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31화
몸풀기 훈련이 끝나고 잠깐의 자유시간을 받았다.
사람이 없는 벤치에 혼자 앉아서 껌을 씹으면서 그 감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있으니 박종혁이 다가왔다.
“내가 준 거 이제야 씹는 거야?”
“어.”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 거여.”
박종혁이 정말 궁금해하는 거 같아서 성실하게 대답했다.
“루틴이야.”
“루틴? 징크스 같은 거 말하는 거지.”
비슷하게 볼 수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부정했다.
“조금 다르긴 해.”
“뭐가 달라? 나도 경기 날에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입던 팬티만 입고 뛰는 징크스 있는데.”
옆에서 가만히 있던 엄태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굳이 얘기해야 했을까…….”
“나도 안 궁금한데.”
엄태영의 말에 연계해서 박종혁을 공격했다.
박종혁이 억울해했다.
“아니, 깨끗하게 빤다고.”
“그건 당연한 거고.”
“아, 반응 뭔데. 태영이 너는 징크스 같은 거 없냐?”
“난 잘 자기만 하면 돼.”
“나만 이상한 사람 됐네…….”
박종혁이 우울하게 말했다.
뭐, 징크스나 루틴이나 경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하는 행위나 의식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경계가 애매하기에 스포츠 업계 사람들은 징크스는 부정적인 결과를 피하기 위한 행동이나 의식이라고 정의하고, 루틴은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행동이나 의식이라고 나눈다.
어떤 테니스 선수가 경기가 시작하기 전에 라인을 밟지 않으려고 의식해서 행동하는 건 징크스라고 하고, 어떤 양궁 선수가 경기 전에 항상 긍정적인 말을 적어놓은 수첩을 읽는 건 루틴이라고 한다.
아무튼, 프로 스포츠 선수들은 경기 전에 최상의 심리상태를 만들기 위해 별의별 행동을 한다는 거다. 그리고 그 행동들은 유의미한 효과가 있다.
축구선수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나 감정이나 컨디션이 흔들릴 위험이 있고, 이런 행동과 의식을 통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찾을 수 있다.
전생에서 나는 성인이 되자마자 산 무릎보호대를 한쪽만 차는 습관이 있었는데, 한 번 잃어버렸다가 3개월 동안 경기력을 망친 적이 있어서 쉬운 루틴으로 바꿨다.
바로 껌 씹기.
과하지만 않다면 머리도 잘 돌아가는 거 같고, 같은 리듬으로 씹는다면 진정 효과도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된다.
사실 어릴 때부터 루틴을 만들려고 하다가 꼬이면 강박증까지 올 때가 있어서, 어느 정도 성장하고 프로팀에 들어간 이후부터 루틴을 사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 경기는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영혼에 새겨진 거나 다름없는 루틴을 통해 정신을 최고의 상태로 만들어야 했다.
느리게 네 번, 빠르게 끊어서 2번, 1번, 2번. 이걸 열 번 반복한다.
점점 집중력이 고조 되는 게 느껴졌다.
“다 했다. 가자.”
“그래서 징크스랑 루틴이 뭐가 다른데.”
“설명하기 귀찮아.”
“야.”
박종혁의 투덜거림을 들으면서 셋이 함께 경기장 테두리 중앙에 위치한 벤치로 향했다. 그곳에는 우리 축구부원들이 모여 있었다.
“야, 근데 진짜 너 아무렇게나 뛸 거냐?”
“아무렇게나 라니. 프리롤이라는 멋있는 용어가 있는데.”
“그게 아무렇게나잖아.”
며칠 전에 로베르토와 윤태상에게 찾아가서 양해를 구했다.
경기 전에 껌 씹어도 이상하게 보지 말라고, 2년 동안 쉬면서 집중력 끌어올리기 위해 만든 루틴이라고. 그리고 토요일 경기에는 자유롭게 나 중심으로 뛰고 싶다고. 요즘 폼이 많이 올라왔다는 느낌을 받는데, 경기에서 제대로 보여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들은 로베르토는 무리하지 말고, 무리하는 거 같다면 바로 빼 버리겠다는 조건을 걸고 수락했고, 어제 전술과 선발 명단을 발표하면서 선수들에게 통보했다.
윤태상에게 따로 말한 건 윤태상이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서 나 다음으로 팀을 조율하기 때문이었다.
윤태상은 내 루틴을 듣고 신기해하며 나중에 루틴 만드는 걸 도와달라고 말했다.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근데, 정말 폼이 더 올라왔어? 지금도 잘하는데?
