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30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대영 중학교 정문에 도착한 김채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정문 기둥에 대영 중학교라고 적혀 있는 팻말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어 보였다.
배구부보다 여기에서 지낸 시간이 더 긴데 이상하게도 몇 년 만에 오는 기분이었다.
이곳에서는 새벽에 송현준과 함께 운동하고,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운동을 하거나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주말에는 오빠와 오빠 친구들과 함께 풋살을 즐겼었다.
하지만 지금은 잠자는 시간 외에는 훈련과 배구 공부만 한다. 같은 일만 반복하니 평소에는 시간이 금방 간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운동부에 들어가기 전 일상과 비교하게 되니 긴 시간이 지난 기분이 드는 걸지도 모른다.
김채아는 웃었다.
지금 생활이 힘든 건 사실이지만, 예전과 비교해 보니 충실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채아야! 어서 와!”
“채아 왜 실실거리고 있어?”
이지혜와 정은영이 그리운 교복을 입은 채로 김채아를 반겼다.
“그냥 오랜만에 오니까 좋아서.”
“그래? 우리 봐서 그런 건 아니고?”
이지혜는 여전히 애교가 많았다. 자연스럽게 김채아에게 팔짱을 꼈다. 그리고 정은영도 말없이 반대쪽 팔짱을 꼈다.
“이거 붙잡혀 가는 거 같잖아.”
김채아의 말에 이지혜와 정은영이 까르르 웃었다. 김채아도 함께 웃으면서 오히려 둘을 끌고 학교로 들어갔다.
“엄청 오래되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오는 거잖아! 환영해 줘야지!”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몰라! 아무튼 반갑다는 얘기야.”
이지혜의 말에 김채아는 또 웃었다. 학기 중 처음으로 받은 3일짜리 휴가를 알차게 쓰고 있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진이는 춤 연습하고 있어?”
“응, 공연 연습하고 있는데 거기로 가자.”
“좋아.”
“근데 채아야 너 더 큰 거 아니야?”
“응…… 조금씩 크고 있어.”
많이는 아니지만 1~2㎝가량 더 컸다.
부모님과 함께 성장판 검사를 받았는데 앞으로 최소 10㎝, 잘 크면 15㎝는 더 클 예정이라고 했다. 이 얘길 들은 감독님이 몹시 좋아하셨다. 배구선수는 키가 클수록 좋다시면서.
“하나 여중 교복 진짜 이쁘다.”
“괜히 입고 왔나 봐…….”
이지혜의 칭찬에도 김채아는 점점 고개를 숙였다. 키가 크고 다른 색의 교복을 입고 있다 보니 사람들이 다 한 번씩은 쳐다봤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그때, 갑자기 방송을 통해 학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김채아는 쑥스러워하던 것도 있고 두리번거렸다. 이지혜나 정은영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인사드리기 전에~ 잔잔한 곡부터 듣고 올게요~]
학생 목소린데 어른 말투를 흉내내는 듯한 어색함이 있었다. 김채아가 갸웃거리자, 이지혜와 정은영도 복잡한 얼굴들로 스피커를 바라보았다.
이지혜가 말했다.
“방송부에서 하는 거야.”
“무슨 방송인데?”
“채아 너도 오늘 뭐 하는지 알지?”
“축구.”
“응, 부에서 각자 하고 싶은 거 간단하게 하라고 이사장님이 말하셔서 방송부에서는 원래 해설만 하기로 했거든?”
발이 넓은 이지혜는 방송부에도 친구가 있어서 내막을 잘 알았다.
“응.”
“근데, 현준이한테 물어보니까 경기 직전에 경기 안내하는 거만 빼면 사람들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거면 아무거나 해도 된다고 해서…….”
익숙한 이름에 김채아는 질문을 참지 못했다.
“송현준?”
“걔 무릎이 안 좋다고 훈련 빠지고 특별활동부 돌아다니면서 축구 경기에 뭐가 필요하고, 뭐 하면 좋은지 이것저것 알려줬어.”
정은영이 끼어들어서 설명해줬다.
이지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서 방송부 애들이 아이디어 내다가 불이 붙어서…… 음악방송부터 시작해서 학생들 사연 읽어주는 방송도 있었고…… 아아, 까먹었다. 아무튼 경기 시작 전부터 각자 하고 싶은 방송하기로 했어.”
송현준에게서 들은 경기 시작 시각은 10시, 지금 시각은 8시 30분 정도.
근데 지금도 학교 안은 북적거리고 있었고, 노랫소리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축제 같다.
김채아는 이걸 만드는 과정에 송현준이 한 역할을 했다는 게 신기해서 주변을 꼼꼼하게 살펴봤다.
학생들의 손에는 떡꼬치도 들려 있었고, 신문인지 팸플릿인지 모를 종이들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운동장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신기하다.”
“그러니까 말이야. 나랑 은영이가 있는 부는 이거 하는 거에 관심이 없어서 그냥 관람부 하기로 했어. 오! 채아야! 저거 봐. 송현준이다.”
