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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인드 축구천재-129화 (110/173)

리마인드 축구천재 129화

“축구부들, 이거 봐 봐. 어제 스무 장 버리고 최종 완성한 거야. 어어! 만지지 마! 고생해서 붙인 거라고!”

친선경기 3일 전, 축구부 친구들과 등교하니 친구 송시환이 사진부에서 만든 포스터를 자랑했다.

사실 그건 포스터라기엔 조악했다.

포스터를 만지려고 하다가 제지당한 박종혁이 물었다.

“이거 A4용지 아니야?”

반 친구 송재영도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흑백이네.”

“아니, 포스터 인쇄 장비가 얼마나 비싼 줄 알아?”

송시환이 도끼눈이 돼서 항변했다.

송시환의 말은 반 정도 맞았다.

처음에 이사장은 비용을 따져보고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기왕 하는 거고 처음이다 보니 큰마음을 먹고 전문 장비를 빌리기로 마음을 바꿨다.

다만, 준비 기간이 짧고, 업체들도 예약이 다 밀려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학교에 있는 프린터기를 비롯해 근처 문방구와 인쇄소에서 프린터만 빌리기로 했다.

뒷사정을 알기도 했고, 솔직히 포스터가 만족스러웠기에 송시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 붙였네, 한 장 같다.”

송시환이 언제 화냈냐는 듯 밝게 웃었다.

“그렇지? 역시 현준이밖에 없다. 이게 A4용지 네 장을 칼로 정교하게 잘라낸 다음에 딱풀로 깔끔하게 붙인 건데…….”

더 칭찬해 주기로 했다.

“포스터는 일부러 흑백으로 한 거야? 되게 멋진데.”

“크으, 역시, 박종혁 같은 막눈이랑 다르게 현준이가 잘 아네. 흑백이 잘 어울리는 사진을 아예 흑백으로 편집한 거야.”

막눈이라는 단어에 발끈했던 박종혁이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투덜댔다.

“솔직히 사진은 괜찮긴 한데…… 네가 만든 거 아니지?”

“그…… 선배가 작업하긴 했지. 하지만 내가 붙인 거라고.”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이 자식들이!”

발끈하는 송시환을 박종혁과 송재영이 놀려먹었다.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포스터를 살펴봤다. 윤태상이 유니폼을 입고 포효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흑백으로 편집했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 가는 게 검은 불꽃들이 모여서 윤태상의 형상을 만든 그림 같아 보이기도 했다.

정성이 느껴져서 몹시 만족스러웠다.

“보면 볼수록 진짜 잘 만들었다. 선배한테 고맙다고 해줘. 불타는 것 같아서 열정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크으! 좋아! 내가 전해줄게. 그리고 기분이다. 오늘은 맘껏 만져라.”

송시환이 배를 내밀며 우쭐거렸다.

송시환의 뱃살을 잡아서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딱딱한 송재영의 뱃살과는 다르게 송시환의 뱃살은 찹쌀떡 같아서 만지는 재미가 있었다. 평소에는 싫어하는데 오늘은 기분이 정말 좋은 모양이었다.

보답으로 박종혁을 공격해 주기로 했다.

]“역시 이런 포스터는 태상 선배로 만들어야 해. 박종혁 같은 애들 말고.”

“뭐! 내가 어때서!”

박종혁이 발끈했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동조해 주지 않았다. 윤태상 형, 선배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게 대부분의 반응이었다.

“올, 잘 만들었는데. 우리 것도 가져왔는데 볼래?”

그때, 지상준이 끼어들었다.

“깜짝이야. 닌자냐. 언제 온 거야.”

지상준의 두 눈 밑에는 팬더처럼 짙게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다. 지상준은 몹시 피곤한 안색으로 힘없이 웃었다.

“닌자 맞는 거 같아…… 이거 만든다고 밤새웠거든. 현준아 검사 좀 해줘.”

“뭔 검사까지야…….”

박종혁이 안타까워하는 동안 지상준이 내민 책자를 받았다.

“우리도 그게 신문인지 잡지인지 책자인지 모르겠어. 그냥 각자 하고 싶은 거 쓰고, 보기 편하게 만든 거라.”

이것도 A4용지가 사용됐다. A4용지를 다섯 장 겹쳐서 가로로 반으로 접어 만든 책자 형태였다.

