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33화
“죄송해요.”
소매를 걷어붙이는 나준하의 시선을 피하며 혼잣말로 사과했다.
원래 계획은 전반전 내내 드리블을 활용하는 거였다. 구경하는 학생들에게 즐거움도 줄 수 있으면서 공격적으로 나오는 휘경 중학교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적진에서 드리블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대가 공격할 시간을 줄이면서 뒤로 물러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나준하가 예상보다 전술을 빨리 바꾸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졌다. 전생의 나준하였다면 전술 변화 없이 전반전 내내 얻어맞기만 했을 텐데.
고개를 움직여 휘경 중의 축구부원들을 둘러봤다.
최전방 공격수 자리로 옮긴 성시건과 날 대인마크 하는 우찬우를 제외한 여덟 명이 촘촘한 두 줄 수비진영을 이루고 있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잘 조직된 군대 같아 보였다.
전생에서도 몇 번 상대해 본 적 있는 전술이다.
그래서 쉽게 판단할 수 있었다. 정면으로 부딪치는 건 멍청한 짓이라는 걸. 지금 저들이 선보이는 건 감독 나준하의 상징 같은 수비 전술의 초안이었다.
축구는 팀 스포츠가 맞지만, 유소년 수준에서는 조금 다르다. 유별난 재능을 가진 선수들이 팀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이런 팀을 상대하기 위해 강팀들은 자기들의 플레이에 집중하는 전술을 사용하거나, 상대 팀의 에이스를 견제하는 전술을 선택하는데 나준하는 후자였다.
전생의 나준하는 공격 전술과 지금 보여주는 수비 전술 두 가지를 구상하면서 첫해를 보내고, 전국대회에서는 지금 보여주는 수비 전술로 나온다.
그리고 휘경 중은 이 전술을 사용할 때가 가장 까다로웠다.
대회에서 한 손에 꼽히는 전력을 가진 팀이 제대로 준비한 수비적인 전술을 들고 나왔을 때,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는 몇 년 뒤에 출범할 무리뉴의 첼시가 보여준다. 철저한 두 줄 지역 수비니까 시메오네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비교해야 할까.
아무튼, 날 막겠다고 대놓고 입을 벌리고 있는 휘경 중에게 또 드리블로 도전할 필요는 없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오히려 뒤로 물러나면 다른 약점을 공략할 수 있거든.
상대의 수를 읽어내고, 해법을 찾아내는 과정은 즐거웠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아무리 상대가 초짜 감독이라지만 초보자와 하는 게임도 즐거운 법이니까. 초보자가 노력한다면 더더욱.
대회와 상대의 수준이 올라갈수록 치열해지는 수 싸움은 축구의 또 다른 재미였다.
의중을 파악하려는 건지 눈썹을 찌푸린 채로 날 노려보고 있는 나준하를 향해서 자신감 있게 웃었다. 다른 패턴으로 공격하면 나준하가 어떤 대처를 보여줄지 설렜기 때문이었다.
근데, 나준하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지더니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아…… 망했다.
“비웃어!? 이 자식아! 피하지 말고 덤벼! 왜 뒤로 빠지는 거야?! 우리 놀리는 거냐?!”
도발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승부욕이 잔뜩 오른 나준하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삑, 삐빅!
심판이 잠시 경기를 멈췄고, 코치들이 곧바로 나준하를 말렸다.
로베르토를 비롯한 우리 축구부원들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들로 날 바라봤다. 내가 해결하겠다는 의미로 그들에게 손을 내젓고 나준하에게 곧장 달려갔다.
억울하다.
웃을 만해서 웃은 건데…….
팀을 이끄는 감독들은 예상치 못한 상대 선수의 퍼포먼스나 변칙 전술 때문에 팀이 흔들려도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있다.
특히, 국가대표급 선수거나 강한 팀에만 머물렀던 감독이라면 더 그렇다. 자신과 팀에 대한 믿음이 강하고 기준이 높기 때문이다.
전생의 나준하가 정확히 그 유형이었다.
사람은 좋다. 로베르토 같은 외국인을 받아들이는 데도 편견이 없다. 또, 한국 축구의 발전을 원하는 마음도 진심이다.
다만, 몇 년 지나고 나서부턴 전술 하나만큼은 고집쟁이 꼰대가 된다.
지금 선보였고, 몇 년 뒤에 완성하는 저 수비 전술만 고집하고, 경기 중에 전술을 바꾸는 유연한 시도도 못 할뿐더러 훈련 프로그램도 오직 저 전술 위주로만 굴린다.
오죽하면 나준하가 맡는 프로팀의 팬들은 나고집이라고 부르면서 나가라고 그러고, 다른 프로팀의 팬들은 제발 종신해 달라고 나종신이라고 불렀을까.
그런데 그런 나준하가 바뀔 기미가 보인 것이다.
전생에서 나는 나준하가 국가대표팀을 맡을 역량이 없다고 판단했다. 당연히 내 월드컵 우승 계획에서도 뺐고, 적당히 친하게 지낼 생각만 했다.
사람은 좋았으니까.