셋은 운동장 쪽으로 이동하면서 건물을 끼고 코너를 돌았는데, 그쪽 벽에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이지혜 말대로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김채아는 팔짱을 풀고 천천히 걸어가서 송현준의 포스터 앞에 섰다.
흑백이었지만, 송현준이라는 건 잘 알아볼 수 있었다. 경기 중에 찍힌 사진인지 손가락으로 오른쪽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향에는 경기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
“잘 만들었다…….”
김채아가 그렇게 멍하니 있자, 정은영과 이지혜가 서로를 보면서 음흉하게 웃었다.
“우리는 어제 잠깐 보고 잘 나왔구나 하고 말았는데…….”
“네 남편 잘 나왔지?”
“야!”
정은영의 토스에 이지혜의 스파이크가 이어지자 김채아가 당황해서 발끈했다. 김채아는 이지혜를 잡으려고 했고, 이지혜는 정은영을 방패 삼아서 요리조리 피했다. 방패가 된 정은영은 키득거렸다.
김이 빠진 김채아는 한숨을 쉬고, 주머니에서 디지털 카메라를 꺼냈다.
“와! 카메라 샀어?”
“…….”
“화났어?”
이지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접근하자, 김채아가 갑자기 움직였다.
“잡았다!”
김채아는 이지혜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배구부 선배들이 간혹 이런 장난을 쳐서 김채아도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나왔다. 이지혜는 당황해서 버둥거렸다.
“벌이야. 잠깐 그러고 있어.”
“잘못했어…….”
이지혜의 빠른 사과에 만족한 김채아가 바로 힘을 풀었다.
“아빠 거야.”
“그렇구나, 그럼 그걸로 우리끼리 사진 찍자.”
“응, 그러려고 가져온 거야.”
“너무 좋다.”
이지혜의 말을 들으면서 김채아는 포스터 사진을 찍었다. 잘 찍힌 걸 확인하니 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같이 사진을 찍자고 말하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이지혜가 입을 가린 채로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김채아는 이지혜를 또 붙잡아서 헤드락을 걸었다.
“왜!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정은영이 웃었다.
* * *
[내 것이 되는 시간~]
음악이 울려 퍼지고, 댄스부원들이 체육복을 입은 채로 운동장 연설대 앞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우와, 혜진이 잘 춘다.”
경기가 시작하려면 한 시간도 더 넘게 남아 있었다. 덕분에 김채아와 이지혜는 스탠드에 앉은 채로 댄스부의 리허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김채아를 발견한 김혜진이 손을 흔들었다. 김채아도 마주 손을 흔들어줬다. 김혜진까지 포함해서 점심부터 저녁 먹기 전까지 놀기로 했기에 김혜진은 아쉬움없이 바로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자, 받아.”
마침 맛있는 냄새와 함께 정은영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와아…….”
정은영은 종이컵 세 개를 들고 있었고, 그 안에는 치킨 양념으로 범벅된 튀김 가래떡이 들어 있었다.
셋은 떡을 받자마자 먹기 시작했다.
김채아는 달달하면서 매콤한 맛에 감탄하다가 물었다.
“맛있는데 이거 근데 정문 앞 떡볶이집 소스 아니야?”
“와, 김채아 먹는 거 하나는.”
“어떻게 알았어? 떡볶이집 아주머니도 요리부 도와주고 있거든.”
“그냥 먹어보면 알지…….”
괜히 민망해진 김채아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사장님 되게 본격적이네. 진짜 축구 좋아하셔.”
그렇게 말하면서 떡을 하나 더 입에 넣고, 맛을 음미하고 삼킨 김채아는 불현듯 깨달았다.
“아! 식단 해야 하는데.”
김채아는 아쉬워하면서도 남은 떡을 정은영에게 내밀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고맙게 먹을게.”
정은영은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심심할 테니까 이거 봐.”
정은영은 떡만 가져온 게 아니었다. 학생들이 들고 다니던 신문인지 팸플릿인지 모를 책자도 가져왔다.
“이게 뭔데?”
“담임 쌤이 신문부 담당이잖아. 거기서 만든 거래. 떡 받으러 갔다가 만났는데 너 왔다니까 가지고 계시던 거 바로 주셨어. 그리고 너 보러 온다는데?”
“좋아.”
신세연 선생님은 활기찬 분이셨다. 오랜만에 볼 수 있다니 기분이 좋았다. 김채아는 그 기분으로 책자의 표지에 해당하는 겉면을 봤다.
“음…….”
이사장님의 사진과 함께 인터뷰가 있었다.
바로 넘겼다.
두 번째 쪽에는 휘경 중학교가 어떤 팀인지, 얼마나 강한지에 관해 수상 기록 등으로 알아보기 쉽게 적혀 있었다. 세 번째 쪽에는 대영 중학교 축구부원들의 포지션과 한 줄 특징이 적혀 있었고, 네 번째 쪽에는 축구경기장 그림과 함께 간단한 용어 설명이 있었다.
그다음부턴 대영 중학교 축구부원들 몇몇의 개인 인터뷰가 있었다.
티알이라는 친구의 인터뷰가 눈에 띄었다. 송현준이 재능 있다고 칭찬했던 애였기에 관심 있게 읽었다.
