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34화
삑, 삐이이이익!
심판의 우렁찬 휘슬 소리와 함께 친선경기가 끝났다. 김채아는 열심히 손뼉을 치면서 동료들을 맞이하고 있는 송현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송현준은 평소처럼 웃고 있었지만, 오늘은 왠지 다르게 보였다.
[재미있는 경기였어요. 우리 축구부원들이 멋진 경기를 보여줬죠.]
[맞아요. 특히 송현준 선수가 굉장했어요. 아쉽게도 전반전이 끝나자마자 교체로 나갔지만요.]
방송부원들이 송현준 얘기를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전국에서 손꼽히는 팀을 상대로 경기를 혼자 지배하다니.
다른 종목이지만, 같은 운동부가 된 지금은 저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실감이 왔다.
[전반전으로 충분했어요. 혼자 세 골을 넣었는데 그게 참, 와…… 대단했어요.]
[맞아요.]
[송현준이 나간 후반은 위험했긴 했죠.]
[휘경 중학교가 왜 전국구인지 알겠더라고요. 후반전 동안 네 골을 넣어버리니까 심장이 아팠어요.]
[그래도 우리 선수들이 두 골을 만회했잖아요?!]
[맞죠! 잘했어요.]
[그렇죠, 그러면…….]
[음…….]
[…….]
[이제 우리는 뭐 해야 하죠?]
할 말이 떨어진 건지 방송부원이 질문을 던졌다. 경기 중간에도 이런 실수를 하곤 했다. 전문 해설자가 아니니 당연한 일이었다.
“방송부 오빠들 귀엽다.”
김채아 옆에 앉은 이지혜가 그렇게 말하면서 까르르 웃었다.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 방송부원들의 실수는 상황 자체가 재미있었다.
[야, 야!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냐?! 소리 다 나가고 있는데!]
[헐…… 깜빡했네.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냐?]
대놓고 뻔뻔하게 나오니 불편하지 않았다.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김채아도 따라 웃었다.
[아! 자, 자기소개 하면서 마무리하면 될 거야. 방송부원 김민수!]
[방송부원 이호성이었습니다. 감사해요! 사랑해요, 여러분!]
[그럼 수고하세요!]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잡음이 사라졌다. 친선경기도 끝나고, 방송도 끝난 것이다.
김채아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고생한 방송부원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방송부 오빠들도 송현준 얘기를 많이 하네. 대단하긴 하더라. 경기 구경하다가 춤 까먹을 뻔했다니까?”
하프타임에 공연을 마친 김채아의 친구 김혜진은 어느새 무리에 합류해 있었다. 김채아가 말했다.
“혜진이 너도 공연 짱이었어. 연예인인 줄.”
“에, 에이, 채아야, 부끄럽게 왜 그래.”
얼굴이 빨개지면서 손사래 치는 김혜진을 보고 히죽 웃은 정은영도 합류했다.
“맞아, 경기 중이라 시끄러워서 못 말했는데 진짜 멋있더라.”
“최고였어.”
이지혜까지 말을 보태자 김혜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주 작게 고맙다고 말했다. 김혜진을 보며 김채아와 친구들은 즐겁게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서 웃을까?”
김채아의 전 담임선생님 신세연이 끼어들었다. 이지혜가 대답했다.
“혜진이 칭찬하니까 부끄러워해요. 아까 춤 멋있었죠?”
“칭찬받을 만하던데? 멋지던데?”
“아, 쌤!”
김혜진이 발끈하자 신세연도 짧게 웃었다. 신세연은 김채아에게 물었다.
“채아야, 선생님은 이제 뒷정리하러 가봐야 해서 그런데…… 오늘 재미있었니?”
“네!”
김채아의 빠른 대답에 신세연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다행이다. 거기서는 잘 지낸다고 했으니까……. 앞으로도 꾸준히 열심히 하고……. 나중에 유명한 선수 되면 사인해 주는 거 잊지 말고.”
“당연하죠…….”
신세연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김채아는 쑥스러워서 작게 대답했다.
신세연은 부원들을 데리고 떠났다. 김채아는 몇 명과 인사하면서 그들을 보냈다.
“우리만 남았네.”
“청소라도 도울까?”
“그러자.”
김채아와 친구들은 눈에 보이는 쓰레기들을 주우러 돌아다니기로 했다.
“송현준이라고 했지? 걔 누구야?”
“그렇게 잘하는 줄 몰랐어.”
“아까 송현준이 한 거 어떻게 하는 거냐?”
“내가 물어봐 줄까? 같은 반인데.”
막 친선경기가 끝났기 때문에 학생들은 경기 얘기를 하고 있었고, 그중에서 송현준 얘기가 가장 많았다.
김채아는 내심 뿌듯하기도 하고, 승부욕도 생겼다.
‘나도 더 잘할 거야.’
그때, 누군가가 김채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간지러워, 은영아.”
“흐흐.”
“……왜 그렇게 웃어?”
“현준이 칭찬받으니까 좋아?”
“아, 아니, 내가 언제.”
김채아의 변명을 들은 이지혜가 해맑게 말했다.
