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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인드 축구천재-136화 (150/173)

리마인드 축구천재 136화

협회장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소리만 임선호의 귀에 들리고 있었다.

임선호는 김종엽이 진지하게 리그제 전환 얘기를 꺼냈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제대로 얘기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 됩니다. 못 합니다.”

임선호는 두 번이나 부정하면서 이유를 덧붙였다.

“김 고문님, 대회까지 5개월 남았습니다.”

“……임 협회장.”

“예.”

“기억하나? 자네가 자네 취임식 뒤풀이 자리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김종엽이 뜬금없이 화제를 돌렸다. 임선호는 잠깐 멈칫했다가 김종엽의 물음에 답했다. 취임식 날이니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홍룡배를 시작으로 유소년 축구에 리그제가 도입되면 좋겠다는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러자 협회 이사 한 분이 김종엽 고문님과 비슷한 얘기를 한다면서……. 작년에 협회 사람들이 반대해서 끝난 얘기라고 다른 목표를 가져보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죠.”

한 임원이 앞으로의 목표를 물어봐서 솔직히 대답했을 뿐이었다.

협회 사람들은 홍룡배를 리그제로 바꾸겠다는 계획에도 부정적이었다. 다만, 홍룡배의 경기 숫자를 늘려보겠다는 계획에는 나쁘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리그제와 단순히 경기 수를 늘리는 건 엄연히 다른 분야였으니까 그럴 것이다.

김종엽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맞아, 작년 월드컵이 끝나고 리그제 얘길 꺼냈다가 거절당했지.”

김종엽이 계속 말했다.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해. 그런데 말이야, 작년에도 올해에도 그랬던 사람들이…… 몇 년 뒤에는 생각을 바꿀까? 갑자기 ‘리그제 찬성입니다’라면서 마음을 바꿀까?”

임선호가 입을 다물었다.

김종엽이 눈을 부릅뜨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아니야.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해.”

임선호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제 계획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서 4년 뒤에 리그제로 바꾸는 거였고, 김 고문님도 제 계획을 지지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임선호는 이십 대 후반까지 프로 축구 선수였다. 운도 실력도 없는 후보급 선수여서 여러 프로팀을 돌아다니면서 열 경기도 뛰지 못했고, 이십 대 후반에 선수를 그만두고 감독을 목표로 코치 일을 시작했다.

코치는 3개월 만에 그만뒀다. 행정적으로 답답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축구에만 집중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상하고 답답한 제도가 정말 많았다.

그래서 임선호는 진로를 한 번 더 바꿨다. 늦은 나이에 대학교에 들어가서 졸업장을 따고, 축구협회의 직원으로 들어간 것이다.

특히, 처음으로 발령받은 유소년 축구대회를 관리하는 부서에서 임선호는 유소년 축구 제도를 바꾸고 싶다는 목표를 가지게 됐다. 목표를 이루려면 협회장 같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임선호는 잠을 줄이며 사람을 만나고 일했다. 여러 축구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운영하는 데 큰 기여를 하며 협회장 자리를 얻기 위한 성과를 하나씩 올렸다.

그렇게 올해 처음으로 협회장 선거에 출마한 임선호는 경쟁자들의 나이나 경력이 10년은 더 많은 걸 보면서 당선을 포기했다. 이번 선거는 좋은 경험을 쌓는 거로 만족하기로 했다.

하지만, 전북축구협회의 고문인 김종엽이 오늘 아침처럼 갑자기 찾아왔다.

-오늘 할 일 한 시간 내로 마무리하고 나랑 술 한잔하자고.

술자리에서 김종엽은 임선호를 칭찬했다. 임선호가 협회장 선거를 위해 제출한 계획서를 내밀며 자신도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줬다.

임선호는 협회에 들어온 후 가장 큰 기쁨을 느꼈다.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을 만난다는 건 그만큼 행복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임선호는 실망했다.

“제 계획대로는 안 된다는 겁니까?”

“그래, 그때 나는 자네 계획서를 잘못 봤어. 자네의 계획서에는 헛된 희망이 가득 차 있거든. 자네 의견을 모두 좋게 생각하게 될 거라는 헛된 희망 말이야.”

임선호가 눈을 내리깔았다. 심장이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계획서는 계획서일 뿐이야. 계획이 뭔가?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정리해놓은 거지? 실망하지 말게. 중요한 건 목표야. 목표를 더 잘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수단과 방법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거야.”

임선호가 고개를 들었다. 김종엽이 웃었다.

“난 자네 목표가 여전히 마음에 들거든.”

임선호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풀리는 걸 깨달았다.

