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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인드 축구천재-135화 (149/173)

리마인드 축구천재 135화

“꼼꼼하게 읽어.”

“당연하죠.”

“그렇다고 밑줄까지 칠 필요는 없고.”

“김 고문님이 읽어보라고 하셨는데 진지하게 봐야죠.”

전북축구협회장 임선호는 기사를 꼼꼼하게 읽고 있었다. 전북축구협회의 고문을 이십 년 넘게 맡아 온 김종엽이 허튼소리를 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사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대영 중과 휘경 중이 친선경기를 치렀고, 송현준이라는 선수의 해트트릭 덕분에 대영 중이 승리했다.

대영 중의 이사장은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해서 친선경기를 축제처럼 열었다. 방송부원들이 해설을 맡고, 사진부원들이 포스터를 만드는 등 친선경기는 흥겨운 분위기에서 치러졌고, 학생들은 관객으로서도 열띤 응원을 보냈다고 한다.

대전교육청에서는 이 축제 소식을 듣고 학교에 표창까지 수여할 계획이다.

“어때?”

임선호는 김종엽을 바라보았다. 김종엽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육식동물의 눈처럼 흉흉한 안광이 실시간으로 뿜어지는 것 같아 임선호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약간 움츠렸다.

올해 협회장에 부임한 임선호는 경험이 부족했다. 그래서인지 김종엽은 지금처럼 임선호를 시험하곤 했다. 대답이 틀리면 호통이 떨어졌기에 임선호는 신중하게 고민하고, 대답했다.

“김 고문님의 의도를 알 것 같습니다.”

“그래?”

“흥미롭기도 해요.”

“그렇지.”

“대영 중의 송현준이라……. 아는 축구인들 사이에서 몇 번 얘기가 나온 학생이죠. 갑자기 괴물이 나타났다고요.”

“음?”

김종엽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마침 임선호는 기사에 실린 사진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사진 밑에는 작은 글씨로 ‘관객으로 나온 학생들에게 손을 흔드는 송현준 학생(중학교 1학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명문 휘경 중을 상대로 전반에만 해트트릭이라니, 다음 전국대회의 스타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이거죠? 김 고문님의 뜻이?”

임선호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들었다.

“내 뜻이 뭔데?”

“송현준처럼 스타가 될 수도 있는 원석들의 자료를 미리 모아둬서, 언제든지 매스컴에 전달할 수 있게 하라는 겁니다. 일본의 고시엔처럼 우리도 학생 스타를 만들겠다는 건 전북축구협회장 선거 당시 공약에도 들어 있었으니까요. 성시건이나 우찬우 같은 선수들의 자료는 이미 다 준비돼 있지만…… 역시 고문님입니다. 명문이 아닌 중학교의 에이스들도 조사해야 한다는 걸 짚어주시다니.”

임선호는 말을 이어 나갈수록 자기 생각이 맞는다는 확신이 들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대답한 것 같아서 뿌듯했다. 그래서 칭찬을 기대하며 김종엽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김종엽이 눈을 감더니 미간에 주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사람아!”

이어서 김종엽이 호랑이가 울부짖는 것처럼 호통을 쳤다. 임선호는 호랑이를 앞에 둔 양처럼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자네, 협회장 선거 때 했던 공약 기억해?”

호통 뒤에는 가르침이다. 임선호는 언제 쭈그러들었냐는 듯 허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우리 협회에서 주최하는 중‧고등학생 전국대회를 토너먼트에서 리그제로 바꾸겠다고 했습니다.”

“맞아. 자네 계획은 상당히 구체적이었어. 그래서 내가 자넬 밀어줬던 거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읽어봐. 중요한 부분이 어딘지 생각하면서.”

임선호는 기사를 다시 읽고 고개를 들었다.

“모르겠습니다.”

“관객이 있었다잖아. 그것도 학생 관객.”

“……예?”

학생 관객? 임선호는 김종엽이 무슨 의도로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김종엽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임 협회장. 자네 공약을 다시 생각해 봐. 전국대회를 리그제로 전환하면 어디서 경기할 거 같아?”

김종엽이 협회장이라고 부르면 더 진지한 거다. 임선호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김종엽의 진짜 의도를 깨닫는 데 성공했다.

“당연히 학교 운동장…… 아! 리그제로 전환하면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할 수 있겠군요. ”

“그렇지. 자네와 내 목적은 언제나 리그제 전환이었으니까 그것부터 생각했어야지.”

