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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인드 축구천재-108화 (89/173)

리마인드 축구천재 108화

“로베 형, 저번 훈련에서 1등 했다고 소원권 하나 줬던 거 기억해요?”

“……알지, 모르겠냐. 훈련 시작 전에 얘기 좀 하자길래 뭔가 했더니…… 언제 사줄까.”

진지한 기색이던 로베르토가 김이 빠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착각을 하는 거 같아서 내 용건을 제대로 말했다.

“사주긴 뭘 사줘요. 오늘 친선경기 규칙을 제 요청대로 해달라고요.”

“친선경기?”

로베르토가 축 처졌던 어깨를 바로 세웠다.

“네, 친선경기요. 한 시간 뒤에 오전 훈련하잖아요. 오늘은 5:5로 하고, 팀원 구성을 이렇게 해주세요.”

미리 적어온 A4용지를 한 장 내밀었다.

로베르토는 말없이 종이를 받아 내용을 살피고는 날 바라봤다.

“얘네, 걔네 아니냐?”

“맞아요.”

로베르토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던 훈련성과가 없는 그룹. 그들 다섯 명을 한 팀에 적었다.

박범철, 김성호, 조재근, 김귀현, 진상재.

로베르토는 한층 더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얘네랑 붙겠다고?”

“네.”

“네 팀원은…… 음,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긴 한데…… 쟤네가 뭐 때문에 훈련성과가 적은지 알아낸 거지?”

“예. 근데 로베 형한테는 말 안 할 거예요.”

“뭐?”

“저 다섯 명이 안 혼났으면 해서요.”

로베르토가 날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하고 웃었다.

“선수끼리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게 맞지. 근데, 실패하면 알려줘라. 그땐 혼내서라도 고쳐놓을 테니까. 뭔지는 짐작이 가지만…….”

로베르토도 프로 생활을 해본 몸이다. 저 다섯 명이 따로 훈련하고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나에게 알아보라고 한 것도 저들이 어디서 훈련하는지를 알아봐 달라는 거였을 거다.

“네, 그러면 부탁드릴게요. 저 팀이랑 제 팀 빼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셔도 돼요.”

“에잉, 기왕이면 다 정해오지. 팀 짜기 얼마나 귀찮은 줄 아냐.”

“와…… 감독님이 직무 유기하면 안 되죠.”

“직무 유기든 아니든 귀찮은 건 귀찮은 거야. 근데 너 후회 안 하겠냐.”

“뭐가요?”

로베르토를 올려다봤다. 로베르토는 실실거리며 웃고 있었다. 기분 나쁜 미소였다.

“소원권을 틀림없이 소고기 사달라고 할 줄 알고 돈을 모아놨었거든. 후회 안 하는 거지?”

“아, 그냥 사주면 안 돼요? 생각해 보니까 감독이 할 일 대신 해주는 거잖아요.”

소고기라고 하니 소원권이 조금, 아주 조금 아까워졌다. 이 소원권은 훈련 첫 번째 주차의 마지막 날, 로베르토가 주최한 롱패스 대회에서 일등을 하고 받았다. 소원권은 로베르토에게 원하는 걸 부탁할 수 있는 거였다.

휴가는 최대 1일, 음식은 최대 5만 원, 이런 식으로 한계가 정해져 있긴 했지만, 중학생으로서는 탐나는 상품들이었다. 이 시절 5만 원이면 자장면만 스무 그릇 정도 사 먹을 수 있는 돈이었으니까.

“응, 안 된다. 소원권 쓴다고 했잖아.”

“아니, 로베르토식 친선경기는 원래 그날그날 정하잖아요.”

“……네가 어떻게 아냐? 저번 주에 한 번 한 게 단데.”

로베르토가 신기하다는 기색으로 물었다. 전생의 경험을 잘못 말했다. 실수를 깨닫고는 아쉽지만, 더 따지지 않고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저번 주에 그렇게 하길래 이번 주도 그런 줄 알았죠. 됐어요. 소고기 사주기 싫으면 마세요.”

“응, 그래도 안 사줄 거야.”

“……안 먹히네.”

“흐흐.”

“갈래요.”

“오늘은 좀 애 같네. 보기 좋아.”

“됐습니다. 감독님.”

“그래그래, 송현준 선수. 오늘 훈련 열심히 하고~.”

왠지 당한 기분이었다. 로베르토의 놀림을 뒤로하고 축구부 건물에 있는 감독실을 나섰다.

* * *

“오늘은 저번 주처럼 몸풀기 후 30분짜리 친선경기를 할 거다. 5대 5고, 명단은 정해놨으니까 확인해라. 김 코치님.”