임선호가 물었다.

“어떻게요? 리그제 전환은 당장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말을 꺼냈으면 비슷한 방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김종엽이 기다렸다는 듯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말했다.

“완벽한 리그제를 하자는 게 아니야. 홍룡배의 예선전을 지역리그로 치르면 어때? 주최자…… 그러니까 자네를 비롯한 협회에서 공평하게 조를 짜고, 11월부터 시작하는 거지. 각자 학교의 운동장에서 홈&어웨이 방식으로. 경기는 영상으로 남겨서 문제가 생기면 사후 처리 확실하게 하고, 심판도 파견해 주면 되잖아. 어때?”

임선호는 관자놀이가 강하게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일단 공평하게 조를 짜는 것부터가 문제고, 저렇게 하면 최소한 경기 결과 확인하고 영상으로 남길 사람 하나, 다른 일을 처리할 직원과 심판들이 잔뜩 필요했다.

더 근본적인 문제도 있었다.

“일할 사람은 둘째치고 예산이 정해져 있는데…… 위에서 볼 때 이런 불필요한 일 때문에 추가 예산을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김종엽은 천천히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불필요한 일로 보일 수 있다. 이미 전국대회들이 있는데 당장의 이득 없이 규모를 키울 근거가 없었으니까.

축구협회에 예산을 대고 있는 가람기업의 회장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다.

기업가는 결국 돈이다. 축구협회에 돈을 대는 건 이미지를 포함해 돈이 될 구석이 꽤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종엽도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을 때는 달랐다.

-종엽아, 애들 축구는 신나게 해야 한다. 그거면 돼.

김종엽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굳게 다짐했다. 오늘 신문은 이홍룡이 죽고, 십 년 넘게 어중간한 태도만 보였던 자신을 움직일 계기를 만들어줬다.

자신이 움직일 때가 되었다는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기사 하나 보고 급발진이나 다름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산은 내가 책임질 거야. 지금 축구협회장이 어디 소속인지 알지?”

“가람…… 소속이긴 한데 고문님은 몇 년 전에 그만두셨잖습니까? 말은 해볼 수 있겠지만…….”

임선호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종엽이 말했다.

“복귀하면 돼.”

“예?”

가람으로 돌아간다면 가능했다. 선생님이 죽고, 일하는 재미를 잃어버려 회사 일도 그만뒀지만…… 다시 한번 불태워 볼 때가 됐다는 느낌이 왔다.

은퇴 후에도 명절마다 가람기업의 회장을 찾아가서 식사를 함께했었다. 회장은 매번 집에는 그만 오고 회사로 돌아오라고 얘기했다. 심지어 이번 추석에도.

복귀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서 잘하는 게 문제지.

“그렇게까지 하신다고요?”

임선호가 다시 한번 물었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표정이 굳어 있었다. 김종엽이 부드럽게 말했다.

“5년 쉬었으면 됐지. 아무튼, 자네가 생각할 건 하나야. 대회를 어떻게 열지만 생각하면 돼.”

“항의가 많을 텐데요…… 이렇게 갑자기.”

“내가 직접 만나서 해결하지.”

임선호는 말문이 막혀서 한숨만 내쉬었다. 뭐부터 손을 대야 할지, 머리가 아까부터 계속 지끈거리고 있었다.

공문을 보내자마자 쏟아질 전화를 생각하면 두려웠다.

그런데 가장 근본적인 예산과 항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하는데…… 더 이상 반박하기 어려웠다.

앞으로 벌어질 고생에 대한 보상으로 불평 정도는 하고 싶었다.

“저 이번이 협회장하고 처음으로 하는 가장 큰 대회인데요. 저 이러다 과로로 죽습니다…….”

김종엽이 씩 웃었다.

“배포가 이렇게 작아서야……. 처음이니까 크게 나가야지. 처음에 저질러야 이해를 해주지, 정석대로 하던 놈이 갑자기 다른 거 하겠다고 하면 욕먹어. 그러니까 지금 해야 하는 거야.”

“처음에 저지르면 찍힐 거 같은데요.”

“하하하, 그건 맞지. 미친놈이라고 하겠지.”

“……웃지만 마시고요.”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해소됐고, 김종엽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가 뒷배가 돼줄 테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미친 짓을 해야 나중에 축구협회장도 해보지.”

“예? 제가요?”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까.”

임선호가 고개를 떨궜다. 더 이상 반항하는 걸 포기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목표가 더 빠르게 이뤄질지도 모른다는 설렘도 있었다.

임선호는 김종엽이 보여줬던 대영 중과 휘경 중의 기사를 다시 읽었다.

