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25화
“아이고, 우리 로감독이랑 현준이왔어~?”
이사장 박영대가 환하게 웃으면서 우릴 환영했다. 발음이 살짝 꼬부라지는 게 술을 즐겁게 마신 것 같았다.
“앉아도 되죠?”
“당연하지~.”
로베르토와 나는 이사장 앞에 앉았다. 앉자마자 이사장 옆의 중년 남자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반갑다. 1학년 송현준 맞지? 조기축구회 언제 나올 생각 없니? 하필 내가 쉬고 있을 때 활동했다고 그래서…….”
“저도 아쉬워요. 선생님.”
“오? 내가 선생님인 걸 알아?”
“네, 높은 학년 국어선생님이시잖아요.”
방장환 선생님은 점잖고, 스포츠를 좋아하시다 보니 전생에서 몇 번 접점이 있어서 알고 있다. 적당히 친하고 무난한 사이였다.
“아하하, 공부도 잘한다더니 역시 똑똑하구나. 현준이 아버지는 좋겠어~ 똑똑하고 운동 잘하는 아들 둬서. 이거 부러워서 어떡해?”
방장환의 목소리는 점잖았지만, 울림이 있어서 가게 전체로 퍼졌다.
아버지가 기분 좋다는 듯이 술잔을 흔드셨고, 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부끄러운 건 어쩔 수가 없다.
다들 이어서 환호했고, 아버지가 주책을 부리는지 어머니의 잔소리가 이어 들렸다.
좋은 분위기다.
그 와중에 내 옆의 로베르토는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이었다.
환호가 지나가고, 로베르토가 이사장에게 말하기 시작해서 나도 고개를 뜰었다.
“그건 그렇고…… 이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뭐가 큰일이야~ 로감독이 있는데.”
이사장은 웃으면서 손사래 쳤다. 로베르토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로베르토가 또박또박 얘기했다.
“친선경기 상대가 없어졌어요. 이번 주도, 다음 주도, 아마 앞으로도 구하기 힘들어질 것 같아요.”
이사장이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왜?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지상철이 다른 감독한테 압박 주고 있대요.”
이사장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가를 대놓고 찌푸렸다.
방장환이 로베르토를 보며 물었다.
“지상철? 전에 감독하던 막돼먹은 놈 말하는 건가?”
평소 점잖은 신사 같이 말하는 방장환이었지만, 상황에 따라 악귀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중학교 선배들 사이에서는 이중인격이라는 별명까지 있을 정도다. 나한테 잘해주니까 별 상관 없는 별명이지만.
로베르토가 고개를 끄덕여서 대답을 대신했다.
이사장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로베르토의 말이 본격적으로 이해가 가기 시작한 것이다.
회귀자의 입장으로 봐도 로베르토의 대처는 아주 훌륭했던 것 같다.
“이, 이이익! 배은망덕한 놈이!”
이사장이 소리를 지를 정도로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즐거운 회식 분위기는 아쉽게도 끝나 버렸다.
“개자식이네!”
“와…….”
이사장이 왜 화냈는지 로베르토가 설명해 주면서, 지상철을 욕하는 분위기로 변질됐기 때문이었다.
이사장은 그 사이에서 가만히 얘길 듣다가, 이렇게 말했다.
“로 감독! 기다려 봐! 내가 당장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이사장실에는 나와 이사장, 로베르토가 테이블을 두고 둘러앉아 있었다.
숙소에 일찍 복귀하다 로베르토를 만났는데, 로베르토가 이사장실에 간다고 해서 따라왔다. 로베르토가 ‘네가 거길 왜 가’ 라고 말했지만, 밀어붙여서 왔다.
도움이 됐으면 했으니까. 될 자신도 있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아무튼, 이사장은 내가 온 것에 대해 별말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화가 나 있는 듯한 눈빛으로, 우리에게 마실 것을 준 이사장이 로베르토를 보며 똑바로 말했다.
“솔직하게 얘기하자고.”
“예.”
일단 얌전하게 있기로 했다.
“로 감독, 이사장이 있는 사립중학교라면 이사장한테 얘기해서 압박을 주면 돼. 그러면 내가 처리할 수 있어.”
