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28화
나준하가 테이블에 둘러앉은 모두의 잔에 술을 채웠다.
“마셔~.”
“감사합니다!”
로베르트를 포함한 다섯 명이 힘차게 대답했다. 대영 중학교와 휘경 중학교의 친선경기와 합동훈련이 끝난 후, 로베르토는 약속대로 나준하와 함께 술자리에 왔다.
평소에는 무난한 사람이 술자리에서 돌변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아르드 코리아의 통역 일을 하며 여러 사람을 겪어온 로베르토는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기우였다.
술자리는 즐거우면서 유익했다.
“아니, 좀 작게 말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잖아.”
나준하의 불평에 로베르토의 왼쪽에 앉은, 부산의 명문 고등학교 축구부 막내 코치라는 정지용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 선배님 보는 거겠죠. 아까도 사인 잔뜩 하셨잖아요.”
“작년을 좋게 생각해 주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그렇지 뭐…….”
나준하가 겸손하게 말하면서도 어깨를 으쓱했다. 그걸 놓치지 않은 정지용이 또 한 번 장난쳤다.
“솔직히 좋으시죠? 티 납니다.”
정지용은 속도가 장기였던 2부리그 선수였으나 골절로 은퇴하고, 나준하의 소개로 코치 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어? 들켰어? 와하하하! 사실 관심받으면 좋긴 해.”
나준하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로 농담을 받아넘겼다.
로베르토도 함께 웃었다.
이 테이블에는 고등학교 축구부 코치인 정지용을 비롯해 축구협회 직원, 스포츠신문 기자, 프로팀 스카우트가 있었다. 그들도 다 함께 웃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이들은 모두 나준하가 눈여겨보고 모은 사람들이었다.
모두 축구와 연관된 직업을 가지고 있고, 새내기부터 3년 차까지, 전부 경력이 짧다는 점이 특이했다.
주량이 소주 두 잔이라는 나준하는 첫 잔은 함께 마셨는데, 건배사로 이런 얘기를 했다.
-내가 볼 때, 앞으로 잘 될 거 같은 젊은 사람들만 모았어. 서로 알아두면 나쁠 거 없잖아? 난 말이지, 축구라는 산업은 선수랑 감독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각 분야 사람들끼리 소통이 잘 돼야 좋은 경기가 나오고, 함께 발전할 수 있단 말이야…….
나준하는 이 주제를 바탕으로 진지하게 꽤 긴 이야기를 했다.
로베르토도 많은 부분에서 공감을 했다. 가장 중요한 건 선수와 감독이 맞지만, 다른 직책들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걸 많이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한테 할 말이 있어. 힘든 일이 생긴다면 나한테 연락해라. 특히, 로 감독, 다른 나라 사람이니까 시스템적으로 막히는 상황이 틀림없이 있을 거야. 그럴 때 바로 연락하라고.
지상철 사건을 듣고 신경을 써준 걸 거다. 로베르토는 뭉클함을 느꼈다. 어머니가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로베르토의 외모는 영락없는 서양인, 한국말을 아무리 잘한다더라도 동떨어진 느낌을 자주 받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만큼 이렇게 자신을 받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더 큰 고마움을 느낀다.
“오오~ 로베~ 이탈리아 사람도 술 잘 마시네?”
“우리가 평소에 마시는 술은 이거보다 맛있고 세니까.”
“허세는?”
로베르토는 직업도 비슷하고 나이도 비슷한 정지용과 가장 편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과도 연락처는 다 교환했고, 얘기도 나눴다. 성격적으로 모난 사람이 없었고, 어떤 얘기를 해도 축구 쪽으로 흘러갔기에 나준하가 어떤 사람들을 좋아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때, 로베르토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프로팀 스카우트로 일하고 있는 30대 초반의 남자가 테이블 아래로 핸드폰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아까부터 주기적으로 핸드폰이 울리는 게 보였기에 급한 일이 있는 건가 싶어 로베르토가 말했다.
“계속 진동이 오는데 전화 받고 오셔도 됩니다. 저희 어디 안 가요.”
로베르토가 너스레를 떨며 얘기하자 주변 사람들이 웃었다.
스카우트 김영진이 미안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구단 전화가 올지도 몰라서 전화를 켜놓고 있는데, 자꾸 후배한테 문자가 와서…….”
“급한 걸지도 모르니까 받아야지.”
나준하도 끼어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만…….”
김영진은 양해를 구하고, 꾸벅거리면서 가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핸드폰을 열어 문자 상대를 보고 짜증 섞인 투덜거림을 내뱉었다.
“이 자식 아까부터 도대체 뭐야?”
[지상철]
아까부터 실업축구팀 후배였던 지상철에게 연락이 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전화 두 통이 왔는데 이건 얘기하느라 못 받았다.