그리고 윤태상은 이렇게 물었다.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조기축구회에 나가고, 개인 훈련을 하면서 체력과 기본기를 끌어올릴 때나 풋살로 경기감각을 끌어올릴 때는 적당히 성장했다고 느꼈다.
하지만 축구부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내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급격하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영혼에 각인되고, 전생들에서 할 수 있었던 걸 점점 자연스럽게 구현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수준 높은 사람들과 함께할수록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여러 전생을 통해 잘 알고 있었고, 행동으로 옮긴 덕이었다.
앞으로 프로레벨로 올라가면 더 성장할 거고, 최상위 프로리그에 가면 완벽하게 성장할 것이다.
그때가 기다려진다.
* * *
“여기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오길 정말 잘했어. 친선 경기 하나 한다고 이런 분위기라니.”
나준하는 대영 중학교의 분위기를 보면서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나준하가 로베르토에게 물어봤다.
“정말 대단한데…… 강제 동원이라도 한 건가?”
로베르토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돈이죠. 마음대로 하라고 막 지원해 주시니까 다들 열심히 하던데요.”
“이사장님이 축구를 아주 좋아하나 봐.”
“맞아요.”
스피커에서 경기 시작을 위해 방송을 마치겠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로베르토와 떨어져야 할 시간이 된 걸 안 나준하가 말했다.
“경기 끝나고 이사장님도 한번 뵙고 싶은데.”
“좋아하실 겁니다.”
“그래, 좋은 경기 하자고.”
로베르토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왜 그래?”
“음…… 오늘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짠 대로 안 움직일 거 같아서요.”
“자네 감독 아니야?”
“맞긴 한데…… 때론 선수한테 전적으로 맡겨야 할 때가 있잖습니까? 그때가 오늘인 거 같아서요.”
나준하의 머릿속에는 세 글자가 떠올랐다.
“송현준?”
“예, 며칠 전에 찾아오더니 자기중심으로 경기를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원래도 걔 중심이었잖아.”
“지금은 조연 역할이라면 오늘은 주연 역할을 맡아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정확히 그렇게 얘기했다고?”
“네.”
“……그게 조연이었다고?”
나준하는 당황했다.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도 한국에서 손꼽을 수 있는 선수가 될 거 같은 모습을 보여줬는데, 그게 조연급 활약이었다니.
“뭐…… 걔가 잘하면 좋은 거긴 한데.”
[휘경 중학교 주전 선수 소개입니다! 주장 성시건!]
“뭐야?”
스피커를 통해 이름이 호명되자 성시건이 자기도 모르게 일어났다. 그렇다 보니까 이어서 호명되는 선수들도 한 번씩 일어놨다.
“와아아아!”
“오오오오!”
학생들도 어쩌다 보니 호응을 해주고 있었다.
나준하가 그 모습을 보면서 으쓱했다.
“별걸 다 하네. 젊음이란 좋구만.”
[감독님은 작년에 대단하셨죠? 나준하 감독님입니다!]
주전 선수 소개가 끝나자 감독 소개까지 이어졌다.
나준하의 이름을 아는 학생들이 여태까지 중에 가장 크게 환호했다.
<와아아아아아!>
나준하가 씩 웃으면서 로베르토의 등을 두들겼다.
“기분 좋긴 하네!”
나준하가 만족스러워했다.
“그렇습니까?”
“그래! 좋은 경기 하자고.”
“예.”
이어지는 대영 중학교 축구부 소개를 들으며 두 감독은 악수를 나눴다.
* * *
“정말 네가 말한 대로 하라고?”
노태신의 물음에 또렷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 시작하자마자니까 과감하게 한 번 질러보는 거죠.”
노태신은 의문을 가지면서도 긍정적인 대답을 내놨다.
“으음…… 알겠어. 그럼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 정도는 해 줘. 이런 건 해본 적이 없다고.”
“알겠어요. 패스받고 바로 손가락으로 가리킬게요. 완벽할 필요는 없어요.”
“그러냐.”
무리한 요구일지도 모르는 플레이에도 노태신이 순순히 말을 듣는 건, 경기 시작 직전에도 로베르토가 오늘은 나 중심으로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너희들, 킥오프 준비해.”
“네.”
심판은 양 축구부의 코치들이 전후반 번갈아 가면서 하기로 했다. 지금은 휘경 중학교의 코치가 심판을 맡고 있었다.
“휘슬 불면 시작이다.”
“예.”
노태신이 공 옆에 섰고, 나는 노태신의 옆에 섰다.
