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24화
“와, 진짜 죽겠다. 너 너무 과식한 거 아니냐?”
오랜만에 만난 조기축구회 아저씨들은 나와 로베르토를 열렬히 환영했다.
내게는 온갖 쌈을 싸 와서 먹여줬고, 로베르토에게는 술을 권했다. 그것도 번갈아 가면서, 계속.
내 배는 빵빵해졌고, 로베르토의 얼굴은 빨개졌다.
그래서 우리는 아저씨들의 야유를 들으며 가게 밖으로 도망쳤다.
“좀 많이 먹긴 했는데…… 괜찮아요. 쌈장 같은 게 너무 많이 들어간 거 같으면 빼고 먹었으니까.”
각종 채소에 고기를 넣어 만든 쌈은 의외로 건강식이다. 소스만 잘 조절하면 의외가 아니라 완벽한 건강식이고.
“그러냐.”
“저 걱정할 때에요? 얼굴이 진짜 빨간데.”
가로등의 주황빛이 로베르토의 얼굴을 비추고 있다지만, 로베르토의 얼굴은 그것 이상으로 지나치게 빨갰다.
“어우, 힘들다.”
로베르토가 길 한복판에 주저앉았다. 그 옆에 쪼그려 앉았다.
“적당히 받지 그랬어요.”
“오랜만에 본다고 계속 주는데 어떡하냐.”
로베르토가 깊게 숨을 내뱉었다. 하얀 김이 살짝 보인다. 로베르토의 몸도 뜨겁고 날씨도 슬슬 쌀쌀해지고 있었다. 가을이 됐다는 게 느껴졌다.
로베르토는 계속 심호흡했다. 나는 옆에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친선경기가 안 잡히는 유력한 가설에 관해서 얘기하고 싶은데, 로베르토가 생각보다 취해서 말하기가 애매해졌다. 전생 덕분에 로베르토가 취하면 감정이 풍부해지는 타입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할 말 있는 거 아니야?”
“아, 뭐.”
로베르토는 눈치가 빨랐다. 아니, 내가 너무 티를 낸 건가.
“뭔데, 말해봐.”
괜히 지금 말했다가 회식 덕에 좋은 기분을 망치면 어떡하냐는 생각과 하루라도 빨리 말해주는 게 좋지 않겠냐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라서 머리가 아팠다.
로베르토는 그런 날 보더니 엉뚱한 착각을 했다.
“오오~ 웬일로 심각하냐? 너도 드디어 학생답게 연애 고민 같은 거 얘기하려는 건가!? 조언은 확실하게 해줄 수 있지. 그때 걔지? 맞지? 키 큰 애?”
“아니거든요!”
목소리를 높였다가 이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얘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친선경기 안 잡히는 것 때문에요.”
“응?”
“그거…… 지상철 전 감독 때문일 수도 있어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로베르토가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말을 보충했다.
“저도 2년 전에 축구 했어서 대충은 알거든요. 지상철 그 사람 이 지역에서 인맥이 꽤 좋아요. 초등학교 시절에도 몇 번 본 적 있어요. 선수 빼간 거 보면 축구부에 앙심이 있을지도 모르고요.”
전생에서는 없었던 일이었기에 조심스러웠다.
로베르토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궁금해서 가만히 지켜보는데, 의외로 크게 화내진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말없이 있다가 천천히 이야기했다.
“에이, 설마, 나 그 사람 얼굴도 모르는데? 이름도 모르고……. 그 사람도 마찬가지겠지. 근데 굳이 일일이 다 전화해서 우리랑 친선경기 잡지 말라고 한다고? 굳이?”
진짜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라 화도 안 나는 것 같았다. 거기에 내 말은 추측일 뿐이기도 하고. 얼굴이 빨개진 거에 비하면 술이 덜 취한 모양이었다.
근데, 내가 아는 지상철이라면 충분히 그럴 사람이었다. 이번 생에서는 덜 엮여서 좋았지만, 안 좋은 기억들은 지금 당장 떠올릴 수 있다.
-야, 송현준, 그것밖에 못 뛰냐? 무릎이 아프긴 뭘 아파, 엄살은. 악으로 깡으로 뛰란 말이야. 내가 네 나이 때는 다 그랬어.
첫 번째 전생에서 들었던 말이다.
저 말이 머리 깊게 박혀 있어서 정말 내 의지가 문제인 줄 알고 두 번째 전생에서도 비슷한 중학교 생활을 보냈고…… 또 개고생하고…….
로베르토를 만나서 진짜 문제가 내 급격한 성장과 내 신체 능력에 비해 뒤떨어지는 무릎 내구도 때문이라는 걸 깨닫고 얼마나 억울했던가.
그때의 울분은 지금도 얼마든지 꺼내 쓸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많이 쪼잔한 사람이에요. 축구부원들도 그래서 빼간 걸 걸요? 진현 중학교는 걔네 안 데려가도 원래 강한 팀이에요.”
