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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인드 축구천재-111화 (92/173)

리마인드 축구천재 111화

박범철이 오늘 처음으로 보는 표정을 했다. 느닷없이 청춘 스포츠 만화에서 나올 법한 목표를 들으니 그럴 만하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다.

내 개인 커리어와 인생 설계를 위한 건 맞다. 하지만, 모두가 힘을 합쳐서 좋은 성과를 내는 걸 보고 싶다는 것도 진심이다.

나랑 동고동락한 사람들은 최선의 결과를 얻기를 바라니까.

“……진심으로?”

“왜 못해요? 전지훈련 때 우리 팀 하는 거 보면 모르겠어요? 충분히 해볼 만해요.”

“……그렇지, 네가 있으면…….”

“내가 없을 때도! 할 수 있다니까요? 내 무릎 상태 몰라요?”

또 도돌이표다. 성질이 나서 허공에 발길질했다. 이 사람이랑은 더 얘기하기 싫었다. 빨리 마무리 지어야겠다.

“계속 시큰거린다고요! 병원에 물어보니 너무 급하게 성장했고, 더 할 거라서 운동을 점점 못하게 될 거라고요. 당연히 경기에도 많이 못 나가겠죠.”

대놓고 화를 내자 박범철이 움츠러든 게 느껴졌다. 아까보다 말을 잘 듣는 거 같아서 계속 화를 내기로 했다.

“내가 스트레스받으면서까지 선배를 설득하려는 이유가 뭘 거 같아요? 선배가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전국대회에서도 틀림없이 도움이 되겠죠.”

“…….”

“하지만 선배에게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사람마다 발전하는 속도가 다르고, 최고점을 찍는 시기가 달라요. 선배는 묵묵히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재능? 그딴 소리 할 거면 당장 축구 때려치워요. 전 세계에서 오직 한 명만 재능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않을 수 있는데, 그러면 나머지는 다 축구 그만둬야 하는 거예요? 당연히 안고 가야 하는 것 때문에 징징대지 말라고요. 혼자 어디 산 구석에 처박혀 살 거 아니면 어느 직장이든 똑같다고요.”

“…….”

수십 초 동안 침묵이 깔렸다. 나는 내가 한 말들을 되짚어봤다.

좀 심했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다만 조금, 조금 많이 부끄러웠다. 박범철과 친구들이 멍한 얼굴로 전부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감독님을 좀 더 믿어요. 무엇보다, 스스로를 좀 믿어요. 그럼 끝.”

할 말을 마치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도망쳤다.

말 그대로 뛰었다.

그림이 이상했지만 부끄러우니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오버워크 하는 건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나는 계속 뛰었다. 밤공기는 맑았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어서 노란 보름달이 보였다.

방금은 흥분해서 계획한 것 이상으로 심한 말을 해버렸다.

할 말을 해서 후련했지만, 저들이 개인 훈련을 그만둘지는 모르겠다.

찝찝하다. 그래도 털어버려야 한다.

아까 내가 말했던 것처럼 세상에는 불편해도 안고 가야 하는 게 있다. 어쩔 수 없는 건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거다. 불편한 감정이 생길 때는 흘려보낼 줄도 알아야 한다.

“모르겠다. 할 만큼 했으니까 잘 되겠지.”

이번 인생의 마지막까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중얼거리면서 나는 숙소를 향해 뛰었다. 최대한 빨리 자야 내일 훈련을 좋은 컨디션으로 해낼 수 있을 테니까.

* * *

로베르토가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마우스를 몇 번 누르니 프린터에서 종이가 한 장 나왔다. 이번 주 축구부원들의 훈련성과 보고서였다.

로베르토가 타준 쓴 커피를 홀짝이고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나는 물이랑 얼음을 타야 한다.

내가 그러건 말건 보고서를 보며 히죽거리는 로베르토에게 물었다.

“어때요?”

“일주일이지만 순조로워. 박범철이랑 네 명 다 정상 궤도야.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준아, 잘했다.”

“정말 모르는 거예요?”

“그런 거로 하자고.”

말을 마친 로베르토는 혼자 웃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그들은 그 대화를 한 후부터 야간 훈련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그렇다.

아무래도 화도 내고 그래서 훈련 때 그들과 같은 팀을 짜거나 동선이 겹치면 민망했다. 1학년 친구들은 오히려 더 밝게 인사해 줬지만.

물론, 박범철과는 불편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인사를 안 하는 건 아니었다. 서로 고개 까딱 정도는 한다.

“정말 잘했다, 현준아.”

“잘됐네요.”