“예!”

“팀별로 모아서 론도 시켜주세요.”

“알겠습니다.”

로베르토는 일주일에 한 번 내부 친선경기를 한다.

3대 3부터 11대 11까지, 팀별 인원수는 다양하고, 같은 3대 3이라도 경기장 크기를 훈련 목적에 맞게 바꾸는 등 다양한 경험을 목적으로 하는 훈련이었다.

또, 팀도 매번 다르게 짠다.

왜냐면 여러 조합으로 뛰는 걸 짧게나마 지켜보고, 대회가 가까워지면 그중 최적의 조합과 선수들이 편하게 생각하는 플레이 같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최적화하는 게 로베르토의 스타일이었다.

“자, 일단 1조! 박범철, 조재근…….”

김진호 코치가 부르는 대로 1조가 모였다. 박범철을 비롯한 다섯 명이었다.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표정이 밝아졌다.

“어? 우리가 같은 조네.”

“대박입니다.”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이겨서 남은 오전 훈련 면제 따보죠. 론도부터 시작해요.”

이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즐거워하는 게 느껴졌다.

“그럼 2조! 송현준, 그리고…….”

로베르토는 내 부탁을 잘 들어줬다. 1조는 박범철 조, 2조는 송현준 조다.

우리 조의 멤버들이 내 주변으로 모였다. 이들은 날 제외하고 전부 친한 사이다.

“뭐야.”

“송현준이잖아.”

같은 1학년인 성동현과 박지훈이 차례로 말했다. 이들은 전지훈련 때 이야기를 튼, 중고 신입이라는 멸칭으로 불렸던 부원들이었다.

“잘 부탁해. 잘 부탁드려요.”

“너 있으면 이길 수 있겠네.”

성동현이 덤덤하게 말했다.

“일단 몸부터 풀자. 저쪽에서 할까요? 선배?”

“그러자.”

박지훈이 제안하고 2, 3학년 선배와 성동현도 동조했다. 나도 그들을 따라갔다.

“제가 가운데 설게요.”

“그래라.”

대화는 길지 않았다. 네 명이 정사각형을 만들었고, 내가 가운데에 섰다. 이들은 패스를 시작했고, 난 혼자 움직이면서 공을 빼앗을 기회를 노렸다.

“근데, 부탁할 게 있는데.”

“부탁할 거? 너 공격수 한다고? 해.”

박지훈이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말했다.

“아닌데…….”

이들 사이에서 내가 대체 어떤 이미지길래 이렇게 말하는 걸까.

“그럼 뭔데? 네가 제일 잘하니까 공격수나 가운데 서는 게 낫지 않나? 측면 설려고? 그래도 상관없긴 하지.”

악의는 없어 보였다. 박지훈은 그냥 덤덤하게 말했다. 다들 박지훈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다들 내 실력을 인정하기 때문인 거다. 조금 퉁명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우리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본론을 얘기해야 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지훈아, 나 골키퍼 할 건데.”

“뭐?”

박지훈이 패스 실수를 했다. 방향은 맞았지만, 강도가 약했다. 느린 패스를 가볍게 뺏어낸 나는 박지훈의 자리로 향하며 말했다.

“나는 맨 뒤에서 골키퍼 겸 최종수비수로 패스 뿌리는 거에만 집중하려고. 너랑 동현이랑 선배들은 평소에도 같이 연습하던 사이잖아? 그게 더 효율이 높을 거 같아서 그래.”

“그건 그렇지만…… 우리는…….”

축구부 내에서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무리였다. 다른 운동부에서 오거나 축구를 몇 년 그만두고 다시 시작한 이들이니 당연한 거다.

“괜찮아. 너나 동현이나 선배들이나…… 실력이 엄청나게 늘었거든. 몰랐어?”

“……그래?”

박지훈의 입술이 순간 꿈틀거리려는 걸 놓치지 않았다.

“응, 엄청나게 늘었어. 그냥 믿고 맡길 수 있을 거 같은데.”

내 확인 사살에 박지훈이 살짝 히죽였다. 성동현과 선배들도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박지훈이 그들을 돌아보고, 날 바라봤다. 이제는 쑥스러워하는 게 재미있었다.

“크흠…… 그러면…… 그렇게 할까?”

반대쪽에서 성동현도 동조했다.

“현준이가 그렇게 말하는데 괜찮지 않나?”

나머지 선배들도 똑같았다.

“해도 괜찮을 거 같은데.”

“지훈아, 동현아, 해보자.”

박지훈이 모두를 다시 돌아보고 내게 말했다.