“예.”
이사장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있다가,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이사장이 있는 학교만 있는 건 아니야.”
“공립학교요?”
이사장의 말을 거들어 줬다.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현준이가 잘 아는구나. 우리나라는 공립학교가 훨씬 많아. 이탈리아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사장이 자신의 턱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축구부가 있는 몇 학교 정도는 얘기해 봤긴 했는데……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될 것 같아……. 미안해 로 감독…….”
“그렇군요.”
결론은 해결이 안 됐다는 거다. 로베르토가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사장이 턱에서 머리로 양손을 옮겨 감싸 쥐었다.
“어제 회의에서 말이야, 선생님들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나와 로베르토는 이사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학생들이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 있대…… 선생님들도 재미있대…….”
보통 이런 축제의 초장기에는 자발적으로 하는 경향이 강해 분위기가 좋다.
이사장이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친선경기 상대가 없다고 어떻게 말하지……? 선생님들이 이번 주에 꼭 이기고 오라고 전해달라고 했는데…….”
“…….”
로베르토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우리 선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없나?”
이사장마저 로베르토에게 물어보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목을 가다듬었다. 로베르토가 어제 시간을 벌어준 덕에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
“저기, 제가 의견을 내도 될까요?”
“응, 그래.”
이사장이 힘없이 대답했고, 로베르토도 말없이 날 바라보았다.
“이사장님만 하실 수 있는 게 있을 거 같아요.”
“뭔데? 그리고 영대 아저씨라고 부르라니까.”
“왔다 갔다 하네요.”
가볍게 웃었다. 둘 다 입가만 웃었다. 웃을 기분이 아닌 모양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데?”
이사장의 질문에 천천히 대답했다.
“대전에서 안 되면 충청도, 아니면 더 넓게 전라도 쪽이나 경기도 쪽이랑 연락해보면 되지 않을까요?”
KTX가 등장하는 게 내년부터라 아쉬웠다. 그러면 더 넓은 범위를 커버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조심스럽게 내 의견을 말했다.
“신영 중학교랑 친선경기를 한 이유는 가깝고 잡기 편해서잖아요? 근데 이 가까운 게 걷는 게 아니라 다른 걸 이용한다면…….”
“음…… 그러니까, 교통수단이 있으면 괜찮지 않겠냐?”
“그렇죠.”
뱅뱅 돌려서 말하다가 답답해졌다.
잘못된 습관이었다.
난 지금 어리다. 중학교 1학년생이 할 수 있는 건 이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마다 버스 빌려주시면 안 돼요?”
돌직구를 던졌다.
버스를 빌릴 수 있다면 축구부원들이 원정 다닐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 홈경기를 할 때도 차가 없는 상대 축구부를 데려올 수도 있다.
시내버스나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있겠지만, 할 수 있다면 피로감을 최대한 줄이고 싶다. 결정적으로 상대 축구부를 우리 쪽으로 오게 할 메리트도 있어야 했다.
“막, 그쪽에서 우리 쪽으로 원정올 때는 버스 보내주고, 우리가 갈 땐 타고 가고…… 안 될까요? 일반적인 게 아니니까 이 정도는 해야 할 거 같아서요.”
비싼 건 안다.
이사장이 안 된다고 할 걸 대비해서 아르드의 신정우 사장과 거래를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모양새가 이상해진다.
세상에는 절차와 체면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어음…….”
“전지훈련 때처럼 말이에요.”
전지훈련 때도 이사장의 사비를 써서 버스를 일정 기간 대절해 용잠군으로 왔다갔다 했었다. 나중에는 여러 축구부가 소문 듣고 우리 훈련지로 찾아오긴 했지만, 첫 시작은 우리 돈 써야 한다.
“저기, 현준아.”
로베르토가 날 제지하려고 했다. 로베르토는 바로 비용을 비롯한 여러 문제를 떠올렸겠지.
“잠깐만, 로 감독. 기다려 봐. 생각 좀 해보자고.”
조금이지만 긍정적인 반응에 더 몰아붙이기로 했다.
