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27화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성시건의 시선이 느껴졌다.
신경 쓰일 거다.
전지훈련 때 다섯 번의 친선경기를 했고, 총 전적은 우리가 2대 3으로 밀린다.
하지만, 성시건은 내게 시종일관 고통 받았다. 심지어 나는 전반전이나 후반전만 뛰었기에 성시건에게 총전적은 의미가 없을 거다.
성시건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명문 휘경 중학교에서 윙으로 뛰고, 유소년 국가대표팀에서는 공격수로 뛴다.
멀티 포지션으로 국내 최고라는 말이다.
늘 천재 소리를 듣고 살았을 거고, 처음에는 헤매도 결국에는 다 이겼을 것이다. 그러니까 저런 자리에 있는 것이다.
“야, 성시건이 자꾸 너 노려보는데.”
“알아. 근데 선배라고 불러.”
“우리끼린데 뭐 어때. 모르는 사이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에잉…….”
박종혁과 짧은 대화를 마치고 성시건을 슬쩍 봤다. 성시건이 언제 쳐다봤냐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신경 쓰일 거다.
국내에 적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1학년한테 철저하게 박살 났다. 얼마나 혼란스러워 하는지는 적당히 아는 사이인 노태신에게 전화해서 나에 관해서 30분 넘게 물어봤다는 것만 들어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야, 또 노려본다.”
“괜찮다니까. 오히려 좋아.”
노려본다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노려본다는 건 날 이기고 싶다는 거다. 지난 친선경기들에서도 그랬다. 성시건은 당황도 많이 했지만, 이를 악물고 발이라도 뻗어보려고 했다.
그 태도 때문에 더 철저하게 했던 거다. 같은 상황에서 좌절하는 사람이었다면 철저하게 하면 역효과만 나니까.
“오늘도 박살 낼 거야.”
“……너는 그럴 수 있겠지만 민우도 없는데 우리 어떡하냐…….”
박종혁이 울적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총전적 2대 3의 결과에는 이민우의 역할이 컸다. 한 경기는 내가 빠졌을 때 이민우가 대신 뛰어서 세 골 넣고 이긴 경기였으니까.
전생에서 본 적 없던 11대 11 축구에서 이민우의 모습은 경이로웠다.
브라질에 가자마자 테스트 겸 임시선수로 한 시간 뛰자마자 바로 정식 계약했다고 자랑하는 메일이 최근에 왔었다. 국제전화는 비싸다고 전화 못했다고 아쉬워했었다.
“걔도 잘 나가는데 우리도 열심히 해야지.”
“그건 맞지.”
이민우가 열심히 하는 만큼 나는 내 일을 해야 한다.
성시건은 2006년 월드컵부터 최소 3번은 같이 할 미래의 동료였다. 그러니까 오늘 경기에서도, 다음 주에도 철저하게 박살 낼 거다.
승부욕이 충만한 상태에서 자기 실력이 부족하다는 걸 인식시켜야 발전 단계로 넘어간다.
“자자, 다들 모여!”
우리는 김진호 코치 주변으로 모였다. 경기 시작 30분 전이라 몸을 풀기 시작했다. 10분 후에느 로베르토도 합류해서 패스와 코디네이션 훈련을 병행했다.
경기 시작 10분을 남기고 몸풀기를 끝내고 모여 앉았다. 휘경 중학교 운동장 스탠드에는 학생들이 몇 명 나와서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우리 중학교 친구들과 선배들이 생각났다.
오늘 선발로 뛰게 된 친구들에게 말했다.
“오늘 잘해서 기세를 꺾어놓자. 그래야 다음 주에 망신 안 당하지.”
“응, 열심히 할게.”
그렇게 말한 엄태영은 입술을 꾹 닫으며 의지를 드러냈고,
“당연히 열심히 할 거야…….”