그렇다. 기대도 안 했던 나준하가 예상에서 벗어났다.
어떻게 안 웃을 수 있을까.
다만 화가 잔뜩 난 이번 인생의 나준하는 내 속마음을 모르겠지. 알아서도 안 되고.
웃음기를 전부 지운 나는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도발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나준하가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솔직히 말했다.
“경기가 더 재미있어질 거 같아서 설레서 웃었습니다.”
“……더 재미있어질 거 같다고?”
나준하가 김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나준하의 표정을 살폈다. 내 말을 예상 못 해서 그런가 화가 어느 정도는 풀린 것 같았다.
나준하를 더 자극해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과는 뒷전이 됐다.
“예, 나 감독님이 제 개인기를 막기 위해 전술을 바꿨잖아요? 저는 감독님의 전술을 파훼하기 위해 포지션을 바꿨고요. 이런 머리싸움이 재미있어서 그만…… 웃어버린 거죠.”
“우리 전술을 상대하기 위해서 그런 거라고……? 도망친 게 아니라?”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제가 왜 도망쳐요? 두 골이나 넣었는데.”
“크흠.”
휘경 중의 코치가 헛기침을 했다. 진작 옆에 와 있던 로베르토가 사색이 되었다. 눈치 챙기라고 입 모양으로 말하는 걸 봤지만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지금 중요한 건 나준하다. 나준하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게 느껴졌다.
말을 계속하기로 했다.
“나 감독님이 절 잡겠다고 대놓고 함정을 깔았잖아요?”
“그…… 그렇지.”
“저는 함정이 깔린 걸 파악했어요. 근데, 제가 나 감독님의 기분에 맞춰준다고 대놓고 함정을 밟아버린다면…… 그게 더 감독님을 무시하는 행동이 아닐까요?”
“적당히 하자…….”
로베르토가 내 옆에 와서 어깨를 붙잡으며 말렸다.
“괜찮아. 로 감독. 오히려 좋아.”
나준하는 생각을 마친 건지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입꼬리를 조그맣게나마 올리고 있었다.
“그럼, 도망치는 게 아니라는 거지? 우릴 무시한 게 아니라?”
“예, 더 효율적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물러난 거예요.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라고 할까요?”
“하.”
나준하가 헛바람 소리를 내더니,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어서 그런가 까끌거린다.
“건방진 놈, 배포 하나는 좋아. 그럼 마음대로 해봐라. 이 전술은 내가 이탈리아에서 뛸 때 배워온 건데 네가 아무리 잘해도 고생 좀 할걸?”
“일단 부딪쳐 봐야죠.”
“그러냐? 하하하, 그리고 내가 미안하다. 오해해서 분위기를 망쳐 버렸네.”
이번 인생의 나준하가 달라질 거 같다는 강한 직감이 왔다. 다만, 사과만으로 끝날 게 아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저희 악수하고 포옹 한 번 해야 할 거 같아요.”
“……뭐? 왜?”
고개를 살짝 움직여서 운동장 스탠드 쪽을 가리켰다. 학생들이 숨죽이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유명인 나준하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게 된 거다.
어깨를 으쓱했다.
“보는 사람이 많잖아요?”
“나, 참, 너 진짜 중학생 맞냐? 못 당하겠네.”
“화해했다는 표시를 해 줘야죠. 안 그러면 친구들이랑 선배들이 오해해서 저한테 질문 세례를 할 거예요.”
“허, 참. 그래.”
나준하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나도 맞잡았다. 나준하가 내 손을 끌어당겨서 화해의 포옹까지 마쳤다.
<와아아아!>
조용했던 스탠드에서 환호성이 나왔고, 박수 소리도 이어졌다.
사건을 끝마친 후, 경기장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야?”
윤태상을 비롯한 우리 축구부원들이었다.
“경기가 재미있어서 웃었는데 나 감독님이 도발이라고 생각했나 봐요.”
“으음…… 그럴 만하지.”
윤태상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유를 들은 축구부원들은 흩어졌다.
노태신은 내게 한마디 했다.
“미친놈이냐? 잘할 때 까불면 백태클 들어오는 거 몰라? 네가 그렇게 생각 안 해도 상대는 나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 앞으로 조심해.”
“예, 선배님.”
“그래.”
노태신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공격진으로 돌아갔다.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았기에 오히려 기분 좋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윤태상은 내게 물어볼 게 있는 거 같았다. 윤태상을 빤히 바라보자 윤태상이 입을 열었다.
“남은 경기는 어떻게 풀어갈 거야? 내가 뭘 도와주면 돼?”
당연히 변한 건 나준하 뿐만이 아니다. 체육대회 결승전 출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나비효과들이 사람들을 바꾸고 있었다.
발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건 환영이다.
“평소처럼 뒤에서 조율할 거예요. 다만, 가끔 공격진까지 올라갈 생각인데 그때는 제 자리를 메꿔주시면 좋겠어요.”
“그래. 알겠어.”