지상철은 후배들의 군기를 유난히 잡았지만, 선배들에게만큼은 깍듯했다. 또, 노는 걸 좋아해서 심심하면 부르기 좋은 후배였다.
그래서 나준하가 지상철과 로베르토 사이에 있었던 일을 얘기해 줬을 때 김영진은 혼란스러웠다. 심지어 그 타이밍에 지상철에게 연락이 온 걸 확인했기에 연락을 하기 난감해서 그냥 뒀었다.
술자리가 끝나면 따로 얘기해 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복잡해 죽겠는데.”
하지만 지상철에게서 문자가 계속 왔다.
[선배, 전화 가능해요?]
[선배, 물어볼 게 있어요.]
10분 간격으로.
원래였다면 이렇게까지 연락이 온다면 걱정 한 번은 했겠지만…….
“으음…….”
로베르토와 지상철의 얼굴이 떠오른다. 생각이 정리가 안 돼서 지금 연락하고 싶지 않았지만,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김영진은 지상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을 들고 있던 건지 바로 전화가 연결됐다.
-선배!
“무슨 일 있어? 여러 번 전화했던데. 중요한 회식 중이었어.”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요.
“급한 일?”
급한 일이라는 말을 들은 김영진은 방금까지 짜증을 냈던 게 순간 미안해질 뻔했다.
“뭔데? 빨리 말해봐.”
-대영 중학교가 거기까지 친선경기 간 게 맞아요? 선배, 휘경 중학교 코치 하나 잘 알잖아요. 알아봐 줄 수 있어요?
“……?”
요즘 김영진은 온라인 게임을 많이 하는데, 인터넷 회선이 좋지 않아 게임이 자주 버벅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렉이 걸린다고 혼잣말로 욕을 많이 했다.
그리고 김영진은 뇌에도 렉이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방금 깨달았다.
-선배?
김영진은 푹 한숨을 내쉬고 목소리를 높였다.
“야, 이 자식아! 그게 무슨 급한 일이야!?”
잠깐이나마 생겼던 걱정마저 화로 바뀌었다.
“이게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도…….”
나준하에게 들었던 걸 물어보려는데 지상철이 말을 끊었다.
-대영 중학교의 감독이 아주 나쁜 놈이란 말이에요.
“뭐?”
-선후배도 없고, 예의도 없고.
방금까지 자신의 옆에서 예의 바르게 술을 마시던 로베르토가? 술이 강하다고 주장하지만 휘청거려서 테이블의 모두에게 웃음을 줬던 로베르토가? 이탈리아에서 배운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해 준 로베르토가?
황당했지만, 김영진은 일단 들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휘경 중학교랑 친선경기 한 건 들었어. 근데 무슨 말이야. 자세히 말해봐.”
-그걸 아시네요? 아무튼, 그건 그렇고 뭐냐면요.
아는 코치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바로 안다는 걸 이상하게 여길 만도 하지만, 지상철은 뭐가 급한 건지 자기 할 말만 늘어놓기 시작했다.
초조한 게 목소리에서 느껴졌고, 김영진은 점점 차분해졌다.
-걔가 이사장이랑 조기축구를 해서 인맥으로 절 쫓아내고…….
지상철은 말을 지어내고 있었다. 나준하와 로베르토가 설명해 준 것과 똑같은 내용이었지만, 지상철의 시점은 달랐다.
-자기가 아끼는 1학년 쓰겠다고 2학년들 불만이 늘어나서 자기가 데려오고.
끊임없는 거짓말이 계속됐지만, 김영진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 나준하에게 들은 얘기나, 직접 만난 로베르토를 보고 김영진은 자기가 사람을 잘못 봤다는 사실을 점점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았죠? 그래서 그래요. 거기 코치 중에 선배 후배 하나 있잖아요? 그 사람한테 말 좀 전해줘요. 친선경기하면 좋을 게 없다고.
김영진은 궁금했다. 대체 왜 이렇게 로베르토를 싫어하는가. 로베르토의 말대로라면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이라던데.
“그래…… 알겠다.”
-역시, 선배님, 감사합니다!
김영진은 지상철과 로베르토 중 누가 옳은지 확신했다.
선배, 선배 거리면서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다니. 앞으로 자신에게도 그럴지 모른다. 김영진은 지상철과 친분을 끊기로 했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였어.”
-예?
“너 이 자식아. 너, 하…… 여전히 그 더러운 버릇 못 고쳤구나? 로베르토가 뭐가 미워서 그렇게까지 하냐?”
-예?
지상철이 당황했다.
“야, 지상철이, 내가 지금 누구랑 있었는지 알아?”
-그…….
지상철은 당연히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건 김영진에게 상관이 없었다.