“얼굴에서 다 티나.”
“……아, 문자 왔다. 잠깐만.”
“이게 어딜 도망가려고.”
“진짜야, 봐.”
얼마 전에 구입한 휴대폰이었다. 휴대폰을 펼치니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와 있었다.
다만, 내용은 익숙했다.
-나 송현준인데 어디서 볼 거야? 지금부터 휴간데.
“아.”
김채아는 며칠 전에 송현준과 만나기로 했던 걸 기억해 냈다. 통화 중에 지나가듯 한 말이었기에 시간이나 장소를 정하진 않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오랜만에 대영 중학교에 돌아온다는 설렘과, 친선경기에 몰입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느라 잠깐 잊고 말았다.
“뭔데?”
“누구한테 문자 왔는데?”
김채아는 재빨리 휴대폰을 닫았다. 하지만 이지혜의 눈은 예리했다.
“나 봤어! 송현준이라고 적혀 있었어.”
“오올~.”
“오오!”
정은영과 김혜진의 호응에 머리가 아파졌다. 김채아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얘들아, 우리 점심 먹기로 했었잖아.”
그리고 다른 약속도 잡아버렸다.
“깜빡했는데, 오늘 송현준이 잠깐 보자고 했었거든.”
“헐, 우리 버려지는 거야?”
“채아야 그러면 안 돼.”
“……미안해! 일단 얘기해 보고 오면 안 될까?! 시간은 안 정했었거든.”
* * *
김채아의 사정을 들은 송현준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휴가를 언제 줄지 몰라서 시간까진 못 정했던 거거든. 그러면 오후 다섯 시쯤에 볼래? 한 시간이면 되거든.”
“그래도 돼? 고마워!”
함께 도시락을 먹었던 플라타너스 밑 벤치에서 기다리던 송현준은 어색하게 웃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송현준은 김채아의 뒤쪽을 힐긋거리고 있었다.
그러건 말건 김채아가 물었다.
“그런데 왜 보자는 거야?”
“아니, 채아야. 눈치 없이.”
“둔감해.”
“바보.”
김채아의 뒤를 따라온 친구들이 차례로 질책했다.
김채아의 얼굴이 새빨개지기 시작해서 송현준이 끼어들었다.
“아니,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방학 동안 키가 많이 커서 자세 좀 봐달라고 하려고 했어. 같이 훈련했던 사이니까.”
이유를 들은 김채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친구들의 화살은 송현준을 향했다.
“멍청이.”
“바보.”
“얘가 더 둔감하네.”
송현준은 머리가 지끈거려서 관자놀이를 만지작거렸다. 동시에 민망해하는 김채아를 흘끗 봤다.
송현준이 한숨을 쉰 후, 또박또박 말했다.
“당연히 저녁은 살 거야. 그러니까 너희들 적당히 놀고 다섯 시까지 보내줘. 알겠지? 그럼 김채아 이따 봐.”
송현준은 말을 마치자마자 뛰어서 도망쳤다.
“아, 아니. 그렇게 가버리면.”
김채아가 손을 휘적여 봤지만 송현준은 떠나 버렸다.
정은영과 이지혜, 김혜진이 흥미진진한 얼굴을 한 채로 김채아만 보고 있었다.
이번엔 김채아의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열두 시도 안 됐는데…… 이들의 놀림을 네 시까지 어떻게 버틸지 걱정됐으니까.
* * *
“오늘 경기 어떻게 됐냐니까?”
“……일단 마셔.”
“아, 어떻게 됐냐고.”
“마시라니까.”
대영 중학교의 도덕 선생 배영호의 퉁명스러운 말에 앞에 앉은 지상철이 인상을 찌푸렸다. 배영호는 한숨을 쉬고, 자기가 먼저 술을 마셨다.
지상철과 배영호는 술 먹고 노는 걸 좋아했다. 덕분에 지상철이 대영 중학교에 있는 동안 둘은 친하게 지냈고, 친선경기가 끝난 오늘 술자리까지 만들어진 것이다.
지상철은 어쩔 수 없이 배영호가 따라준 술을 마셨다.
지상철이 말했다.
“이제 됐지?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 거야?”
“네 속 뒤집어질 거 뻔하니까.”
지상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휘경 중학교와의 친선경기는 주변 학교에도 알려져 있었다. 대영 중학교에서 대놓고 홍보하기도 했고, 축구인들을 거쳐서 들려왔으니까.
“……설마 이겼냐?”
“어. 5-4로 이겼다.”
“아씨…… 골은 왜 이렇게 많이 나왔어?”
“……들어야겠냐?”
지상철이 소주를 맥주잔에 반 정도 따른 후 한 번에 삼켰다.
“어.”
“송현준이 전반전에 세 골 넣었다.”
“하…….”
배영호가 지상철의 빈 소주잔에 술을 채우며 말을 덧붙였다.
“살다 살다 그런 건 처음 봤다. 아무리 중학생끼리라지만 혼자 드리블로 다섯 명, 여섯 명씩 제치는 게 말이 되냐?”
“뭐? 휘경 중을 상대로?”