대답하고 또 한 번 홀짝. 역시 쓰다.

침묵이 흘렀다. 로베르토가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조용했다. 시선을 돌리니 로베르토가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할 말 있어요?”

“지난주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뭔 일 있었냐?”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이제야 궁금해요?”

“아니, 네가 평소랑 다르니까, 배려해준 거지.”

“훈련을 대충 하진 않았잖아요.”

“평소보다 더 열심히 했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저번 주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감정적으로 무뎌졌던 게 떠올랐거든요. 덕분에 책임감도 생겼고요.”

“뭔 개소리냐.”

감성적인 말을 끊고 들어오는 로베르토의 핀잔에 인상을 찌푸렸다. 로베르토는 설명이나 하라는 듯 내게 손짓했다.

한숨을 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요. 일주일 전에 뭘 했냐면요…….”

박범철과의 대화는 흔하디흔한 주제다.

사람마다 재능이 다르고, 훈련 시간은 제한돼 있고, 그에 따라 끊임없이 실력 차가 벌어지고.

성장하고 있는 유소년 선수들 사이에서는 심심하면 나오는 주제다. 지난주처럼 심각하게 얘기하지 않을 뿐이지 한 번쯤은 해봤을 생각이다. 안 될 선수들은 진작 포기해서 저런 논쟁까지 가지도 않지만 말이다.

괜히 스포츠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런 소재를 클리셰로 다루는 게 아니다. 그 종목에서 최고인 선수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두려움이었으니까.

이야기를 끝마친 나는 내가 느낀 점을 정리했다.

“그래서, 재능이 있는 만큼 더 책임감 가지고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보다 재능 떨어져서 좌절했는데, 제가 헤매고 있으면 열 받을 거 아니에요?”

로베르토는 내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한 수 배웠네. 너 같은 천재들도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재능이 부족할 때 뭐가 힘든지 잘 아니까요. 기왕이면 저런 자식한테 내가 졌어? 보다 저런 놈이니까 날 이겼구나, 가 좋잖아요?”

“참나…….”

어처구니없어한 로베르토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넌 너무 어른 같아.”

“축구 하는 애들은 더 일찍 어른이 돼요. 당연한 거죠.”

“……넌 유난히 더 그렇다고, 짜식아.”

로베르토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친근함의 몸짓이라는 걸 알았지만, 많이 셌다.

“아파요.”

“아프라고 한 거야. 아무튼 그거면 됐다.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아프라고 했다는 말에 눈을 흘겼다. 로베르토는 무시하면서 자기 할 말을 했다.

“절 왜 걱정해요?”

“알아서 잘하니까 더 걱정되는 거야. 한번 실수하면 크게 삐끗할 거 아니냐.”

“올…….”

장난스럽게 대답했지만, 심장의 어딘가가 찌르르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게 기쁘긴 하다.

마음이 좀 편해지는 거 같기도 했다.

“그러면 그때 취소된 소고기 사줘요.”

“아니, 용돈도 받는 게 나한테…….”

빤히 쳐다봤다.

“왜 자꾸 소고기냐?”

“단백질이 풍부하잖아요. 고소하고, 맛있고.”

“돼지나 닭 먹으면 되잖아.”

“내가 사 먹긴 비싸고요.”

로베르토는 또 한 번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날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그래, 사준다. 사줘.”

“정말이죠?”

“그래~ 그럼 감독님은 할 일 있으니까 나가라~.”

로베르토가 다시 한번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더 놀리면 안 될 거 같았다.

“약속입니다. 거짓말하면 안 돼요. 그럼 갈게요.”

“그래, 그래.”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로베르토가 막 꺼낸 파일철에 ‘신영 중학교’라고 적혀 있는 게 보였다.

“신영 중학교랑 친선경기라도 해요?”

신영 중학교 축구부는 같은 지역구에 있고,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었다. 전국대회의 강호는 아니다. 하지만, 그건 대영 중학교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전생에서도 수없이 친선경기를 하곤 했다.

로베르토가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주 토요일 오전에 하기로 했어. 내 훈련은 너도 알다시피 일주일에 한 번 경기를 치르는 걸 상정해서 계획하는 거거든. 내부 친선경기만으론 한계가 있으니까.”

곧 유럽에 유행할 전술 주기화 훈련은 일주일에 한 번 리그 경기가 있는 걸 상정해서 훈련 계획을 짠다.

“빨리 가. 이제 집중해야 한다고.”

“알겠어요. 저, 근데 아이디어 하나 있는데.”