“감독님, 엊그제 저 오후 훈련 금지했을 때, 제가 뭐 했는지 아세요?”
이사장의 대답을 안 기다리고 바로 말했다.
“반 친구들이랑 선배들이 불러서 특별활동부 사람들을 도와줬어요. 다들 친선경기 준비한다고 열심히 하니까 ‘외면’할 수가 없더라고요.”
외면에 포인트를 주면서 이사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특별활동날에만 해도 된다고 했는데…… 다들 ‘자발적’으로 열심히 하니까…… 신기했어요. 다들 공부만 하다가 막, 뭔가 다른 걸 하는 게.”
포인트는 감성이다.
이사장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봤다.
이사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계속 바라봤다.
더 흔들렸다.
“저기, 현준아…….”
“아, 죄송해요.”
로베르토가 또 한 번 날 제지해서 이번에는 일부러 고개를 숙였다. 중학생만 열한 번째다. 이사장을 만난 것도 여러 번이다.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머리에 설명서가 있는 수준이다.
그 순간.
“그래! 내가 해보마!”
고개를 들었다. 이사장이 로베르토를 향해서 이어 말했다.
“로 감독, 저번 전지훈련 때 이용했던 버스 기사님 번호 있지? 그거 나한테 알려줘 봐.”
“어…… 어어…… 예, 근데 김진호 코치가 가지고 있어서요.”
“그러면 이따가 알려줘. 그리고 현준아, 내가 해주마!”
이사장님은 참 좋은 사람이다.
“감사합니다!”
버스 장기 대여라니. 기사님이 좋아하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깎아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감독님, 친선경기 상대 말인데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이번엔 로베르토다.
“이제 알아봐야지.”
“그럴 필요 있어요? 감독님 인맥 있잖아요.”
“내가 인맥이 있다고?”
로베르토는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갸웃했다.
“나준하 감독님 있잖아요. 감독님을 되게 좋게 보시는 거 같던데.”
“아……!”
미처 생각 못한 건지 로베르토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해는 한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지역도 달랐기 때문이다. 뭣보다 나준하는 2002년 월드컵 영웅에 축구계에서 위상도 높은 편이었기에 부담도 됐을 거다.
근데 지금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이사장이 끼어들었다.
“나준하 감독? 나준하 선수님을 말하는 거야 지금?”
“당연하죠.”
“그러면! 일단 전화해 봐.”
내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이사장이 로베르토를 재촉했다.
“예?
“한번 얘기만 해보자는 거지. 친선경기 잡는 건 빠를수록 좋잖아?”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로베르토는 핸드폰을 꺼냈다.
시간은 어느덧 8시.
보통의 축구부라면 아침 훈련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너무 이른가?”
“아침 여섯시부터 전화해도 된다고 하셨었습니다……. 오히려 저녁 여덟 시 이후에 전화하지 말라고 했죠.”
번호를 받을 때 그런 말을 들었나 보다.
고민하던 로베르토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 번도 끝나기 전에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로베르토 그릴로입니다. 통화 가능하십니까?”
-오~ 로 감독~ 왜 이렇게 딱딱하게 말해? 당연히 되지.
“아…….”
로베르토는 순간 할 말이 생각이 안 나는지 머뭇거렸다.
-뭐야? 혹시 밥이라도 먹자고 전화한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 혹시 저희…….”
말이 잘 안 나오는 것 같았다.
나와 이사장은 옆에서 양손에 주먹을 쥔 채로 으쌰으쌰 응원했다.
로베르토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친선경기 할 수 있을까 해서요…….”
-친선경기? 왜? 대전에서 하면 되잖아.
“그게 그…….”
-뭔 일 있는 거야? 말해 봐? 혹시 외국인 감독이라고 따돌려?
“일이 없는 건 아닌데…….”
-말해봐.
적극적인 나준하의 태도에 로베르토는 당황해서 엉겁결에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전부 얘기했다.
옆 중학교랑 친선경기 일정 잡아뒀는데, 전 감독이 인맥으로 깽판을 쳐서 곤란하게 됐다고.
-뭐라고!? 그런 후레자식이 다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