지상준 말대로 신문부의 책자는 내용이 중구난방이었다. 윤태상의 인터뷰도 있고, 경기 전 주목 포인트도 있고, 축구 기본 규칙과 용어 설명도 있고, 심지어 4컷 만화도 있었다.

내용이 길지 않고, 그림도 있었기에 금방 읽을 수 있었다.

감탄하면서 마지막 페이지로 넘겼다.

“잘 만들었다. 어?”

“왜?”

“휘경 중학교 내용이 어떻게 들어간 거야?”

마지막 쪽에 휘경 중학교가 얼마나 대단한 팀인지, 성시건을 비롯해 다섯 명의 선수에 관한 간략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지상준이 고개를 저었다.

“자윤이가 욕하면서 만들었어. 갑자기 상대 팀을 바꾸는 게 어디 있냐고.”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지만, 설명하기 난감했다.

기자윤의 서슬 퍼런 두 눈이 떠올라서 괜히 헛기침을 했다.

“크흠, 고생했겠다.”

“괜찮아! 재미있었어! 그리고 우리 이거 공모전에 낼 거거든. 주제가 정해진 덕에 다들 열심히 만들었어.”

“헐, 너네 좋은 일만 했네.”

“흐흐, 돕고 돕는 거지.”

지상준이 능글맞게 말했다.

책자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면서 지상준에게 궁금한 걸 물어봤다. 나도 이번 주는 이사장을 한 번밖에 못 만나서 뒷사정을 다 아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이 책자 몇 부 인쇄할 거야?”

“이사장님이 300부 정도 만들라는데? 100부는 자기가 갖고 있다가 자랑할 거라고 하셨어.”

“그렇게 많이?”

레이저프린터기가 아무리 좋아도 수백 장 단위로 가면 급격하게 속도가 느려진다. 지금은 2003년이다.

“이사장님이 책자는 아예 인쇄소에서 뽑아주신다고 했거든.”

버스에 축제 비용에…… 지상준의 말을 듣고 이사장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이사장님 돈 많이 쓰시겠다.”

“이사장님 방금 만났는데 엄청 즐거워 보이던데?”

“그래?”

좋아하면 됐고.

“야, 너만 보기냐. 나도 보여줘. 나도 인터뷰했는데 뭐 없어?”

박종혁이 내게서 책자를 받았다.

“책자 용량이 한정돼서 네 인터뷰는 공모전에 낼 거야.”

“……공모전?”

“전국공모전이야.”

“오오.”

박종혁과 지상준의 대화를 들으며 반 친구들을 둘러봤다.

다들 시끌벅적했다. 다음 주부터 중간고사 기간이었기에 공부 이야기는 아예 없고, 다 자기 부에서 뭐 했나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부 활동을 안 하는 친구들은 게임이나 운동이나 노래나 만화책 같은 요즘 유행하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사진부나 신문부 말고는 상대 팀이 바뀌어서 크게 고생한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방송부에서 중계 같은 걸 한다고 했는데 선수 이름 다시 외워야 한다고 조금 불평하긴 했다.

그래서 이번 주에 팀 훈련을 두 번 금지당했을 때 가서 도와줬다.

자기 부에서 뭐 했나 하는 얘기를 듣다 보면 의욕이 생겼다.

오늘 훈련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 * *

“요즘 분위기 보면…… 지면 큰일 나겠더라…….”

엄태영의 조심스러운 말에 티알이 공감했다.

“맞다. 두렵다. 선발 서기 싫다.”

“어차피 후보인 게.”

“뭐?! 박종혁도 저번에 후보였다.”

티알과 박종혁이 투덕대기 시작했고, 나와 엄태영은 서로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엄태영의 말대로인지 오후 훈련이 시작하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축구부원들의 표정이 진지했다. 간혹 초조해 보일 정도로 심각한 축구부원들도 보였다.

보는 사람이 늘어나고, 기대가 클수록 축구 하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건 보통 성장을 위한 원동력이 된다.

지난주 휘경 중학교를 상대로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었던 건 우리 축구부원들이 더 실전처럼 경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하기 위해서는 목표가 필요하다. 목표는 훈련의 강도, 양, 밀도 전부 늘어나게 해준다.

