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22화
“오후 훈련은 빠져.”
“예?”
“빠지라고.”
로베르토의 단호한 말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몸짓을 했다.
하지만, 이유는 알고 있었다. 내가 토요일에 무리를 했기 때문이었다.
“설명해 주마.”
어제부터 오늘 오전까지는 회복 훈련 위주였지만, 곧 시작할 오후 팀훈련은 중간 이상의 강도로 할 거라는 로베르토의 설명이 이어졌다.
“알겠어요…….”
“불만 있냐?”
“없습니다…….”
훈련을 못 하게 되니 기운이 빠졌다. 학교 사람들이 친선경기를 열심히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의욕이 들끓었는데 다 허사가 돼버렸다.
로베르토가 불쌍하다는 듯한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툴툴거렸다.
“앞으로는 무리하지 마. 알겠어?”
“네, 네. 명심할게요. 그…… 음…….”
혹시나 하는 기대에 로베르토를 약간 올려다봤다. 이제 키가 점점 비슷해지고 있었다. 로베르토는 악마처럼 보이는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기대 하지 말고. 훈련 빠지는 건 안 바뀌어.”
“아…….”
“대신, 이사장님한테 가 봐.”
“이사장님이요? 왜요?”
“나야 모르지. 아무튼 우리 훈련해야 하니까 방해하지 말고 빨리 가.”
“예…….”
로베르토가 시무룩해진 날 보면서 웃었지만, 투덜거릴 기운도 없었다.
로베르토에게 꾸벅 인사하고, 이사장실을 향해 힘없이 걷기 시작했다.
* * *
“어쩐지, 평소보다 더 잘해서 소름이 끼쳤는데, 너도 애 같을 때가 있구나.”
시무룩해진 날 보면서 이사장 박영대가 껄껄거리면서 다가왔다. 이사장의 손에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자, 먹어. 몸에 좋은 거야.”
“감사합니다.”
달달한 천마차였다. 당은 몸에 좋지 않지만, 스트레스 받는 게 더 안 좋다. 가끔은 먹어줘야 한다고 자기 세뇌하면서 차를 홀짝였다.
“맛있네요.”
“그렇지?”
이사장이 재밌다는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로베가 많이 화냈냐?”
“심하게는 아니고, 어이없어 했어요.”
“아하하. 그렇구만.”
그렇게 말하던 이사장이 갑자기 우울한 얼굴을 하며 힘없이 말했다.
“나는 혼났는데…….”
“예?”
갑자기 무슨 소린가 해서 입에 갖다 대던 찻잔도 멈추고 물었다.
“교장한테 혼났다…….”
“예에?”
“그게 말이다…… 이번에 특별활동부를 이용해서 친선경기를 꾸며보겠다는 계획을 아침 회의 때 교장한테 말했는데…….”
교장 선생님은 이사장님과 20년 넘게 함께했기에 친했다.
그렇다 보니, 아주 대놓고 이사장님에게 따졌단다. 분노가 가득 차올라서 새빨개진 얼굴로, 학부모들한테 항의 들어오면 어떻게 할 거냐를 시작으로, 교육청에서 뭐라고 하면 어떻게 대답할 거냐고 조목조목 얘기하며 몰아붙였다고 한다.
뭣보다, 그렇게 자주 열면 이사장의 욕심 때문에 부활동이 싫은 학생들도 강제로 참가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질지도 모른다고 진심으로 항의했다고 한다.
맞는 말이었다. 이사장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면서 잘못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 학기에 두 번밖에 못 한다…….”
이사장이 나보다 더 시무룩했다. 방금까지도 재밌어하던 양반이 감정 기복이 크다.
감정은 상대적인 것, 이사장을 위로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교장 선생님이 맞는 말을 하셨네요.”
“그렇지……?”
이사장이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두 번이나 하잖아요.”
이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그건…… 맞지!”
“다음 주라도 확실하게 즐겨 보죠!”
“오오!”