올해는 몸 관리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하는 게 월드컵 우승이라는 목표를 이루는 데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친선경기 때는 적당히 하고, 전국대회에서 훌륭한 기량을 뽐내 프로에 갈 자격을 얻는 게 축구부에서 이뤄야 할 목표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내가 압도적이고 신선한 스타일의 경기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많은 사람이 자극을 받고 변한다면, 내가 발견하지 못한 재능이 열매를 맺도록 나비를 보내줄 수 있다면.
앞으로는 내가 기억하고 익혀온 온갖 부분 전술과 기예를 선보일 것이다.
삐익!
“가죠!”
“그래!”
경기 재개를 알리는 휘슬 소리, 윤태상과 나는 포지션을 찾아갔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재개된 경기는 심심하게 흘러갔다. 나는 느긋하게 공을 돌렸고, 휘경 중은 뒤로 물러난 진영이니 공을 빼앗을 기회가 적었다.
그들이 공을 잡아도 공격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전체적으로 내려앉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우리 축구부의 공격은 잘 막아내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상대 선수들을 관찰했다. 내 옆에는 휘경 중의 미드필더 우찬우가 붙어 있었고, 우찬우는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그림자처럼 달라붙어서 공을 빼앗으려고 시도했다.
“패스!”
공이 오면 우찬우를 등진 채로 공을 받고 다시 패스.
그것만 반복하니 휘경 중의 경계가 점점 옅어지는 게 느껴졌다. 수비형미드필더로 돌아간 나는 당장 위험하지 않다는 거겠지.
시선이 줄어들고 있었다.
“패스!”
이번에도 공을 받았다. 우찬우의 몸싸움도 소극적으로 변했다. 내게 패스했던 윤태상에게 공을 되돌려 주자, 그러면 그렇지 하는 느낌으로 우찬우가 내게서 떨어졌다.
“다시 패스!”
윤태상이 공을 잡기도 전에 빠르게 외치면서 우찬우를 제쳤다. 윤태상은 기다렸다는 듯 내 앞의 공간을 향해 패스했고, 날 대신해서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를 채워줬다.
내 뒤에서 우찬우가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포지션을 옮기고 처음으로 드리블을 시작하고 있었다.
아까와는 확실히 달랐다.
휘경 중의 축구부원들은 내게 달려들지 않았다. 미드필더 네 명, 수비수 네 명은 골대 앞에 두 줄로 서 있었다.
측면으로 패스하든 말든 슈팅했을 때 위험한 지역만 수비하겠다는 태도였다.
좋은 생각이긴 하다.
골대 주변과 30m 이하의 중거리 슛을 할 수 있는 공간만 막아낸다면 골키퍼가 처리할 수 있는 쉬운 슈팅만 날아올 테니까. 크로스는 휘경 중의 훌륭한 수비들이 해결해 줄 테니까.
하지만, 약점이 없는 전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두 줄 지역 수비 방식에는 약점이 있었다.
“이이이익!”
달려드는 우찬우를 가볍게 제쳐내고, 사이드라인을 타고 올라오는 좌풀백에서 패스하는 시늉을 했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향했다.
당연히 패스하지 않고, 왼발로 공을 오른발로 옮겼다.
휘경 중은 의식하기 힘들 거다. 내게는 중거리 슛이라는 무기가 있다는걸, 이번 친선경기를 성사시키기 위해 내가 보여줬던 중장거리 슛을 저들은 모를 수밖에 없다.
거리는 35m 정도, 그때보다 가까웠다.
월드컵 우승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확실한 복권은 내가 직접 긁고, 미처 발견 못 한 복권들은 자연스럽게 긁힐 수 있게 환경을 조성해 줘야 한다.
친선경기에서 보여주는 새롭고 신선한 기술들은 저들에게 큰 영감을 줄 것이다.
그러니까, 시원하게 때리자.
우찬우를 제쳐낸 나는 사실상 노마크였기에 훈련장에서 하듯 여유 있게 도움닫기를 했고, 발등으로 정확히 공의 가장 튀어나온 부분을 후려 찰 수 있었다.
뻐엉!
휘경 중 축구부원들은 제 자리에 선 채로 고개만 돌려서 뒤를 바라봤고, 그들의 눈에는 출렁이는 골망과 바닥에 나뒹구는 골키퍼가 보였다.
[으아아악! 송현준! 해트트릭입니다!]
방송부 선배들의 해설을 뒤로 한 채 나준하를 바라보았다. 나준하는 당황하지 않았다. 옆의 코치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음엔 휘경 중 축구부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일부는 얼이 빠져 있었고, 몇몇은 분노한 게 보였다.
“아악!”
“정신 안 차려!”
이제 저들은 드리블만큼이나 슈팅을 의식할 거다. 내가 공을 잡을 때마다 시선과 몸이 쏠릴 테고, 그 현상을 활용해서 우리 팀원들에게 패스할 거다.
그렇게 하면 상대는 어떻게 나올까? 당장은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나중에는 방법을 찾아오지 않을까?
계속해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앞으로 이들이 어떻게 변할지 기대돼서 전국대회까지 최대한 여러 곳에 씨앗을 뿌려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