“에이…… 그건 좀 비약 아니냐?”
로베르토는 여전히 덤덤했다.
“자기가 잘 쓰던 선수들 빼가는 건 흔한 일이잖아? 짜증 나긴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아, 문화차이.
뭐부터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로베르토는 날 빤히 바라보다가 주머니를 뒤적거려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래도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이유가 있겠지. 그 양반한테 한번 전화해 볼게.”
“예? 갑자기요? 뭐라고 하려고요?”
내가 당황하건 말건 로베르토는 태연했다.
“김진호 코치님한테 들었는데 진현 중학교가 대전에서 가장 잘하는 팀이라면서? 전국대회 8강 단골이라던데. 그러면 친선경기 한 번 해달라고 매달리는 척해보면 되지.”
급발진 같아 보였지만, 의외로 맞는 말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네요.”
“그렇지?”
로베르토는 씩 웃고, 핸드폰을 열어서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지상철의 번호를 찾는 거 같았다.
내가 빤히 바라보고 있자, 로베르토가 부연 설명을 했다.
“영대 형님이 인수인계 같은 게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번호를 줬거든.”
이사장이 번호를 줬구나.
“통화한 적은 있어요?”
로베르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부임 초기에 축구부원들을 데려간 거…… 이해는 가는데 솔직히 귀찮고 짜증 났거든. 그래서 전화하면 괜히 얼굴 붉힐 거 같았고……. 어차피 새 판을 짤 계획이라 크게 상관도 없었어.”
“아아.”
“선수 관련 자료가 있으면 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마침 김진호 코치님이 도와줘서 괜찮았고. 그래서 연락한 적 없어.”
“그렇군요.”
더 편하게 일하라고 내가 김진호의 메일로 보내준 게 그런 도움이 되다니, 다행이었다.
“찾았다.”
그때, 로베르토가 휴대폰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댔다. 희미하게 들리는 수신음에 괜히 긴장되기 시작했다.
이번 생은 다를지도 모르는데 괜한 사람 의심한 걸 수도 있으니까. 내가 겪은 바로는 아주 가끔, 나쁜 사람도 다른 생에서는 착한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었다.
전생에서 로베르토를 처음 만난 이후에는 지상철과 동선이 크게 겹친 적이 없었기에 더 찝찝해졌다.
로베르토가 내 팔을 툭툭 쳤다.
“너도 들려줄까?”
“그래도 돼요?”
“뭐 어때, 받았다. 쉿.”
로베르토는 소리를 키우면서 검지를 자기 입술 위에 댔다. 익숙한 목소리가 길거리에 울려 퍼졌다.
-누구세요.
로베르토가 목을 가다듬고 자기소개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의 뒤를 이어 대영 중학교 감독을 맡고 있는 로베르토 그릴로라고 합니다.”
잠깐의 침묵 후에 지상철이 대답했다.
-……아아, 알지. 들은 대로 한국어가 유창하구만.
“어머니가 한국분이시라서요.”
-그래? 근데 한국어만큼 한국 문화는 잘 모르나 봐? 전임 감독이면서 업계 선배한테 진작 한번 연락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
에라이, 전생과는 다를 수도 있다는 가정 취소다.
로베르토의 표정이 구겨졌다. 속으로 축구부 망치고 간 놈이 뻔뻔하다고 생각하면서 가만히 있었다.
로베르토가 날 보더니 웃었다. 고개를 젓는 게 화내지 말라고 하는 거 같았다. 나도 화난 표정을 하고 있었나 보다.
로베르토가 심호흡하더니 말했다.
“죄송합니다.”
로베르토 나름의 사회생활이라고 해야 할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당장은 끼어들지 않았다. 친선경기를 부탁하는 사람이 화를 내는 것도 이상하고.
-깔끔하네. 그래서 왜?
“진현 중학교와 친선경기를 하고 싶습니다. 가능할까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웃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낄낄거리는 간신배 같은 웃음소리에 기분이 불쾌해졌다. 로베르토의 얼굴도 점점 일그러진다. 혹시나 했던 가정이 점점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뭐야, 아직도 모르고 있었어?
“무슨 말이죠?”
-친선 경기 말이야. 주변 학교랑 못 잡아서 나한테 전화한 거 아니야? 금방 눈치챌 줄 알았는데, 젊고 능력 있는 감독이니까.
“무슨 소리죠.”
-답답하네, 내가 그랬으니까 아는 거 아니야.
로베르토가 어이없다는 듯 침음성을 냈고, 나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 정도로 솔직하게 얘기할 줄은 몰랐다.
로베르토가 벌떡 일어났다.
“왜요?”
-아까 말했잖아. 예의가 없길래 꼬장 한번 부려봤어.