이사장이 금세 기운을 차렸다. 참 쉽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를 좋아하니까 이렇게 순수할 수 있구나 싶어서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면 중간, 기말고사 전 가벼운 이벤트 느낌이려나…… 이런 방식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현준아, 아직 로베한테는 못 물어본 건데…… 선생님들이 경기 영상 같은 게 있냐고 물어봤거든.”
“그거요. 코치님이 친선경기마다 카메라 설치해서 동영상으로 찍거든요. 이번 경기도 파일은 있을 거예요.”
이사장이 갸웃했다.
“카메라를 설치한다고? 못 봤는데?”
“그럴 거예요. 학교 옥상에다가 설치하고 찍었을 거거든요. 위에서 내려다본 움직임이 중요하다고 감독님이 그러셔서.”
“아…… 그러면 축구 하이라이트 같은 영상은 없겠네?”
차를 마시면서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사장은 아쉬운 기색이었다.
“동영상 찍을 수 있는 카메라는 비싸지…… 근데 그런 게 있어야 맛이 더 살 거 같은데…… 네 말 듣고 아들 도움받아서 열심히 찾아봤거든. 경기 중에도 막, 기자들이 옆에서 계속 촬영하잖니.”
“그렇죠.”
“그러면 개인 카메라나 휴대폰 가져와서 근접 사진 찍는 걸 허용하면 어떨까?”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이사장의 표정은 정말 해맑았다.
그래서 안 된다고 얘기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수업 시작 전에 휴대폰 싹 걷거나 가져오지 말라는 선생님들도 있는데…… 교장 선생님이 화내시지 않을까요…….”
나야 그렇게 하면 좋긴 한데, 규정상 어려울 것 같았다.
이 시절부터 휴대폰을 가져오는 학생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우리 반에도 절반은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규정도 중구난방이었다. 우리 학교는 담임 선생님마다 대처가 미묘하게 다른데, 보통 조회 시간에 걷고, 집에 갈 때 돌려주는 방식을 택했다.
어떤 반은 휴대폰을 가져오기만 해도 압수당한다고 했다.
“음, 어떻게 잘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사장은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또 교장 선생님한테 혼날 게 보였지만, 명복만 빌어줬다.
아무튼, 밝은 이사장의 얼굴을 보니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일이 순조롭게 잘 흘러간다는 게 느껴졌다.
이 주일마다 못한다는 게 개인적으로 아쉬웠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친선경기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즐길 수 있는 게 두 번 생겼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차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봐도 될까요.”
“뭐 하게? 사실 로베가 널 한 시간 정도는 잡아두고 있어 달라고 했거든.”
“역시나…….”
내가 몰래 훈련을 할까 걱정했나 보다. 하지만, 괜찮다. 갈 곳이 있었다.
“여기 오는 길에 선배님들이나 친구들이 친선경기 준비하는 것 좀 도와달라고 했거든요.”
“그런 거면 괜찮지! 가봐!”
“예!”
이사장에게 씩씩하게 대답하고, 기분 좋게 이사장실을 나왔다.
* * *
“어떻게 만들어야 하냐? 좀 알려주라…….”
친구 송시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방문한 곳은 사진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컴퓨터실이었다. 나는 컴퓨터실에 들어오자마자 그들 사이에 끼어서 마음고생을 들어야 했다.
경기 안내 포스터를 대체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대단한 창작물을 바라는 게 아니었기에 쉽게 얘기했다.
“인터넷에서 축구 포스터, 야구 포스터라고 검색해 봐도 좋고…… 아니다. 차라리 영어로 스포츠 포스터, 풋볼 포스터 이런 식으로 검색해보세요. 영어로 검색하면 자료가 더 많이 나와요. 몇 개 더 적어드릴게요. 돈 벌 목적이 아니니까 비슷하게 베껴도 돼요.”
검색 키워드를 아예 하나하나 적어줬다.
혹여나 직접 창작하고 싶은 부원들도 있을까 봐 덧붙였다.
“참고하기 싫으시면 마음대로 만드셔도 돼요. 대신, 꼭 들어가야 하는 건 경기 장소, 날짜, 시간, 그리고 경기와 관련된 사진이에요. 그림도 좋은데 사진부니까…….”
“오오.”