“현준아, 좀 걱정이다.”

“왜?”

“지더라도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을까. 기대하는 사람이 많은데.”

“당연하지. 할 수 있어.”

전지훈련 때 지고 이길 때 격차가 컸기에 당연히 들 수 있는 생각이었다. 우리 축구부원들의 흐름이 꼬여서 지는 방향으로 간다면, 개인 기량으로 해결할 계획도 있었다.

“진다고!? 엄태영! 미쳤어? 우리가 어떻게 져.”

“우리 토요일에 못 이기면 죽는 거야. 알겠어?”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건지, 갑자기 노태신과 정두식이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깜짝 놀란 엄태영은 햄스터처럼 움츠러들었다.

“……예.”

“대답이 작다! 더 힘차게! 송현준 넌 뭐해!”

“예!”

함께 힘차게 대답해 줬다. 노태신과 정두식은 만족해했다. 1학년들보다 선배들이 더 의욕이 있어 보였다.

잠시 후,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로베르토와 두 명의 김 코치가 우리를 모았다.

“오늘 기세가 좋구나. 사흘 뒤 경기니까 오늘 훈련은 강한 강도로 하겠다.”

“헉.”

“아니, 감독님.”

“불만 있냐?”

“없지만요.”

“그럼 5분 쉬고 시작한다.”

“예!”

기운찬 대답에 로베르토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떠났다.

친선경기를 준비하는 건데도 기세가 높았다. 실전처럼 훈련을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고,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덕분이다.

축구부원들의 열의에 찬 모습을 보면서 묘한 기분이 되었다.

“그냥 해보고 싶었던 건데…….”

마지막 인생이었고, 마지막 학창시절의 마지막 학기나 다름없었기에 이런 친선경기를 기획했다.

근데, 다들 이렇게 열심히 할 줄은 몰랐다.

친선경기 준비를 위해 우리 학교 학생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축구부원들은 열의에 가득 차서 훈련이나 연습경기나 전부 열심히 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유소년 선수들에게 정말 좋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원래는 다른 전생에서처럼 2010년 이전에 세계에서 한 손에 꼽는 프로선수가 된 후에 유소년 축구에 개입할 계획이었다.

유소년리그를 개편해서 더 많은 경기를 뛰고,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훈련할 수 있게 하고, 더 열의를 가질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서 내 선수 생활 중반부터 월드컵에서 함께할 동료들을 늘릴 계획이었다. 특출난 유망주를 해외로 보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물론,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2010년대 직전에 축구협회에서 유소년 축구 개편 계획이 나오긴 한다. 리그제로 전환하고, 학생들부터 동네 사람들까지 즐길 수 있게 만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이 계획은 정착 과정에서 여러 가지 착오를 거치고, 내가 회귀하기 직전 시점까지도 완벽하게 정착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나중에 개입해야만 하는 거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잘 풀리는 걸 보니 나중에 개입할 때 계획들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학교가 지금부터 좋은 사례로 남는다면 다른 학교들의 방향성도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의 시스템을 바꾸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압도적인 한 팀을 만들어서 나머지 팀들이 그 팀을 따라 하게 만드는 거니까.

유소년 시절에는 적당히 몸을 만들고, 나중에 잘 될 유망주들이나 축구인들을 돕고, 기술을 익히는 게 최우선 목표였다. 마지막 인생을 즐기는 건 당연히 깔려 있는 거고.

한데, 이것들을 해내면서 미래에 하려고 했던 중요한 일까지 덩달아 할 수 있다면 말이 다르다.

박종혁의 옆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종혁아, 껌 사둔 것 좀 있냐?”

“좀 있는데.”

“이따 숙소 가서 한 통만 주라. 돈 줄게.”

“네가 직접 사.”

“매점에서 껌 안 팔잖아…… 불량해 보인다고. 그리고 친선경기 끝날 때까지 외출 금지잖아.”

“다들 몰래몰래…… 아니다, 이 모범생 자식. 알겠어.”

“감사.”

이번 친선경기가 다른 팀이나 보통 사람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게 있다.

스타다.

대회나 스포츠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즐기는 어떤 것이든, 그 분야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초창기에는 언제나 스타가 있는 법이다.

내 욕심 때문에 다들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도 이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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