“아아,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번 전국대회 준비 끝나는 대로 방문해서 대영 중의 이사장과 감독을 만나봐야겠습니다.”

“그래, 행동력은 좋구만. 그런데 말이야…… 이 기사에는 더 중요한 내용이 있어.”

임선호는 잘 훈련된 군인처럼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사를 다시 읽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모르겠다.

김종엽은 이번에는 호통치지 않았다.

“이 부분을 봐.”

“예? 예.”

김종엽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친선경기가 흥겨운 분위기에서 치러졌다고 적혀 있었다.

“흥겨운 분위기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이게 뭐가…….”

김종엽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임선호의 말을 끊었다.

“임 협회장. 자네가 준비하고 있는 전국축구대회의 이름이 뭐야?”

임선호는 눈치껏 자세를 고쳐서 더 바르게 앉았다.

“홍룡배입니다.”

“홍룡배가 왜 홍룡배인지는 알지?”

“이홍룡 축구선수님을 기념해서…….”

“이홍룡 선생님이 뭘 했길래 기념하는데?”

김종엽은 이홍룡을 선생님이라고 부를 만큼 친밀하게 지냈다. 예민한 주제였다. 이홍룡이 죽기 직전 대회의 이름을 홍룡배로 바꾼 게 김종엽이었으니까.

“유소년 축구 발전에 가장 힘쓰셨던 원로님이셨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소년 전국대회를 기획하고, 개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아, 그러면 선생님은 유소년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하셨을까?”

“신나게 해야 한다고…….”

김종엽이 처음으로 흡족한 얼굴을 했다.

“잘 아네, 그러면 자네도 뭔가, 이 기사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나?”

“예에?”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임선호는 김종엽이 감성적으로 말하는 걸 처음 봐서 당황했다. 김종엽은 즐거워 얼굴로 이어서 말했다.

“오늘 아침에 이 기사를 보고, 대영 중과 휘경 중이 경기하는 모습이 떠올랐어. 구경하는 학생들이 웃고 떠들고, 축구부원들은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런, 흥겹고 신나는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단 말이야.”

“예…….”

평소와 분위기가 달라진 김종엽을 임선호는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라 얌전히 있었다.

김종엽은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잠시 잊고 살았던 말도 떠올릴 수 있었지.”

-종엽아, 축구는 신나게 하면 충분해.

* * *

이홍룡은 김종엽의 국민학생 시절 체육 선생님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올림픽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뛰었던 이홍룡은 평일에는 국민학교 학생들과 지역 내에서 찾아오는 학생들을 무료로 가르쳐 줬다.

선생님은 항상 바빴다. 주말이 되면 다른 지역으로 축구 수업을 하러 다니고, 여러 팀을 창설해서 팀 간의 경기를 주선하곤 했다.

운동신경이 말짱 꽝이었던 김종엽은 축구 수업을 열심히 듣고, 열심히 연습했지만 잘하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어느 날, 경기를 망치고 시무룩해진 김종엽에게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해줬다.

-종엽아, 축구는 신나게 하면 충분해.

-저처럼 못 하는 사람도요?

-뭐…… 너는 선수가 될 수 없겠지. 하지만 괜찮아, 종엽이는 수업도 연습도 최선을 다해서 하잖아? 모두가 선수가 될 수는 없어. 열심히, 즐겁게 해봤다는 경험은 나중에 뭘 하게 될지 모르는 네 인생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러니까 경기에서는 긴장 풀고 좀 웃으면 더 잘할…… 어? 종엽아? 우니?

-저, 저는…… 선수가 될 수 없는 거예요……?

TV에서 본 국가대표 선수처럼 되고 싶었던 김종엽은 선수가 될 수 없다는 말만 듣고 원통하게 울었다.

지금의 김종엽이 생각해 보면 웃기는 일이었다. 이홍룡은 재능이 심각하게 부족해 보이는 김종엽을 위로하려고 했던 건데 말이다. 이홍룡은 자주 이런 실수를 했다. 말주변이 부족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김종엽은 그 자리를 도망치듯 떠났다.

그렇다고 해서 축구 수업을 빠지지는 않았다. 분한 마음이 생겨 더 열심히 했다. 결국 학교에서 꽤 축구를 잘한다는 소리까지 듣게 됐다.

물론, 축구선수는 되지 못했다. 이홍룡의 말대로 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날부터 치열하게 연습했던 기억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고, 어른이 되어서도 치열한 삶을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김종엽은 한 기업이 대기업이 되는 데 크게 기여하고, 회장의 신뢰를 받으며 꾸준히 승진해 결국 사장직에 오르게 된다.

