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마인드 축구천재-115화 (96/173)

리마인드 축구천재 115화

이어서 헛기침을 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근데 얘들아, 기왕 사람들이 많이 보러온 거 멋진 경기 보여줘야 하지 않겠냐?”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래.”

박종혁이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날 보고 있다.

“내가 뭐 어때서?”

“느끼한 눈이잖아. 아저씨 같아.”

엄태영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느끼가 뭐냐?”

티알은 뜻을 몰라서 갸웃거리고 있었다. 내가 정말 그랬나? 아니,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박종혁과 엄태영의 반응을 무시하기로 하고 계속 말했다.

“아무튼, 재밌는 경기 해야지.”

친선경기로 축구부의 실력을 쌓으면서 재미있게까지 한다. 그게 바로 이번 친선경기의 목표였다.

그때, 내 어깨에 뭔가 얹히는 느낌을 받았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리려고 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밌는 경기는 무슨…… 이겨야지. 송현준, 빡겜 해라.”

내 어깨에 턱을 기댄 건 노태신이었다. 느릿하면서 진지한 목소리로 내 귀 옆에 대고 말하고 있었다.

“너희, 오늘 이겨야 돼. 지면 안 돼. 대충 하지 마. 즐기면 안 돼.”

“예!”

“당연하죠. 선배님.”

군기가 든 것 같은 엄태영과 티알의 대답과 박종혁의 능글한 대답까지.

노태신이 내 어깨에 턱을 댄 채로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는 건 짐작하기 쉬웠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친구들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물론, 나는 노태신이 왜 이러는지 짐작이 갔다.

노태신은 휴가나 휴일에 다른 학생들이랑 노는 걸 좋아했다. 특히, 노태신은 이성에 관심이 많았다. 전생에 노태신이 놀자고 불렀을 때 몇 번 나가봐서 잘 안다.

지금 구경하러 나온 학생 중에 노태신과 친하고…… 관심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러는 거다.

괜히 져서 자존심 구기기 싫을 테니까.

내 의도와 다르게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 같아서 조치를 취할까 잠시 고민했다.

“당연하죠. 선배님.”

근데 곧 상황을 정리해 줄 로베르토가 올 예정이라 노태신 앞에선 수긍하기로 했다. 다만 떡밥 하나를 던지기로 했다.

“감독님도 이기라고 할까요?”

“감독님도 똑같겠지 뭐.”

“선배님, 감독님은 아마 이기는 거 별로 중요하게 생각 안 할 거 같아요.”

그때였다. 아군이 등장했다.

로베르토는 아니었고 최근 로베르토의 충신이 된 사람이었다.

“에이, 태상아.”

윤태상의 등장에 노태신은 내 어깨에서 턱을 뗐다.

“감독님도 이기라고 하지 않겠냐? 친선경기는 실전처럼 하는 거잖아.”

노태신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훈련 방식에 따라서 실전처럼 하는 친선경기가 도움이 되는 팀이 있다.

하지만 윤태상은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전지훈련 이후 항상 표정도 좋고, 실력도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어서 축구부원 사이에서 평판이 더 좋아지고 있었다. 원래도 좋았는데 더.

“전지훈련 때는 져도 뭐라고 안 하셨잖아요. 그때 경기 전에 한 말들도 우리가 배운 걸 과감하게 시도하는 게 중요하다고 그랬고…….”

“에잉, 상대가 다르잖냐. 전국대회의 강호들이었는데.”

노태신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윤태상은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근데 감독님은 자기 말 안 바꿀 스타일 같긴 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윤태상이 대신해 주니 편했다.

윤태상은 어느 전생에서보다 더 로베르토를 신뢰하고 있었다. 여러 면에서 변화가 보이니 재미있었다. 앞으로 윤태상이 어떻게 성장할지도 기대됐다. 기왕이면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당당하게 나설 정도로 일취월장했으면 좋겠다.

아무튼, 나는 윤태상의 말을 보강하기로 했다.

“태상 선배 말대로면 오늘 닥공하겠네요?”

“닥공?”

닥치고 공격이라는 뜻으로 요즘 훈련에서 자주 쓰는 말이었다. 로베르토는 미니게임 방식으로 훈련을 많이 진행했는데, 큰 틀은 다 비슷했다.

5명이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5명이 수비한다. 공격수를 6명으로 늘리고 수비수를 4명으로 줄일 때도 있고, 그 반대도 있었다.

개학하고 매일 이런 훈련을 했다.

훈련할 공간을 늘리기도 줄이기도 하면서 다양한 상황에서 더 과감하게 할 수 있게, 창의적인 공격방식을 찾아낼 수 있게 훈련 뺑뺑이를 돌리고 있는 거였다.

