 알았지만, 전생 중에서도 오래된 전생들이라 감정이 희미했다.
“부드럽게 말해주는 게 좋냐? 아니면 그냥 지금처럼 직설적으로 말해주는 게 좋냐?”
티알은 패스를 멈추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괜히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웬일로 진지하냐?”
“……너무하다. 그럼 대답 안 할 거다.”
“미안, 알려줘. 다음 휴가 때 맛있는 거 사줄게.”
“정말인가?”
티알은 쉬웠다.
“그럼 말해줘.”
“알겠다. 내 생각은 지금이 좋다. 마음이 아플 때도 있다. 그래도 돌려서 말하는 건 안 된다. 돌려서 말하면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바로 말해줘야 문제점을 빨리 찾고 빨리 바꿀 수 있다. 엄마가 그렇게 알려줬다.”
얘길 듣다 보니 내가 그 당시 어떤 심정이었는지 떠올랐다. 이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져서 티알을 놀렸다.
“어머니가 지혜로우시네. 너도 좀 배워라.”
“뭐!? 왜 나한테 그러나!”
“송현준! 티알! 훈련 안 하고 뭐 해! 지금이 떠드는 시간이야!?”
어느새 근처에 온 로베르토의 호통이 떨어졌다.
깜짝 놀란 우리는 엉성하게라도 일단 패스를 시작했다. 대화가 끊겼다. 티알과 나는 말없이 훈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티알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박범철을 포함한 다섯 명이 훈련하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역시, 그들을 생각하면 찝찝하다. 하지만, 조급해지면 해결 못 하는 게 있다.
그러니까 빠르게 저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게 맞다.
티알과 패스를 주고받으며 축구부원들을 둘러봤다. 내일은 내부 친선경기가 있는 요일이었다. 4:4에서 7:7까지. 인원도 다양했고 팀원을 짜는 방식도 매번 달랐다.
하지만, 내일은 내 생각대로 할 거다.
5:5 친선경기를 요청할 거고, 박범철을 포함한 다섯 명을 한 팀으로 만들 거다.
그리고 나와 지금 눈에 들어오는 축구부원 넷이 한 팀을 짜서 저들을 실력으로 눌러서 깨부술 거다.
때론 충격요법이 필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