“나준하 선배님이랑 같이 있었어 새꺄, 선배님이 방금까지 네가 로베르토한테 저지른 일 말해줬다고. 로베르토가 친선경기 상대를 못 구해서 서울까지 올라온 거라며?”
-나, 나준하 선수님이요? 그분이 왜요?
“나 선배님이 로베르토를 좋게 보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 말이었는데, 지상철의 반응이 이상했다.
-……정말입니까?
“어. 왜.”
지상철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나준하 감독님이 속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선수에서 감독 되신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사람을 잘 못 볼지도 모르죠.
“너, 너, 이 새끼. 진짜…….”
김영진은 머리게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김영진은 몇 달 전까지 나준하와 접점이 없었다. 같은 대학교 축구부 출신이긴 했지만, 김영진은 2부리그 후보선수가 최고 커리어였기에 나준하 같은 해외리그에서 뛰고 국가대표팀에서 뛴 선수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20대 후반의 나이로 은퇴한 후, 스카우트로 일하기 시작한 3년 차인 올해 초에 나준하를 처음 만났다.
김영진의 대학 동기가 휘경 중학교 코치였고, 나준하는 여름에 감독으로 내정돼 있었기 때문에 우연이 겹쳐서 만나게 된 거다.
나준하는 김영진에게 어떤 일을 하고 있냐고 물었고, 김영진은 솔직히 대답했다. 나준하는 선수의 어떤 점을 주로 보고,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하냐고 물었고, 김영진은 또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 나준하는 김영진에게 틀림없이 훌륭한 스카우트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계속 그대로 열심히 하라고 말해줬다.
사회 초년생답게 아등바등 살고 있었던 김영진에게 우리나라 축구계에서 높은 위상을 갖고 있는 선수가 그런 말을 해준 거다.
가뭄에 단비가 내린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나준하가 사람 보는 눈이 부족할지 모른다는 식으로 깎아내리는 말은 김영진에게 큰 불쾌함을 안겨줬다.
“말이 되는 소리 할래? 너랑 나 선배 중에 누가 더 사람을 잘 보겠냐?!”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서, 선배님? 저도 흥분을…….
“됐고. 앞으로 선배라고 부르지 마라.”
지상철이 다급하게 수습하려는 것 같았지만, 김영진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리고 적당히 까불어. 나 선배가 너 같은 애들 벼르고 있어. 축구계를 좀먹는 놈들이라고. 네가 그럴 리가 없다고…… 술자리 끝나고 연락해 보겠다고 했는데…… 하, 진짜 나만 멍청한 놈 됐네…….”
-선배님…….
“끊어.”
핸드폰을 접어버린 김영진은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그리고 바로 술집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의 모두가 김영진을 바라보았다. 김영진은 아차 싶었다. 화가 나서 소리를 몇 번 질렀는데 술집 안까지 들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준하가 물었다.
“후배랑 통화한다고 하지 않았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목소리가 높아져?”
후배라, 이제 지상철은 김영진에게 후배가 아니었다.
그래서 김영진은 웃으면서 답했다.
“후배가 보증 좀 서달라고 해서 연 끊자고 소리 지르고 왔어요.”
“뭐?”
“이제 그 자식 제 후배 아닙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했네, 잘했어.”
“보증 서달라는 건 사람도 아니지. 그건 그렇고 말이야…….”
이어지는 대화에 김영진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 * *
같은 시간, 지상철은 전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베르토 그릴로.
얼굴도 본 적 없는 사이지만, 마음에 안 드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사장 인맥으로 자기 자리를 꿰찬 것, 첫 경력부터 중학교 감독으로 시작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전지훈련 때 축부모 카페에서 좋은 소식이 보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부모들을 통해 건너서 이야기를 들어봐도 대영 중학교 축구부원들이 전부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도 불편했고, 이사장이 즐거워한다는 사실도 찝찝했다.
특히, 축부모 카페를 통해서 처음 보고, 김영진을 통해 확인한 나준하 감독이 로베르토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토할 것 같았다.
지상철은 지금 자기의 기분을 역겹게 만들고 있는 감정이 열등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로베르토가 그 정도라고?”
김영진에게 연락한 건, 대영 중학교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던 배영호와 술을 마시다가 휘경 중학교를 초청한다는 얘길 듣고서였다.
심지어 오늘 대영 중학교가 휘경 중학교와 친선경기를 하기 위해 서울로 갔다고 했다. 이사장이 사비로 빌린 버스를 타고.
“나 때는 그런 지원도 안 해줘 놓고…….”
자신이 초라하고 한심하게 느껴져 지상철은 괜히 책상을 주먹으로 세게 쳤다.
뭐라도 하고 싶은데, 나준하가 벼르고 있다는 말이 찝찝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게 아닌데…….”
다 자기 뜻대로 돌아가던 게 어느 순간부터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