가볍게 보고 넘어갈 기사가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큰 영향력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거 직원 배정부터 일정 편성에 예선 조를 짜는 일까지…… 해야 할 일이 산더미네요……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서 타협해야 할 건 타협해야겠고요…….”

본격적으로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임선호를 보며 김종엽은 흡족하게 웃었다.

* * *

임선호와 김종엽이 만나고 3주 후, 대영 중학교 이사장실에 손님이 찾아왔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선호가 공손하게 말하자 앞에 앉은 이사장 박영대가 너스레를 떨었다.

“아닙니다. 우리 로 감독은 오히려 좋아하던데요?”

“그렇습니까?”

임선호가 고개를 돌리자 옆에 앉은 로베르토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기사를 읽고 대영 중학교에 관해 진작 알아봤기에 감독이 외국인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더 신기했다. 프로 축구팀에도 외국인 감독이 드문 마당에 중학교 축구부에 외국인 감독이라니, 심지어 이탈리아에서 선수 생활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대회 방식 변경 그거…… 반발이 만만치 않을 거 같은데요…….”

이사장의 말에 임선호는 로베르토에 관해 생각하는 걸 멈췄다.

“맞습니다. 그래서 반발이 심한 곳은 저나 직원들 대신 고문님이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고문님이요?”

“아실 겁니다. 5년 전까지 가람중공업의 사장으로 계셨던…….”

“예? 그런…… 분이 고문으로 계셔요? 이름이 ‘김’ ‘종’ 자 ‘엽’ 자였나요?”

“아시네요?”

“경제신문을 오래 읽은 편이라서…… 하하.”

임선호와 박영대는 김종엽에 관한 짤막한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에 끼지 못하는 로베르토는 가만히 있었다. 물론, 로베르토도 가람이라는 이름의 기업은 알고 있었다. 자동차, 아파트 등 한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에 가람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게 많았다.

“제가 바쁜 분 붙잡고 딴소리를 했네요. 아무튼, 공문 내용은 확인했습니다. 그렇지? 로 감독?”

로베르토는 임선호를 보면서 말했다.

“예, 같은 지역의 팀들끼리 전국대회 본선 진출권을 걸고 리그 방식으로 예선전을 치른다. 맞죠?”

로베르토의 유창한 한국어는 계속 들어도 신기했다. 임선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상한 제도가 끼어 있던데.”

“이상한 제도요?”

“예선전에서 탈락한 팀들도 본선 토너먼트 직전에 한 번 더 기회를 준다는…….”

임선호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임선호와 직원들이 전국의 축구부를 직접 찾아가기로 한 이유 중 하나였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대회가 항상 같은 방식으로 열렸던 만큼 준비가 되지 않은 팀들도 많을 테니까요. 대신 경기 숫자로 형평성을 조절했습니다. 본선에 진출하면 경기 수가 줄어들고, 패자부활전부터 시작하면 기존 전국대회의 경기 수와 똑같게요.”

“이해가 가네요. 알겠습니다.”

“대회 방식에 관해 더 궁금한 점은 없습니까?”

임선호의 물음에 로베르토와 박영대가 서로를 바라봤다.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임선호가 대영 중학교에 찾아온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제가 기사를 하나 읽었는데요. 한 달쯤 전에 열린 친선경기 말입니다. 휘경 중학교랑 했다는 경기요.”

박영대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걸 읽으셨군요! 그날은 정말 대단했어요. 뭐가 궁금합니까? 다 말해드리죠.”

임선호는 그 경기에 관해 궁금한 게 많았다. 어떤 식으로 준비한 건지, 기사 내용이 사실인지, 정말로 휘경 중을 이긴 게 맞는지.

무엇보다 휘경 중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했다는 송현준이라는 선수가 가장 궁금했다.

기사를 읽은 이후 임선호는 송현준이 누군지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이상한 점이 많았다.

먼저 임선호가 한창 직원으로 일할 때 손백호 축구상을 받았던 초등학생과 동일 인물이라는 걸 알아냈다. 원래 잘하던 선수가 부활했구나,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는데 송현준을 상대해 본 감독들의 얘기를 전해 들으니 더 혼란스러워졌다.

어느 감독은 공격수라고 하고 어느 감독은 수비형 미드필더라고 하고 어느 감독은 윙어라고 말하는 거다.

다행히 바로 앞에 송현준의 감독과 학교 이사장이 있었다.

임선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조금 많이 질문해도 될까요? 시간이 충분하신지…….”

“얼마든지요!”

박영대의 힘찬 대답에 임선호는 드디어 궁금증을 풀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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