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43화
도시락을 다 먹고 숟가락을 놓자마자 우찬우가 말했다.
“기대해.”
“뭐가?”
고개를 돌렸다. 우찬우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국대회에서는 날 못 잊게 해줄 거야.”
“좋지. 근데…… 아직도 삐졌냐.”
“야! 이름을 몇 번 까먹었는지 알아?”
“그건 미안하고.”
머쓱해져서 뒤통수를 긁었다. 자기 이름을 까먹었던 걸 떠올리는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우찬우가 말했다.
“본선이나 꼭 올라오라고.”
“당연한 거 아니냐.”
“음음, 좋아. 그럼 나가자.”
그 후, 우찬우와 함께 운동장에 나가서 각자의 축구부로 돌아갔고, 충분히 쉬는 시간을 가진 후에 휘경중과 합동훈련을 했다.
오전에 경기했기에 회복훈련을 먼저 했고, 이어지는 미니게임을 빙자한 전술훈련도 가벼운 강도였다.
열심히 뛰려고 하면.
“전력 질주하지 말라고 했지!”
라고 로베르토가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었다.
훈련 강도가 낮다고 해도 휘경중학교의 축구부원들이 평균적으로 수준이 높다는 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절반은 다른 학교에 가도 에이스가 될 수 있는 기본기를 갖추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도 준수했다.
그래서 그런가 우리 축구부원들의 실수가 많이 보였다.
로베르토가 부임하고 다섯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중학생이 성장이 빠르다지만, 앞서 나가는 사람도 똑같이 성장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재능도 다르고.
하지만, 로베르토가 부임하기 전의 축구부원들이었다면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해서 같이 훈련하는 것 자체가 민망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따라갈 정도는 됐다. 우리 축구부의 후보들도 다.
“…….”
훈련 과정에서 전체적인 실력 차이가 보였기 때문일까? 훈련을 중점으로 훑어보던 나준하의 시선이 내게만 꽂혀 있었다.
독특한 전술을 구사해서 좋은 성과를 내고 있지만, 본체는 나라는 걸 확신했을 것이다.
훈련이 끝나고 회식 자리에서 나준하가 내게 따로 ‘본선에 꼭 올라와라.’라고 말한 걸 들으면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성시건을 비롯해서 휘경중학교의 축구부원들 여럿도 내게 본선에 꼭 올라오라고 말했다. 다들 승부욕으로 가득한 게 눈에 보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거다. 반드시 올라갈 거다.
친해지긴 했지만, 본선에서 만나도 봐줄 생각은 없다.
* * *
토요일 경기를 위해서 훈련하고, 컨디션을 조절하고, 금요일에는 선발 명단을 듣는다.
휘경중과 친선경기를 치른 후, 대영중 축구부는 평소와 똑같은 한 주를 보냈다.
그리고 축구부원들은 지금 예선 리그 첫 경기를 하기 위해 시청 소유의 종합운동장에 와 있다.
경기 15분 전이고, 몸풀기도 마친 이들은 모여 앉아서 로베르토 감독의 전술 지시를 듣고 있었다. 축구부원 중 다수가 긴장했는지 얼굴이 굳어 있다.
전술 지시를 막 끝마친 로베르토가 축구부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한 애들이 왜 이렇게 많아? 전술 지시도 못 들었겠네.’
로베르토는 손뼉을 두 번 쳤다.
“자자, 다들, 집중해.”
“예!”
대답은 힘차다.
“미안하지만 방금 말한 전술 지시는 잊어.”
축구부원들 다수가 갸웃했다. 머리가 동시에 기울어졌다. 그 모습을 본 로베르토는 경기 15분 전인데도 불구하고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가 실수했거든. 얘들아, 나도 오늘이 첫 공식 경기야. 긴장해서 전술 지시를 잘못했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긴장을 풀어줄 때였다.
로베르토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 웃음기 섞인 말에 축구부원들은 눈을 똘망똘망하게 뜬 채로 로베르토를 올려다봤다.
“아…….”
로베르토는 기세를 몰아 자기 경험을 꺼내기로 했다.
“너희들을 보니까 프로팀 경기에서 처음 출전했을 때가 생각난다. 뛰라니까 뛰긴 했는데 경기장에서 내가 뭘 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더라고. 전국대회에 나가 본 2, 3학년들이랑 1학년 하나둘은 내 말 이해하지?”
긴장 안 하는 스타일의 몇몇 선수를 제외하고는 다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경험이 적은 일부 2학년과 1학년 대다수는 로베르토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냥 훈련 때 했던 대로 하라는 거야. 경기라고 특별히 다른 걸 할 필요는 없어. 훈련에서 충분히 연습했으니까 몸이 자연스럽게 알아서 할 거야.”
“예!”
축구부원들의 대답은 아까보다 힘차게 들렸다.