“그렇다는데…….”

“좋아. 그럼 내가 골키퍼 볼 테니까 잘 부탁해. 나도 오전 훈련 빼고 싶단 말이야.”

“우리만 믿어.”

포지션 정리를 마친 우리는 본격적으로 론도를 했다. 15분가량의 론도가 끝난 후 김성빈 코치의 지시에 따라 몇 가지 코디네이션까지 마친 우리는 로베르토가 열심히 그린 경기장에 섰다.

우리의 맞은편에는 박범철의 팀이 서 있었다. 저 팀은 우리 축구부의 세 번째 골키퍼인 조재근이 있었기에 조재근이 가장 뒤에 서는 모양이었다.

참고로 풋살 식으로 경기하더라도 로베르토는 골키퍼까지 참가시켰다. 로베르토는 골키퍼도 기본적인 킥은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여러모로 앞서가는 사람이다.

아무튼, 박범철 팀을 살피고 있으니 박지훈이 한마디 했다.

“성골 대 6두품이네. 너도 6두품 맞지?”

“아니, 그런 얘기 좀 하지 마…… 우린 다 축구부잖아.”

“할 건데~.”

박지훈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자조적인 농담이었지만, 이들은 꺾인 게 아니었다. 그걸 농담으로 써먹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단단한 상태였다.

그래서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어질어질하네.”

이들과 한 팀이 된 건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지만, 의외로 경기도 재미있을 거 같았다.

* * *

“송현준이 있지만 해볼 만해. 알잖아? 쟤네는 너희보다 축구 덜 한 애들이야.”

박범철이 팀원들을 모아 놓고 독려하고 있었다.

“할 수 있어. 훈련 시간 면제도 확실하게 받아보자고.”

“예! 형…… 아니 선배님!”

박범철은 평소처럼 웃지 않고, 진지한 눈으로 네 명의 1학년을 둘러보고 송현준 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송현준과 상대 팀원들이 화기애애하게 웃으면서 장난을 치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박범철은 가슴 속에서 승부욕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기고 싶다.

체육대회의 인연도 있긴 하지만, 박범철과 송현준의 인연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범철은 송현준을 초등학교 6학년 시절에 직접 상대해 본 적이 있었다.

-쟤 뭐냐…….

-말도 안 되네…….

전국대회였다. 박범철의 팀원들은 경기 도중에 이런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 대회에서 송현준은 득점왕을 했고, 박범철의 팀은 무려 다섯 골을 먹혔다. 박범철은 이 경기에서 자기가 완벽하게 조연이 됐다는 감정을 처음 느꼈다.

무척 분했고, 나중에 복수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운동장을 수십 바퀴를 뛰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전국대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에게서 송현준이 축구를 그만뒀다는 소식을 들었다. 송현준은 대전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였기에 학부모들 사이에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허무했다. 그래도 박범철은 계속 축구부 생활을 했다. 정신없는 훈련 때문에 송현준을 자연스럽게 잊었다. 대신 윤태상이라는 또 다른 천재를 보면서 가끔 송현준을 떠올렸다.

그렇게 잊었다고 생각했다.

송현준이 박종혁과 슈팅 대결을 할 때까지 말이다.

송현준의 슈팅은 2년 전보다 더 정교해져 있었다. 그걸 보면서 충격을 받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윤태상이 송현준이 누구냐고 물어볼 때 괜히 허세를 부렸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송현준은 운동을 2년이나 쉬고, 자신은 2년 동안 열심히 했는데 송현준이 경기를 잘 뛸 리 없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담임 선생의 도발에 넘어가서 체육대회 결승에서 맞붙을 때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현실은 냉혹했다.

2년 쉰 송현준은 2년 전보다 더 무서운 선수가 되어 있었다. 정두식을 제외한 2학년 동기들의 은근한 비웃음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경기장에서 상대해 본 송현준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선수라는 느낌을 줬으니까.

그날 이후부터 박범철은 자신감을 잃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그저 그런 축구부원 중에 하나가 됐다.

그래서 전지훈련 도중에 몰래 훈련하고 성취감을 느꼈을 때 기뻤다. 더 나은 선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하고, 자기와 같은 마음을 가진 1학년들을 위해 더 힘을 냈다.

“준비됐지?”

“예!”

로베르토의 질문에 박범철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힘차게 대답하고 송현준을 바라보았다.

송현준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럼 시작한다. 킥오프는 박범철 팀부터.”

행운도 따라주는 것 같았다. 로베르토가 던진 공을 받은 박범철은 오늘 경기에서 꼭 이기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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