적당히 친한 사이인 중앙수비수 김성주도 그렇게 대답했다. 티알과 박종혁은 전반전 명단에서 빠져 있었다. 티알은 아직 성장해야 하지만 박종혁은 주전이었기에 지금 멤버는 1.2군 정도 느낌이었다. 윤태상과 노태신은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감독의 동기부여도 중요하지만, 선수끼리 으쌰으쌰하는게 더 효과가 좋을 때가 많다.
“방학 때는 이길 때 대승하고, 질 때는 대패했었잖아……. 다음 주에 우리 운동장에서 대패하면 절대 안 된다고.”
엄태영의 눈동자가 커졌다. 김성주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러면 큰일 나지.”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선배들에게도 들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점차 진지해졌다.
“자, 다들 준비됐지?”
“예!”
평소보다 힘찬 대답에 로베르토가 흠칫하고, 작게 웃었다.
“좋아, 그 기세로 적극적으로 해라. 알겠지? 지난주처럼만 하면 돼.”
로베르토의 당근과 내 채찍, 축구부원들은 정신적으로 잘 준비된 상태로 경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 * *
경기가 시작하고 10분이 흘렀다.
“후우…… 후, 후우…….”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어렵게 토해낸 성시건이 팀원들을 둘러봤다.
하나같이 혼이 빠져 있었다.
성시건은 눈을 질끈 감으면서 경기 시작 전 축구부원들과 했던 대화를 떠올려봤다.
-얘들아, 잘하자. 진지하게 하자고.
-성시건 왜 이렇게 긴장했냐?
성시건의 진지한 말에 다른 부원이 장난스럽게 답했다.
-맞아, 브라질 용병도 없잖아.
휘경 중학교 축구부원들 사이에는 여유가 흘러넘쳐 보였다. 성시건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솔직히 이민우보다 송현준이 더 상대하기 막막했다.
모든 수를 읽고 차단당하는 무력감은 더 느끼기 싫었다.
하지만 그만큼 한 번 뚫어보고 싶었다.
-쟤도 있잖아.
-송현준? 쟤도 잘하긴 해. 근데 오늘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나온다던데. 감독님끼리 얘기하는 거 들었어.
수비형 미드필더일때가 더 무서운데.
성시건은 어디서부터 설명할지 막막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도 동감! 시건아, 난 죽을힘을 다해 뛸 거다. 송현준 쟤 한번 털어보자.
다행히 성시건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었다. 중앙 미드필더 우찬우였다.
-얘는 왜 이러냐.
-송현준이 또 이름 까먹었대.
-아…….
잠시 안타까워 하던 축구부원들이 하나둘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성시건도 마찬가지였다.
-개 웃기네, 이쯤 되면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냐?
-아니야, 이번엔 안 까먹겠다고 이름 외워놓고 얼굴을 못 알아보더라.
억울한지 씩씩거리는 우찬우를 보면서 성시건도 웃었다.
동시에 긴장이 풀리면서 굳이 심각할 필요가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혼자만 진지한 것 같아서 더 그랬다.
하지만, 10분이 흐른 지금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내 말 맞잖아. 다 같이 진지하게 해야 한다니까…….”
“뭐라고요?”
근처를 지나가던 송현준의 물음에 민망해진 성시건은 손을 내저었다.
“됐어. 뭐, 할 말 있어?”
“역시 선배님을 상대하는 건 어렵다고요.”
“뭐?”
“방금도 미리 준비한 거죠? 깜짝 놀랐어요.”
직전에 시도한 공격수와 미드필더 우찬우의 깜짝 전방 침투를 활용한 삼각패스 플레이를 말하는 거다. 친선경기가 잡혔다는 말을 듣자마자 따로 연습한 건데, 송현준은 우찬우의 침투를 예상했다는 듯 패스 경로를 완벽하게 막아냈다. 5일 연습했는데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막혀서 상대팀에게 역습 찬스까지 내줬다.
“시비 거는 거냐?”
“아뇨, 진지한데요?”
성시건은 눈을 찌푸렸다. 도발로 받아들이기에는 송현준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삐익!