그 사이 정부 주도로 축구 리그가 창설되었고, 김종엽은 경기가 있는 날만 쉬었다.

‘가람중공업의 김종엽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려면 축구장으로 가야 한다.’

기업가들 사이에서 그런 말이 떠돌 만큼 김종엽은 축구광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김종엽은 사장이 되자마자 은사로 생각했던 이홍룡을 찾아갔다. 노인이 된 이홍룡은 여전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너희들은 신나게 축구 하면 충분해.

이홍룡은 자신에게 해줬던 말을 다른 아이들에게 해주고 있었다. 김종엽은 가슴 한편이 찡해지는 걸 느꼈다.

김종엽은 그날부터 이홍룡을 자주 찾아가서 이홍룡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술잔을 나누며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했고, 대한축구협회의 이사직을 병행하며 이홍룡이 학생전국대회를 여러 번 개최하는 걸 돕기도 했다.

그리고, 이홍룡이 죽기 직전 전북축구협회에서 매년 주최하는 학생전국대회의 이름을 ‘홍룡배’로 바꿨다.

이홍룡은 죽기 직전 홍룡배 소식을 듣고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그 후 김종엽은 이사 자리에서 물러나 전북축구협회의 고문이 되었다. 몇 년 뒤에는 가람중공업의 사장직도 그만뒀다.

김종엽이 고문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이홍룡의 뜻이 이어지고 있는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이홍룡이 죽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4강 제도였다. 진학하고 싶은 학교에 따라 전국대회에서 최소 8강, 보통 4강 이상에 올라야 상위 학교로 진학할 수 있다는 이 제도는 여러 병폐를 낳고 있었다.

병폐 중에서도 학생들이 점점 더 독기를 품게 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기본기를 배우면서 즐겁게 축구 해야 하는 유소년 선수들이 프로 축구 선수들처럼 어떻게든 성적을 내기 위해 아득바득 뛰고 있었다. 경쟁에서 탈락한 학생들은 축구를 증오하기도 했다.

이홍룡 선생님의 뜻과 반대로 가고 있는 모습을 볼수록 김종엽은 화가 났다.

하지만, 이 제도로 이득을 보는 사람과 일을 벌이기 싫어서 기존 제도를 유지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협회에 득실거렸다.

축구협회에 돈을 대고 있는 가람 기업의 사람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김종엽은 당장 제도를 손보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4강 제도 때문에 생긴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유소년 축구가 오직 전국대회만을 목표로 하다 보니, 대회에서 일찍 탈락한다면 공식 대회를 일 년에 열 경기도 못 치르는 문제를 말이다.

그날부터 김종엽은 주기적으로 학생 리그를 열자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번거로운 일이었기에 협회 사람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심지어 작년 월드컵 4강이라는 쾌거를 근거로 한 임원은 ‘지금도 이렇게 대단한 선수들이 나오는데 유소년 시스템을 손보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했다. 또, ‘선수로 뛰어본 적 없으니 그런 거다. 원래 유소년 때는 맞으면서 이 악물고 하는 거다.’라는 말까지 들었다.

이후 의욕이 떨어진 김종엽은 더 이상 리그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

김종엽은 생각에서 빠져나와 전북축구협회장 임선호를 바라보았다. 임선호는 김종엽이 생각에 잠긴 걸 배려하기 위해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임선호는 김종엽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젊은이였다. 40대였지만, 김종엽이 보기엔 한창이었다.

의욕이 떨어진 김종엽 앞에 나타난 임선호는 훌륭한 도피처였다. 임선호의 ‘전국대회를 몇 년에 걸쳐서 리그제로 전환한다.’라는 계획을 도와주는 거로 심리적인 부담을 덜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우연이라는 건 대단하다. 오늘 아침 우연히 본 대영 중학교의 기사가 김종엽을 움직이고 싶게 만들었다. 송현준이라는 학생의 웃는 모습이 정말 즐거워 보여서일까.

제도와 규칙이라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엮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점점 더 바꾸기 어려워진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김종엽은 그 점을 알면서도 임선호에게 자기가 할 일을 떠넘기고 있었다. 알고 있었으면서 외면했다.

무언갈 바꾸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점을 김종엽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결심을 마친 김종엽이 말을 꺼냈다.

“자네 계획 말이야. 올해부터 시작하면 안 되겠나?”

“예?”

“리그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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