“예선 리그에서 1등 해서 본선 때 경기 덜 하면 좋아. 하지만, 본선 때 잘하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으니까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친선경기나 연습 때 했던 것처럼 과감하게 해. 실수했다고 겁내는 모습 보이면 체력훈련 돌릴 거다.”
“아, 감독님!”
박종혁의 투정에 축구부원들이 웃었다.
로베르토는 괜찮게 마무리됐다고 생각했다.
“그럼 경기 전까지 화장실 다녀올 사람 다녀와.”
“예!”
연설을 마친 로베르토는 전술 지시를 할 때 사용했던 화이트보드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공격적이고 자유분방한 전술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감독직을 고민하던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유럽에서는 결과에 대한 부담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전술은 공격적이고 자유분방하게 꾸려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아무리 자신이 외국에서 온 감독이라지만, 한국 유소년 축구는 결과를 내는 게 중요하다는 걸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훈련은 자신의 방식대로 하되, 전국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전술론 극단적이고 효율적인 수비 전술을 준비하려고 했다. 현실과 타협할 생각이었다.
로베르토는 고개를 움직여 한 축구부원을 바라보았다.
송현준이었다.
조기축구회에서 우연히 만난 중학생, 천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제는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도 안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말은 잘 따르고…… 이상한 녀석이라고 항상 생각했다.
아무튼 저 녀석 덕분에 지금의 전술이 가능해졌다. 도전적이고 위험한 플레이를 해도 송현준이 경기장에서 중심을 잡아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송현준은 젊은 몸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에너지와 35살의 축구선수가 가지고 있을 법한 노련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야야, 어깨 뭉쳤다. 내가 주물러줄게.”
“으아아, 아프다! 하지 마라!”
“해준다니까.”
송현준은 요즘 들어서 부쩍 긴장을 많이 하고, 기운 없어 보이는 티알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겉모습만 보면 행동이 어른스럽긴 해도 친구 잘 챙기는 중학생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로베르토는 어제 송현준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 * *
“왜 부르셨어요?”
“선수 입장에서 얘기 좀 들어보고 싶어서. 앉아라.”
로베르토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송현준을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평범한 잡담 위주였지만, 축구부원들의 상태가 어떤지, 전술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훈련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 같은 내용을 축구부원의 시점에서 살피기 위해서였다.
익숙해서인지 송현준은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로베르토가 말했다.
“야, 요즘 내가 긴장하는 거 애들도 아냐?”
“예? 그런 거 물어보려고 부른 거예요?”
“그런 거라니! 나 심각해!”
축구부에 들어오기 전과 같은 친근한 대화가 이어졌다. 둘만 있을 때는 항상 이랬다.
로베르토의 질문을 고민해 본 송현준이 고개를 저었다.
“티 안 났어요. 오히려 요즘 무섭다고 하던데. 맨날 무표정하니까.”
“다행이네…….”
“긴장되세요?”
“어, 첫 대회가 갑자기 당겨진 거잖아. 2월 말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음…… 힘내세요.”
송현준의 격려에 로베르토는 피식 웃었다.
“그래, 네 덕에 하고 싶은 거 한다.”
“천만에요. 저도 로베 감독님 덕분에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어요.”
“감독님은 뭐냐. 그냥 로베 형이라고 불러.”
“왔다 갔다 하니까 헷갈려서요. 항상 형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어요.”
“그거면 됐다.”
여유로운 송현준의 얼굴을 관찰하던 로베르토의 머릿속에서는 불현듯 예전에 나눴던 얘기가 떠올랐다.
“여전히 전국대회 우승이 목표냐?”
“예, 당장은요. 축구를 다시 시작하면서 인생 계획을 세웠는데요, 이번에 현실적으로 잡아도 최소 4강은 가야 해요.”
“넌 참 계획적으로 사는 것 같더라. 그러고 보니까 뭘 목표로 계획을 세운 거냐? 계획이 있으면 목표가 있을 거 아니야.”
대화를 하다 보니 로베르토는 궁금해졌다. 송현준은 뭐든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한다. 그 계획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송현준은 로베르토를 바라보았다. 송현준은 로베르토에게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솔직해지고 싶을 때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월드컵 우승이요. 제 꿈이에요.”
개인상을 예상했던 로베르토는 살짝 놀랐다. 그래서 감탄을 내뱉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오…… 예전에 얘기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들었다고 해도 잊어버렸을 거다. 팀을 바꿀 수도 있고, 자기가 잘하는 게 중요한 개인상보다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게 현실적으로 훨씬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송현준은 웬만한 어른보다 성숙하고 생각이 깊었다.
월드컵 우승이 논리적으로 어렵다는 걸 자신도 잘 알 것이다.
“그럼 내년 목표는 뭐냐?”
송현준이 머뭇거렸다.
“뭔데?”
“미리 말 못 했는데요.”
“응, 말해 봐.”
“전국대회 끝나고 바로 프로 데뷔할 거예요. 내년 목표예요.”
“뭐? 내년?”