잠시 생각하던 노태신이 반문했다.

“그게 왜 닥공으로 이어져? 공격진이랑 수비진 따로 훈련했잖아.”

“열한 명이 하는 걸 따로 안 했으니까, 기본적으로 그런 식으로 경기를 치를 거 같아서요. 공격진은 닥공 유지하고, 수비진은 그거에 맞춰서 움직이고. 아직 팀 합을 완벽하게 맞춘 게 아니니까요.”

“그럴듯한데?”

윤태상이 동감해 줬고, 노태신도 수긍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럴 만도 하겠네…… 그것대로 하면 경기도 재밌긴 하겠지만…….”

노태신은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다. 수비를 신경 쓰지 않고 무작정 공격하는 훈련에 ‘닥공’이라는 이름을 붙인 건 노태신이었다. 그만큼 노태신은 재미있게 훈련하기도 했다.

문제는 친선경기에서 지면 노태신의 자존심이 금이 갈 수도 있다는 거였다.

“……그렇게 하려나? 근데 그러다 지면 어떡해.”

“자자, 다들 집합.”

그때, 로베르토가 다가오면서 김성빈 코치가 축구부원들을 모았다.

로베르토의 뒤에는 오늘 경기 상대인 신영 중학교 축구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우리가 얘기하는 동안 인사를 나누고 안내를 해준 모양이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경기할 수 있도록 운동복도 입고, 축구화도 갖춰 신은 채였다.

그들 중 몇몇은 수시로 로베르토를 쳐다봤는데, 외국인이라서 신기해서 그럴 것이다.

“자자, 인사해라.”

도착한 로베르토의 말에 윤태상의 손짓에 맞춰 다 같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더 큰 목소리로 돌아온 대답에 노태신이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윤태상에게 눈짓했다. 윤태상도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한번 손짓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신영 중학교 축구부 측에서 또 한 번…….

“그만, 그만, 시간 없으니까 적당히 해.”

인사하려고 하는데 로베르토가 막았다. 신영 중학교의 감독이 웃으면서 자기 축구부원들을 만류했다.

“롭 감독님 말이 맞습니다. 너희들도 그만하고 몸 풀어. 10분 후에 바로 경기 들어간다.”

“네!”

신영 중학교의 코치와 축구부원들이 이동해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너희는 집합. 김 코치님?”

“예. 가져왔습니다.”

김진호가 화이트보드를 들고 와서 로베르토 옆에 섰다.

“몸은 푼 거로 안다. 맞지?”

“예!”

김성빈과 윤태상이 주도해서 방금 잡담을 나누기 전까지 몸을 풀었다.

“그럼 선발 명단을 발표하기에 앞서…….”

로베르토가 날 바라보았다. 로베르토만 볼 수 있게 작은 미소를 지었다.

로베르토가 한숨을 쉬었다.

방금까지 노태신이나 나나 윤태상이 의견을 내도, 나를 제외하면 막상 경기장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그동안 해오던 방식 때문이었다.

이 시대에서 축구 하는 학생들은 감독이 시키는 것 외의 플레이를 했다가 다들 혼쭐이 난 경험이 있다.

그래서 로베르토에게 미리 부탁했다. 지시 좀 해달라고.

“먼저, 앞으로 친선경기의 방침을 얘기하겠다. 이 기준은 친선경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을 테니 명심하도록.”

축구부원들은 고개 하나 흔드는 사람 없이 알베르토의 말에 집중했다.

“전지훈련 때와 똑같다. 친선경기에서는 훈련에서 익혔던 걸 위주로 무조건, 과감하게 시도한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공격적으로 나가도 된다. 그러다 친선경기에서 대패하면 내가 책임진다. 알겠나?!”

“예!”

“……예!”

힘찬 대답과 늦은 대답이 뒤섞여 들렸다. 나중에는 다 힘찬 대답으로 변할 것이다.

로베르토는 개의치 않고 선발 명단을 부르기 시작했다.

“원톱 공격수 노태신, 왼쪽 윙 박종혁, 오른쪽 윙 티알, 중앙 미드필더 윤태상, 중앙 미드필더 박범철.”

아까 친구들에게 재미있게 하자는 얘기를 한 이유는 선발 명단을 알고 있어서였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말이다.

“태상이는 공격수처럼 적극적으로 올라가고, 범철이는 태상이 움직임을 보완해 주는 방향으로 움직여.”

“예!”

“알겠습니다!”

로베르토는 이제 내 이름을 시작으로 수비진의 이름을 적엇다.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 송현준, 왼쪽 풀백 엄태영…….”