휘슬과 동시에 골킥으로 경기가 재개됐다. 송현준과 성시건은 동시에 공 근처를 향해 달렸다. 얘기를 더 나눌 틈은 없었다.
“으랴아아!”
정두식이 이상한 함성을 지르면서 헤딩 싸움을 이겨냈다. 근처에 있던 박범철이 공을 받아서 송현준에게 넘겼다. 어느새 성시건의 마크에서 벗어난 송현준은 근처에 와 있는 윤태상에게 패스했다.
윤태상도 어느새 내려온 오른쪽 윙에게 패스하고, 오른쪽 윙은 언제부턴가 달리기 시작한 노태신에게 전진 패스를 넣어줬다.
“까비!”
패스가 좋지 않아서 어처구니없이 골키퍼에게 잡히긴 했지만, 군더더기 없는 팀플레이였다. 성시건은 그 과정을 보면서 10분 내내 왜 고생했는지 깨달았다.
이들은 어느새 다 움직여 있다. 그만큼 끊임없이 뛰는 것이다. 또, 그 움직임에는 한 달 전 이상으로 규칙성이 존재했다.
다들 표정은 진지했고, 열의가 넘쳐 보였다.
“얘네 대체 왜 이렇게 뛰는 거야?! 친선경기잖아!”
한 축구부원의 불평에 성시건은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송현준의 표정도 시종일관 진지했다. 이들은 친선경기도 진심으로 하고 있는 거다. 훈련도 그렇겠지. 그렇다 보니 이렇게 빨리 발전한 것이다.
“이익……!”
성시건도 이를 악물었다. 이기고 싶다고 말하긴 했지만, 스스로도 이걸 친선경기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패스! 패스 줘!”
성시건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중앙 미드필더가 패스를 줬다.
공을 받은 성시건이 급격하게 가속하면서 엄태영을 제쳤다. 그리고 그 뒤에는 돌파를 예상했다는 듯 송현준이 있었다.
“태영아!”
송현준이 그렇게 외치면서 잠시 성시건에게서 시선을 뗀 틈에, 성시건은 공 위로 발을 움직이며 스텝오버, 헛다리를 한 번 짚으며 왼쪽으로 돌파하려고 했다.
하지만 송현준이 그것보다 더 빨리 움직였다.
또 지기 싫다는 마음이 성시건을 지배했고, 그 순간 유럽 축구 경기에서 우연히 본, 혼자 연습해 왔던 개인기를 실전에서 처음으로 시도했다. 왼쪽으로 향하려던 공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플립…….”
왼쪽으로 중심이 쏠린 송현준이 외마디를 남기고, 성시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성시건은 오른쪽으로 돌파해 내면서 희열을 느꼈다.
“아.”
아까 자기가 제쳐낸 엄태영이 어느새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까지만.
무게중심을 되찾은 송현준이 멈칫한 성시건의 공을 가볍게 빼앗았다. 그리고 바로 전방으로 롱 패스.
이번에도 실패했다는 생각에 성시건은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잘했어. 한번 제쳐지더라도 팀원을 믿고 다음 위치를 커버하면 되는거야.”
“고마워.”
아까 송현준의 손짓은 엄태영의 움직임을 지시하는 거였나 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성시건은 억울한 감정이 치솟았다.
분명 일대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비겁한 거 아냐?”
성시건은 자기도 모르게 투덜거리고, 자기가 한심한 짓을 했다는 걸 바로 깨달았다.
비겁은 무슨, 축구는 애초에 팀 스포츠인데. 자기가 감정 때문에 욱해서 이런 말까지 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선배는 막기 힘들어서 도움을 받아야 하거든요. 방금 깜짝 놀랐어요.”
송현준의 어른스러운 대답에 자신이 더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깜짝 놀랐다는 말에 내심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미안, 더 제대로 할게.”
그래서 이를 악물었다. 송현준을 뒤로하고 빠르게 뛰어 수비하기 위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송현준은 성시건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