그리고 인터뷰들을 지나니 마지막 페이지에는 각 축구부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원의 사진과 이름, 설명이 적혀 있었다.
“나랑 동시에 축구부에 들어가 놓고…….”
각 축구부의 에이스를 소개하는 자리에 당당하게 송현준의 사진과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아무리 배경과 경력이 다르긴 하다지만,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페이지가 크지 않았기에 송현준에 관한 설명은 짧았다.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서 팀 전체를 지휘하는 스타일이지만, 익명의 축구부원의 정보로는 전 포지션을 소화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상대는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휘경 중학교다.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 능력을 펼치기보다는 평소처럼 중원에서 팀을 지휘할 것으로 보인다.
김채아는 내용을 읽고 작은 미소를 지었다. 송현준 본인이 말한 적이 있었다.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라 전 포지션에서 수준급으로 잘할 자신이 있다고.
그리고 사실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자리는 공격수와 공격형 미드필더라고.
오늘 기대 이상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것 같다는 예감에 설렜다.
이어서 휘경 중학교에서는 성시건이라는 선수의 이름이 보였다.
휘경 중학교에서의 포지션은 윙이지만, 청소년 국가대표팀에서는 주전 공격수로 뛸 만큼 다재다능하고 실력도 뛰어난 에이스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국가대표라고?”
아직 배구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지만, 청소년 국가대표팀이 얼마나 대단한 자리인지 김채아는 잘 알고 있었다.
괜히 어깨가 굳었다. 친선경기 얘길 듣긴 했지만, 이 정도 판이 깔리면 진지한 경기가 된다.
“채아야!”
생각에 잠겨 있으니 신세연 전 담임선생님이 찾아왔다. 김채아는 벌떡 일어나서 공손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선생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신세연이 김채아를 끌어안았다.
“채아는 더 컸네.”
워낙 밝은 분이시다 보니 김채아도 덩달아 기분이 들뜨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신세연은 이어서 정은영과 이지혜에게 말했다.
“은영이랑 지혜 부는 이번에 쉬지? 그럼 너희들 우리 부랑 같이 볼래?”
* * *
신세연을 따라 신문부 자리로 따라오니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부원들은 지금 너희가 들고 있는 책자를 나눠준다고 교내 곳곳에서 일하고 있어.”
“아…….”
“다들 경기 시작하기 전에는 올 테니까, 채아야. 거기서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해 줄래?”
“네!”
신세연과 김채아는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김채아는 가끔 무서울 때도 있지만, 선배, 감독, 코치님들이나 동기들도 다 잘 해준다는 얘기와 자기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얘길 풀어서 했다.
그런 얘기를 하는 동안 스피커에서는 학생들 사연 읽기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공개 고백 사연이 나온 바람에 얘기를 잠시 멈추고 집중하기도 했다. 사연 사이사이에는 1분가량의 짧은 음악이 나왔는데, 운동장에서 몸풀기 훈련을 시작한 휘경 중, 대영 중 축구부원들을 보면서 음악을 들으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들떴다.
거기다 송현준이 김채아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 줘서, 이지혜뿐만 아니라 선생님까지 합류해서 놀리는 사건도 있었다.
김채아는 분위기가 참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은 금세 흘러 경기 시작 30분 전이 되었고, 신문부원들이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신문부원 중 같은 반이었던 친구와만 제대로 인사한 김채아는 괜히 두리번거렸다.
아예 못 알아보면 편하게 있을 거다. 하지만, 풋살대회 우승하고 운동부에 스카우트돼서 전학 갔다는 사연이 있어서 그런지 신문부 사람들이 모두 김채아를 알아보는 바람에 시선이 신경 쓰였다.
그리고 경기 시작 15분 전에는 안면이 있는 사이도 도착했다.
“안녕.”
김채아가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자리에 앉으려던 지상준은 김채아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송현준 친구라 몇 번 본 적 있는 사이였다.
신세연이 끼어들었다.
“이번 책자는 모두 다 열심히 만들긴 했는데, 이 둘이 특히 열심히 만들었어.”
“그래요? 진짜 잘 만들었던데.”
“그래?”
“정말?”
지상준과 옆에 있던 기자윤이 반응했다.
“응, 재미있게 봤어.”
직접 이런 얘길 듣는 게 처음인지 기자윤을 비롯한 신문부원들이 쑥스러워했다. 김채아는 가슴이 간질거리는 걸 느끼면서, 어느새 자리가 편안해진 걸 알았다.
그때, 이지혜가 김채아의 옆구리를 검지로 쿡 찔렀다.
“채아야, 네가 아까 열심히 사진 찍은 현준이가 혼자 앉아서 뭐 먹고 있는데.”
김채아를 놀리는 재미가 든 건지 이지혜가 장난기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문부원들이 갸웃거리거나 김채아를 바라봤다.
부끄러워진 김채아는 이지혜의 정수리를 한 손바닥으로 잡아서 눌렀다.
“악!”
그리고 이지혜의 말대로 송현준을 찾았다.
스탠드와 가까운 벤치에 혼자 앉아서 뭔가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고개를 숙여서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