골키퍼까지 다 말한 로베르토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송현준, 너는 항상 수비진과 공격진 사이에 머무르면서 양측을 조율하는데 신경 써라. 나머지 멤버는 훈련 때 했던 대로 하면 된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감독님.”

힘차게 대답한 후에 로베르토에게 말했다. 다른 축구부원들의 의문 섞인 시선을 보내든 말든 할 말을 계속했다.

“볼 지킬 때 좀 더 오래 공을 잡고 있어도 되나요? 공격수들이 수비진 복귀하는 시간이나, 상대가 다 내려앉았을 때 공격 라인 다잡으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그때 보여드렸던 것들을 해보고 싶어서요.”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어필해도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도 했고, 지금 로베르토가 또 한숨을 쉬는 것처럼 미리 짜놓은 대화이기도 했다.

한숨에 축구부원들이 긴장하거나 내게 불안한 시선을 보냈지만, 로베르토가 한숨을 쉰 이유는 짜인 각본처럼 말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거다.

100년을 넘게 봐 왔는데 로베르토의 심정을 내가 모를 리가 없다.

“좋아, 맘대로 해봐.”

“예!”

* * *

<꺄아아아!>

<오오오오!>

여학생들의 비명과 남학생들의 감탄하는 소리에 힘이 더 끌어오른다.

신영 중학교 미드필더 두 명이 동시에 압박이 들어와서 볼 롤로 빠져나오고, 옆과 뒤에서 태클이 들어오자 드래그백에 이은 방향 전환으로 사뿐하게 피한 성과였다.

신영 중학교 축구부원들이 허탈함에 욕설을 내뱉는 게 들렸지만, 개의치 않고 공을 가지고 전진했다.

내가 공을 소유하면서 시간을 끄는 사이 우리 공격진은 훈련 때 했던 것 중 하나인 부분 전술을 선보이고 있었다.

노태신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수비수를 끌어내면서 다른 축구부원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태신 선배!”

노태신에게 패스하면서 노태신 앞쪽으로 달렸다. 노태신은 자길 쫓아온 상대 수비수를 등진 채로 공을 받았고, 내 쪽으로 굴려줬다. 동시에 윤태상이 노태신이 수비수를 끌고 나온 자리로 달리고 있었다.

“태상! 선배!”

공을 잡아두지도 않고 바로 때렸다. 공은 사람 하나 키 정도로 낮게 뜬 채로 날아가 윤태상이 달리는 앞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윤태상은 터치로 공을 앞으로 보내고, 슈팅을 위한 도움닫기에 들어갔다.

뻥!

“아아아!”

“태상아! 그것도 못 넣냐!”

“죄송합니다!”

박범철의 탄식, 노태신의 일갈, 윤태상의 사과가 이어졌다. 일대일 찬스니까 슈팅 파워보다 정확도를 생각하는 판단도 나쁘지 않았다. 슈팅도 괜찮았다. 상대 골키퍼가 우측에 쏠려 있으니까 왼쪽으로 감아 찼다. 윤태상은 오른발잡이였지만, 왼발도 상당히 잘 썼다.

문제는 상대 골키퍼였다.

신영 중학교 축구부의 1학년 골키퍼, 공현성.

공현성을 보면서 내 옆을 지나가던 노태신에게 말했다.

“쟤 키 되게 크네요.”

“그러게. 솔직히 방금 무조건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막네. 기술도 좋아 보인다.”

신영 중학교는 창설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전국대회 본선에 올라가 본 적 없는 명성 없는 팀이었다.

그렇지만,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해보겠다고 전국을 방방곡곡 누비며 상당히 괜찮은 유망주 셋을 데려왔다. 공격수 두 명에 골키퍼 하나.

공격수 두 명은 프로레벨까지 살아남을 정도로 훌륭한 재목이었다. 근데, 골키퍼는 좀 달랐다.

3학년 선배들에게까지 당당하게 수비 위치를 지정하는 모습. 고릴라 같이 생긴 외모에 눈에 띌 정도로 긴 팔.

녀석은 중학교 1학년 주제에 키가 무려 185㎝였다.

그리고 공현성 저 녀석은 나와 몇 번 같은 프로팀에서 뛰기도 했고, 국가대표에서도 자주 보던 사이였다.

한마디로 전국구 재능이라는 말이다.

골키퍼로 전향한 지 1년밖에 안 돼서 명문 중학교에서 데려가지 않았지만, 공현성은 곧 두각을 나타낼 것이다.

전생에서 사이는 좋았다.

웃음이 나왔다. 이번 인생에서 만난 골키퍼 중 가장 강한 상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