“시환아 네 친구 쩐다. 뭔가 똑똑해 보여.”
송시환이 괜히 부끄러워했다. 그 덩치로 그러니까 징그러웠다.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녀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현준아, 그러면 이런 것도 알아? 축구 용품들 사진도 찍어보고 싶은데…….”
송시환에게서 시선을 떼고 친절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궁금한 게 많다는 건 관심이 있다는 의미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잠시 후, 컴퓨터실 문을 열고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했다.
“찾았다! 우리도 도와줘!”
사진부의 누군가가 얘길 한 건지, 다른 부의 선배들이 찾아왔다. 훈련이 끝날 때쯤에는 운동장으로 오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금방 갈 것 같다.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다행히도 궁금한 게 있는 사람들은 아예 컴퓨터실로 찾아왔다. 다들 적극적이라서 기분 좋게 얘기해 줄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안녕.”
“어, 안녕.”
김채아의 친구인 김혜진과 정은영이었다.
이들은 친구의 친구. 살짝은 어색한 사이인데 밝게 인사할 수 있는 뭐 그런 관계다.
“선배가 물어보고 오래서 왔는데…….”
김혜진은 야구장 치어리더처럼 춤을 춰야 하는 거냐고 물어봤고, 나는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 된다고 말했다. 경기 사이나 전 공연은 그냥 공연이다. 너무 늘어지지만 않으면 된다. 상황에 따라 그런 것도 괜찮긴 한데 헷갈리니 그렇게 정리했다.
“너는 왜 왔어?”
“나? 그냥 혜진이 따라왔는데. 우리 독서부는 아무것도 안 한대.”
정은영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마침 어제 김채아와 전화해서 그런가 둘을, 정확히는 김혜진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경기 때 네가 얼마나 잘했으면 혜진이가 감격을 하냐고 툴툴거렸었지.
김채아는 다다음 주에 휴가를 받았다고, 친선경기 구경을 올 거라고 말했다.
친선경기를 더 열심히 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거나 다름없었다.
“경기 안내 책자는 좀 다르게 가면 좋을 거 같아요. 축구의 기본적인 규칙 같은 건 일반적으로 안 적는데…… 이번엔 해도 될 것 같거든요.”
“내용 많아지겠네. 좋다.”
신문부 사람을 마지막으로 얘기를 마치니 훈련 시작하고 두 시간이 넘게 흘러 있었다.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것 같았다. 훈련이 끝날 시간이었다.
“죄송해요.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고마웠어~.”
사진부 사람들은 다른 부 사람들이 와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정보 선생님이 허가해 준 덕에 컴퓨터로 구형 포토샵을 만지느라 대부분 컴퓨터만 보고 있었다.
나는 반 친구 송시환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송시환은 눈을 부릅뜬 채로 툭 튀어나온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나 간다.”
“어? 벌써?”
“응, 너희도 가야 하는 거 아냐? 지금 다섯 시 넘었는데…….”
“으악?!”
“정말이네.”
“컴퓨터 학원 늦었다!”
내 말을 트리거로 시간을 확인한 사진부원들이 아우성쳤다.
“아무튼 나 가볼께.”
“어, 땡큐, 이거 근데 내년에도 하려나?”
송시환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모르지.”
“내년에도 했으면 좋겠다.”
“왜?”
“꽤 재밌는 거 같거든. 아직 하루밖에 안 됐지만.”
송시환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래? 그러면 좋겠네. 가볼게.”
“어~ 내일 봐~ PC방 가기로 한 거 잊지 말고.”
“오케이.”
대화를 마무리 짓고 컴퓨터실을 나섰다.
묘한 기분이었다. 왜냐면 내년에 나는 이 행사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학교는 다니겠지만, 프로 생활을 병행할 계획이라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뭔가를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다 같이 만드는 아마추어 축구 경기라…….”
전부는 불가능하겠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게 내 바람이다.
많은 사람 덕분에 즐겁게 축구하고, 그들도 뭔가를 얻어가면 좋겠다.
그걸 위해서는 내가 축구를 잘하는 게 먼저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운동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