로베르토가 불퉁한 얼굴로 날 봤다. 여전히 소고기 때문에 당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이번 건은 말 그대로 아이디어다. 전생 막바지에 학창 시절 때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했던 걸 해보려고 한다. 마지막 인생이니까 시도라도.

“뭔데?”

“친선경기 우리 학교에서 하는 거예요?”

“응, 이번에는 우리 학교, 다음 주에는 저쪽 학교.”

“그다음 주에도요?”

“다른 축구부를 찾아보고 있어. 매주 할 거야.”

“딱이네요.”

“뭐가?”

로베르토에게 아이디어를 말했다. 로베르토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턱을 만지작거리는 게 내 아이디어가 실현됐을 때의 상황을 떠올려 보는 것 같았다.

“괜찮겠는데?”

“그렇죠?”

“축구부원들이 더 죽기 살기로 뛰겠네.”

“더 재미있게 뛸 수도 있고요.”

“그럼 지금 이사장님…… 아니, 영대 형님 만나러 갈 거냐?”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러니까, 앞으로 이 주일에 한 번은 교내에서 친선경기를 할 거다?”

“네.”

“그걸 전교생이 봐줬으면 좋겠다?”

“맞아요.”

“그렇지만…….”

이사장 박영대가 머뭇거렸다.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됐기에 차분하게 기다리면서 다음 말을 준비했다.

“난…… 원래도 전교생한테 친선경기할 때마다 보라고 했는데…….”

그렇다. 1학기 때도 친선경기가 자주 있는 건 아니었지만, 친선경기를 한다면 토요일 오전에 하곤 했다.

주 5일제가 아닌 이 시절의 토요일에는 보통 특별활동을 한다. 종이접기부, 영화감상부, 방송부 같은 특별활동부에 반드시 가입해서 특별활동을 하는 것이다.

근데 이사장은 이 토요일에 친선경기가 열리면 축구 경기 보러 나가라고, 특별활동 빼준다고 방송까지 하는 사람이었다.

“학생들이 안 보는 걸 어떡하니…….”

박영대가 우울해졌다. 동감이다. 박영대가 그런 방송을 하면 학생들 일부가 운동장으로 나오기는 한다.

문제는 그 학생들이 축구를 보는 게 아니라 딴짓을 한다는 거다. 스탠드에서 하면 양반이고 경찰과 도둑처럼 교내를 뛰어다니면서 노는 경우도 많았다.

“그걸 통제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근데 강제로 축구를 보게 하는 게 맞는 건가 싶기도 하고.”

축구를 좋아하는 박영대로서는 슬픈 반응이었을 것이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박영대는 딱히 이 문제로 학생들을 들볶진 않았다.

“알아요. 저도 강제로 다 모으려는 건 아니에요.”

“그러면?”

“영대 아저씨, 혹시 프로 축구 보러 가 보셨어요?”

“어…… 크흠.”

박영대가 당황했는지 헛기침을 몇 번 더 했다. 축구를 좋아하는데 프로 축구는 안 본다. 그 사실이 찝찝한지 뭔가 말하려는 박영대보다 먼저 말했다.

“괜찮아요. 축구 좋아하는 아저씨들은 다 직접 하는 걸 좋아하지 경기를 보러 가진 않더라고요.”

“뭐, 다들 그렇지. 하하.”

내가 대신 변명해 주자 박영대는 어색하게 웃으며 공감해 줬다.

“이번 주는 준비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다음 친선경기를 준비하기 위해서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도움을 받고 싶어요.”

박영대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뭘 하려고 하니?”

“매치데이 포스터랑 매치데이 프로그램…… 그러니까 팜플릿을 만들어 봐요. 무작정 보라고 하면 안 되죠. 흥미를 끌 거리를 뭐라도 던져야죠.”

“……그게 뭐니.”

“경기가 언제 하는지, 뭘 중심으로 봐야 하는지, 선수가 누군지 이런 거요.”

“듣기만 해도 만드는 게 번거로울 거 같은데…… 그걸 학생들이랑 선생님들이 왜 하니?”

“토요일에는 특별활동을 하잖아요?”

“아.”

내 질문을 듣자마자 박영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열심히 하는 특별활동도 분명히 있어요. 근데, 제가 해본 바로는 대다수가 대충 시간만 보낸다니까요? 그러니까 이 특별활동에 친선경기 준비라는 목적을 만들어주는 거예요. 학생들이 힘을 합쳐서 친선경기를 준비한다. 어때요? 이사장님? 멋진 그림이지 않나요.”

박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두 눈동자에는 기대감이 차올라서 넘치려고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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