“예, 국내 프로 리그 팀에서 한 시즌 뛰면서 기술을 완성할 계획이에요.”
충격이었다. 3년 내내 같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약간의 배신감도 느꼈지만, 그동안 송현준에게 받은 게 더 많았다. 늦게 말해줬지만, 말해준 게 고맙다는 생각이 솟았다.
로베르토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면서 옆에서 봐온 송현준을 되새겨봤다.
“축구부 복귀 결심하고 개인 연습, 조기축구, 학교 운동회, 풋살대회, 축구부, 그다음은 프로라는 거지? 말로 얘기해 보니까 엄청 체계적이네. 다 준비한 거냐?”
송현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로베르토에게 미안해하는 기색이 보였다.
로베르토는 피식 웃었다.
“괜찮아. 대신, 다음에는 미리 말해줘라.”
“고마워요.”
“그럼 다음 계획은 뭐야? 프로 데뷔해서 기술을 완성하면…….”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는 거죠.”
“……열여섯 살에? 아니, 만 나이로 열다섯이잖아.”
“오, 로베, 만 나이도 셀 줄 알아요?”
“당연하지! 통역 파트타임으로 일할 때 어떤 놈이 자기가 빠른이라면서 반말을 찍찍 내뱉어서 빠른년생이 뭔지 만 나이가 뭔지 열심히 찾아봤다고.”
로베르토의 썰을 들은 송현준이 크게 웃었다.
“처음 듣네요, 그거.”
“처음 얘기했으니까. 아니, 근데 말 돌리지 말고. 그게 될 거 같아? 펠레도 열일곱 살에 월드컵 우승했어.”
“될 거 같냐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해야만 하는 거예요. 월드컵에 최대한 많이 도전하려면 일단 실력을 갖춰야 하니까요.”
“……그렇구만.”
너무 허황된 계획인데, 송현준이 워낙 당연하다는 듯 말을 하니 로베르토는 말문이 막혔다.
로베르토의 머릿속에 한 문장이 스쳐 지나갔다.
타고난 그릇이 다르다.
왜인지 모르게 송현준의 말대로 이뤄질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로베르토는 스스로에게도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원래 내일 말하려고 했던 건데 다음에는 미리 말해달라고 했잖아요?”
“와, 진짜, 또 뭘 하려고 했던 거야?”
“저지르기 전에 말했으니까 봐주세요. 아무튼, 전국대회가 전국대회라도 결국 만 열다섯 살들이 하는 대회잖아요?”
“그렇지.”
“그러니까 본선에 가면 저는 파괴적으로 할 거예요. 유소년 레벨에서는 감당 안 된다, 수준이 다르다는 평가를 받아야 하거든요.”
절차를 중요시하는 분위기는 축구계에도 있을 것이다.
“하면 되지 그걸 왜 미리 얘기해?”
송현준이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로베 형의 자존심이 상할지도 모르니까요. 형의 전술은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개인이 돋보이는 전술은 아니죠. 근데 제가 멋대로 하기 시작하면…….”
로베르토가 자기가 그동안 했던 노력이 뭐였는지 허탈해하겠지. 심한 무력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송현준은 뒷말을 삼켰다. 로베르토는 뒷말을 듣지 않아도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보다 더 잘할 거라는 걸 당연하게 말하고 있네. 너 진짜 중학생 맞냐? 나이 속이는 거 아니냐? 초능력자라도 되냐? 아니면 미래에서 왔다던가.”
“……그럴 리가요.”
송현준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로베르토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유소년 코치, 감독 일 하면서 천재를 만나면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했는데, 처음부터 만나버리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 천재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송현준은 천재다.
“일을 시작하자마자 천재를 만나다니, 나는 운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로베르토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송현준은 어른스럽게 대답했다.
“형이 절 데리고 있던 경험을 어떻게 활용하냐에 따라 다르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선수와 감독은 경쟁하는 사이가 아니라는 거예요. 선수가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감독은 그 재능을 질투할 필요가 없어요. 서로 돕는 사이니까 경기에서 이기자는 목표를 가지고 최선의 역할을 하면 돼요.”
로베르토는 혀를 찼다.
“……아이고, 진짜, 누가 어른이고 누가 어린앤지.”
“당연히 형이 어른이고 제가 어린애죠.”
“……뻔뻔해 가지고.”
송현준은 괴이한 천재다. 하지만, 송현준은 친한 동생이다. 달라진 건 없었다.
로베르토는 그동안의 대화에서 궁금했던 것 한 가지를 물었다.
“근데, 본선부터 제대로 한다는 말은 예선은 친선경기처럼 하겠다는 거냐?”
“아, 그거요. 그것도 말해야 하는데.”
로베르토는 슬슬 걱정이 됐다. 오늘 대화가 끝나기는 하는 건지.
“이게 마지막이에요.”
“그래? 뭔데?”
“예선에서는 일부러 실수할 거예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