“내 말이. 휘경 중 잘하는 데라면서?”
“과장하지 말고.”
지상철이 정색하고 말하자 배영호가 피식 웃었다.
“과장 같아?”
“……진짜라고?”
“어, 걔 포지션이 대체 어디냐? 그냥 공격수로 뛰어도 되겠던데.”
“하…… 개 같구만.”
욕설을 내뱉은 지상철이 자기 입술을 씹었다.
배영호도 지상철의 자리에 들어온 로베르토나 송현준을 싫어했다. 지상철은 유일하게 배영호와 죽이 맞는 또래 직장 동료였으니까.
그런데 오늘 경기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경기에서 뛰는 송현준은 경이로웠다. 그런 감정을 느낀 이상 무작정 싫어하긴 어려웠다.
“로베 뭐시기는 어떻게 지내는데.”
“이사장이 정말 좋아하니까 잘 지내지. 저번에 전세버스 빌려서 서울 갔잖아? 그거 매주 빌려준대. 사비로.”
“뭐? 하, 진짜, 나 있을 때는 지원도 제대로 안 해줘 놓고. 그딴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거기에 오늘 친선경기도 관심 꽤 받는 거 같더라고. 앞으로 더 좋아하면 좋아했지 싫어하진 않을걸?”
“친선경기가 잘 되다니? 친선경기가 친선경기지 잘 될 게 있냐?”
지상철의 상식적인 물음에 배영호는 고개를 저었다.
“대한일보 같은 큰 신문사는 아니지만, 지역신문 기자들 몇 명 와서 촬영하더라.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친선경기를 준비했다~ 이런 식으로 기사 쓰려나 봐. 이사장이 얼마나 좋아하던지.”
“허…… 기분 참 죽이네.”
자길 내쫓은 직장이 승승장구하는 얘길 계속 들은 지상철의 속은 잔뜩 꼬여 있었다.
지상철의 마음을 짐작한 배영호가 위로를 건넸다.
“술이나 마시자. 네가 전국대회에서 박살 내면 되잖아.”
“……그건 그렇네.”
지상철은 배영호가 건네는 술잔을 받았다.
“안주도 좀 먹고.”
배영호의 걱정에도 지상철은 안주를 먹지 않았다.
지상철의 배배 꼬인 속은 풀리기는커녕 더 뒤틀리고 있었다.
* * *
전북축구협회 건물의 협회장실, 내년 초로 예정된 중고등학생 춘계 전국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쌓아놓은 서류들이 전부 서류보관용 상자 안으로 쑤셔 넣어지고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전북축구협회장 임선호>라는 제목의 액자 속 인물이 가장 열심히 서류를 던져넣으며 직원을 재촉했다.
“더 빨리해. 그 영감님 깔끔한 거 좋아한다고.”
“예~ 저는 손 안 쉬고 있습니다.”
“나도 그러고 있거든?!”
직원은 물심양면 협회장 임선호를 돕고 있었다. 책상 위에 널브러진 서류를 상자에 다 집어넣은 후, 협회장이 투덜거렸다.
“왜 갑자기 오신다는 거야…… 상자 좀 옮겨줘.”
“예~.”
직원이 상자들을 한 아름 안고 협회장실을 떠났다. 협회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명패를 비롯한 책상 위 물건들의 각을 맞췄다.
“이제 차를 끓이면…….”
그때, 똑똑하고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바로 문이 열렸다.
“어이~ 임 협회장~ 나왔어.”
협회장은 곧장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지금 차를 준비하고 있으니…… 일단 앉으시죠.”
“차는 무슨, 물이나 한 잔 줘.”
“예.”
전북축구협회의 고문을 맡고 있는 이 남자는 협회장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이 중년 남성의 이름은 김종엽.
한때는 한 기업의 사장까지 올랐었고, 지금은 은퇴해서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인물이었다.
“드시죠.”
김종엽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물을 받아 마시면서 협회장실을 둘러 봤다.
“시원하구만. 사무실도 깨끗하게 해 놨고.”
협회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한숨 돌렸으니 협회장은 궁금해졌다. 김종엽이 무슨 일로 이곳에 오겠다고 했는지.
원래였다면 이 주 후에 보낼 전국대회 공문을 준비할 시간이었는데 김종엽의 방문 때문에 다 꼬여 버렸다.
협회장의 마음을 읽은 걸까, 김종엽은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협회장 앞에 놨다.
“뭐 때문에 왔는지 궁금하지?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서 가져왔어.”
“……무슨, 아이디어 말씀이신지…….”
“전국대회 말이야, 홍룡배.”
홍룡배는 중고등학교 춘계 전국대회의 이름이었다. 협회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준비는 다 끝나가는데…….”
“알지, 근데, 이거 보고 얘기하자고.”
협회장은 신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신문 맨 위에는 한밭일보라고 적혀 있었다.
“이거 대전 신문 아닙니까?”
“맞아. 한 장 넘겨봐.”
협회장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신문을 넘기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제목이 있었다.
<“우리는 축제를 만들어요.” 대영중에서 벌어진 놀라운 친선경기>
협회장은 내용을 읽기 위해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