경기 시작과 재개를 알리는 킥오프는 공과 모두가 멈춰있는 상황에서 진행된다는 점에서 프리킥이나 코너킥과 유사한 면이 있다.
두 상황처럼 미리 합을 짜놓고 슈팅까지 노릴 수도 있다.
하지만, 골대와 너무 먼 거리였기에 이런 시도는 자주 나오지 않는다. 효과적이지도 않고.
삐익!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과 함께 노태신에게서 공을 건네받았다. 휘경중학교의 진영을 훑어봤다. 수비진까지 전체적으로 올라오고 있는 게 보였다.
손가락으로 중앙을 가리켰다. 노태신은 군말 없이 중앙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공을 발밑에서 굴리면서 상대 팀원들을 관찰했다.
휘경중의 공격수들이 날 압박하기 위해 다가왔고, 미드필더들은 노태신을 따라 움직이면서 라인을 내렸다. 하지만 수비 라인은 여전히 높은 채였다. 뚫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기보단 뚫을 시도를 할 거라고 예상을 못 하는 거다.
나는 볼을 굴리면서 슬금슬금 앞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상대 공격수와 미드필더 하나가 날 막기 위해서 달려든 순간, 노태신에게 외쳤다.
“지금요!”
노태신이 패스를 받기 위해 자세를 낮추면서 상대 미드필더를 등지고 버텼다. 훌륭한 포스트플레이다.
그리고 그동안 나는 땅을 박차면서 몇 걸음 만에 최고속도 근처에 도달했다.
나는 세계 정상급은 아니지만, 세계에서도 상위권 수준으로 발이 빠른 편이다. 볼을 다루는 기술로 최상위권 수준까지 드리블 속도를 올릴 수도 있고.
뭣보다 지금은 젊다.
허벅지가 꽉 차는 느낌을 받으며 땅을 거칠게 박차고 달렸다.
노태신이 내가 달리는 방향으로 공을 살짝 밀어줬다.
필드 위에 주인 없이 덩그러니 남은 공.
휘경 중의 미드필더는 공을 잡기 위해서 달려들었고, 수비수들은 공을 빼앗을 거라고 생각한 건지 방심했다.
뻥!
휘경 중학교의 미드필더보다 한 발자국 먼저 도착한 나는 수비수들의 빈틈으로 공을 내지르고 계속 달렸다.
전력 질주하면서 내지른 거라 목표했던 것보다 더 멀리 나갔지만, 덕분에 나는 속도를 거의 죽이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막아!”
“뭐야!”
한 템포 늦게 깨달은 휘경중 축구부원들이 다급하게 발을 내밀거나 달리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것보다 빠르게 수비 네 명을 뚫은 게 아니라 지나갔다.
누가 보면 비켜주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어어어어? 소, 송현준 선수! 시작하자마자 일대일!]
찬스라는 말도 못 내뱉는 해설자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휘경중의 골키퍼는 굳은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진작 튀어나와야지!”
나준하도 놀란 건지 말실수를 했다. 나준하의 외침에 골키퍼가 순간 자아를 잃었다.
페널티박스 근처까지 왔는데 날 막기 위해 달려 나온 것이다.
“안 돼!”
나준하의 비명이 들리고, 나는 공 밑을 툭 찍어 찼다.
상대 골키퍼가 전력으로 점프하면서 손바닥을 쭉 펴서 건드려 보려 했지만, 공은 그것보다 한 뼘 높은 위치에서 유유히 지나갔다.
공은 빈 골대 앞에 떨어지고, 한 번 더 튕겨서 골망을 흔들었다.
[고, 고오오올!]
[제가 뭘 본 거죠! 왜 이렇게 빠른가요!]
[시작하자마자 송현준 선수가 골을 넣었습니다!]
[며, 몇 초죠?]
[19초입니다!]
방송부 선배들이 당황하고 있는 게 재미있었다.
컨디션은 최고고, 집중력과 몸 상태도 아주 좋다.
오늘 경기는 전반전 40분, 후반전 40분이고 아직 39분이나 남아있었다.
경기장 측면 중앙에 놓인 디지털시계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지만, 아직도 39분이라는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 정도로 빠른 골이었다.
“좋아!”
최고의 시작이었다.
모처럼 공격수 자리에서 뛰어서 그런지 골을 넣었는데도 의욕이 더 끓어올랐다.
휘경중의 축구부원들은 얼빵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나준하도 당황했는지 말을 잃은 채로 날 보고 있었다.
몇 골 더 넣을 수 있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