예의는 무슨. 그냥 후임 감독이 잘한다는 소문 들으니까 배알이 뒤틀린 거겠지. 안 봐도 훤하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계획을 세우려고 머리를 쓰려는데.
“참나, 어이가 없네. 야.”
로베르토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로베르토의 얼굴이 더 빨개져 있었다.
아, 이제 제대로 취한 거구나.
-……뭐? 야?
지상철도 당황했는지 대답이 늦었다. 로베르토가 빈정대기 시작했다.
“축구부 관리도 못 해, 성적도 못 내, 그렇게 짤린 다음에 주전 선수까지 데려가. 근데 거기에 꼬장까지 부린다고? 속이 얼마나 좁은 거야? 나 참, 어이가 없네.”
-자, 잠깐. 뭐라고 했냐?
“짜식아, 너 능력도 없고 속도 좁다고.”
나조차도 뇌정지가 왔다가 다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인맥이 중요한 축구계 특성상 괜찮을까 싶은 걱정으로 시작해서, 어차피 내가 유럽에 갈 때 로베르토도 함께 넘어갈 계획을 세웠기에 괜찮겠다는 생각까지 도달했다.
내년에 좋은 성적 만들면 이력서에 남는 한 줄도 괜찮을 거고.
음, 아무리 생각해도 지상철을 적으로 만들어도 나쁠 게 없었다.
그래서 즐기기로 했다.
-이, 이익.
“말 좀 그만 더듬어. 그리고 너 지금 어디 있냐?”
평소에 착한 형이라 그렇지 로베르토는 꽤 성격 있는 사람이었다. 전생의 전국대회에서 내가 고의적인 백태클을 당했을 때 심판과 상대 감독에게 걸어가서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퇴장당했던 게 생각난다. 좋은 기억이다.
-너? 너? 이게 계속 반말하고 지랄이야…… 니네 나라에선 선후배도 없냐?
“모르는 사람끼리 뭔 선후배야. 헛소리 그만하고 어디냐고.”
-이, 이 새끼가…….
“말을 할 줄 모르냐? 말을 몇 번을 더듬는 거야. 들어줄 테니까 천천히, 심호흡하고 말해봐.”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찌질한 놈아.”
지상철이 드디어 얘길 시작하려는 데 로베르토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바로 다시 전화가 왔지만, 로베르토는 받지 않고 날 보면서 키득거렸다.
웃으면서 물어봤다.
“그래도 돼요?”
“몰라, 술김에 저질렀어. 짜증 나잖아. 어차피 말 통할 상대도 아닌 거 같고…… 화풀이 잘했다.”
로베르토는 마치 한 달 만에 목욕한 사람처럼 개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게요. 잘했네요. 축구부 애들도 다 저 감독 싫어하더라고요. 경기나 훈련 때 못하면 자꾸 때린다고.”
사실 제대로 얘기한 적은 없었지만, 전생의 기억으로 대충 말했다.
웃던 로베르토가 정색했다.
“때려? 인간 말종이었네.”
네 번째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로베르토가 전화를 받았다.
“무능력자 인간 말종아.”
-야! 이…….
또 끊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로베르토가 늘 취해 있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 어떡하냐 현준아.”
로베르토는 아예 핸드폰을 꺼 버리고 화제를 돌렸다.
“뭐가요?”
“이번 주는 그렇다 치고 다음 주 친선경기는 어떡해? 학교 행사까지 잡혀 있었잖아. 영대 아저씨도 잔뜩 기대하고 있고.”
내부 친선경기로 이번 주는 때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지속된다면 한계가 있다.
내부 친선경기는 하기 편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다 아는 사이들끼리 경기를 계속하게 되면 플레이가 경직된다.
유소년 축구에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여러 팀과 붙어봐야 한다고 전생의 로베르토가 말했다.
나도 공감한다.
“생각해 볼게요.”
“아니야, 괜찮을 거 같아.”
“예?”
술에 취해서 그런가 오늘 로베르토는 대화 흐름을 자꾸 바꾼다.
“깨달았거든.”
“뭐가요?”
“이건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로베르토는 곧장 가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걸음을 빨리해서 로베르토의 옆을 따라가며 물었다.
“뭔 소리예요.”
“자, 나는 한국 축구계에 인맥이 없지? 이건 당연한 일이야. 내가 외국에서 왔으니까.”
“그렇죠.”
“근데 이번 문제는 인맥이 깊게 연관돼 있지?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에서 벗어난 거잖아? 팀끼리 붙거나 감독 역량으로 붙는 게 아니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도와달라고 해야지.”
“누구한테요?”
“한 학교의 이사장까지 할 정도로 지역에서 영향력 있고, 돈도 많은 사람한테.”
“아.”
회식을 하던 고깃집의 유리 벽 안에 거나하게 취한 이사장 박영대가 보였다.
로베르토가 당당하게 말했다.
“도움을 청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맞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