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46화
“안 갈아입고 뭐 해?”
“……오늘 못한 거 생각한다.”
전생의 티알들은 이 위기를 스스로 잘 이겨냈다. 본래였다면 본선 경기가 시작할 때까지 천천히 이겨내나, 하필 공식 경기가 빨리 시작되는 바람에 마음고생이 더 심할 것이다.
다 나비효과 때문이다.
여러 번 전생하면서 확신하게 된 게 있다. 언제나 상황과 환경이 달라지지만, 사람의 재능과 기질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티알을 믿을 수 있었다.
공식 경기라는 스트레스 거리가 생겼으니 도움을 주면 될 것이다.
티알에게 작게 말했다.
“끝나고 같이 연습이나 할래? 나도 오늘 실수 많이 했는데.”
“……! 정말인가!”
“어, 대신 감독님 몰래. 다음 주에도 어때?”
“좋다! 고맙다!”
위로와 공감과 해결책에 티알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때, 끼어드는 녀석이 있었다.
“송현준! 티알! 아직도 옷 안 갈아입었냐? 엄태영 이건 누워만 있네. 태상 선배가 빨리 옷 갈아입고 짐 챙겨서 감독님 따라가자고 했잖아.”
박종혁이었다. 오늘 세 골을 넣어서 그런지 목소리가 잔뜩 들떠 있었다.
참고로 티알 옆에는 엄태영이 얼굴에 수건을 덮은 채로 잠을 청하고 있었다. 풀백 자리에서 풀타임을 뛰었다 보니 경기 끝나자마자 저 자세로 쉬고 있었다.
박종혁이 엄태영의 얼굴에 얹힌 수건을 치웠다.
엄태영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었다.
“……안 가면 안 돼?”
“가야지! 감독님이 오라고 했는데. 빨리 일어나. 티알! 그리고 기운 내! 실수할 수도 있지!”
티알이 박종혁을 맘에 안 든다는 눈빛으로 빤히 보다가 내게 툭 말했다.
“박종혁은 자기만 잘했다고 신났다.”
기분이 나아진 건지 티알이 평소처럼 박종혁을 놀리려고 했다. 티알이 편하게 말할 수 있게 받아줬다.
“그렇지, 눈치도 없어.”
“맞다. 재수 없다.”
“이 자식들이 뭐라는 거야! 오늘은 타격 없어. 난 해트트릭을 한 남자라고.”
티알이 박종혁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재수 없다.”
“인정.”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줬다.
“야!”
박종혁이 결국 발끈하려고 했다. 바로 준비해 놨던 말을 꺼냈다.
“장난이고, 솔직히 오늘 좀 하더라. 아무튼 옷이나 갈아입자. 감독님이 되도록 빨리 오라고 했잖아.”
“……역시 그렇지?”
박종혁은 머뭇대다가 금세 히죽 웃었다. 성격이 좋긴 좋다.
티알과 옷을 갈아입었고, 엄태영도 박종혁이 일으켜 세웠다. 샤워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옷이라도 갈아입어야 했다.
늦가을의 추운 바람이 수시로 불어닥쳤기에 땀에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
옷을 다 갈아입고 경기 전 훈련장비를 비롯한 축구용품들을 챙기니 윤태상이 우릴 불렀다.
“얘들아, 다 챙겼으면 가자.”
* * *
진현 중과 신영 중의 경기가 열리고 있을 옆 경기장까지는 조금 걸어야 했다.
이곳은 축구 경기장 두 개와 풋살장 네 개가 모여 있는 축구 종합 운동장이었다. 축구 경기장 사이에 풋살장 네 개가 있어서 풋살장을 거쳐 가야 했다.
박종혁이 축구용품이 든 커다란 가방을 흔들면서 한탄했다.
“아…… 쉬고 싶은데.”
“맞다, 할 게 왜 이렇게 많냐. 몸이 아니라 머리가 아파서 미치겠다.”
티알이 호응했고, 박종혁도 공감했다.
“맞아, 많긴 해. 분명히 훈련은 줄었는데 그만큼 알아서 하라고 하시니…….”
우리는 1학년 무리 맨 앞에서 걷고 있었다.
우리를 인솔하는 주장 윤태상과 나란히. 박종혁의 말을 듣던 윤태상이 말했다.
“감독님 뜻이니까 따라야지. 상대 팀이 경기하는 거랑 경기장에서 자주 부딪힐 상대 선수를 보고, 어떻게 상대해야 하지 고민해 보는 것만으로도 경기에 도움이 된다고 하시잖아.”
윤태상의 말은 잔소리처럼 들렸다. 박종혁이 볼멘소리를 했다.
“선배님은 맨날 감독님 편만 들어…….”
작게 웃었다. 윤태상은 축구부원들 사이에서 로베르토의 광신도로 여겨지고 있다. 여름방학부터 로베르토의 말이라면 다 듣고, 로베르토가 없어도 로베르토 편을 들 정도다.
윤태상이 말했다.
“항상 맞는 말만 하시잖아. 우리가 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시는 거라고. 또, 훈련 준비나 경기 준비도 얼마나 열심히 하시냐? 시각 자료도 매번 준비해 주시고. 감독님이 열심히 하시는데 우리도 당연히 열심히 해야지. 안 그래?”
박종혁이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신 대답했다.
“맞아요.”
“그렇지?”
“예.”
로베르토가 좋은 감독인 건 맞지만 항상 이성적인 판단만 하는 건 아니긴 했다.
사실 전생에서도 상대 팀 경기 보러 가라고 말은 했지만, 이번처럼 강제동원을 한 적은 없었다.
아마도 감정적으로 여러 가지가 엮인 팀이라 그런 게 아닐까.
로베르토도 지상철에게 화가 많을테고.
시무룩해진 박종혁을 위해서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도…… 원래는 경기 끝나면 바로 쉬러 갔다면서요? 이번 경기부터 갑자기 이러니까 부원들 입장에선 어색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건 그렇네.”
“내 말이 그 말이야.”
윤태상이 끄덕였고, 박종혁이 내 말에 동감해 줬다.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경기장에 도착했다.
“저기 있네…… 아, 벤치에 자리 없어…….”
엄태영의 힘없는 말에 고개를 돌리니 로베르토가 먼저 보였다. 독특한 외모라 찾기 쉬웠다.
역시 수용인원이 적은 관객석에는 자리가 없었고, 우리 축구부는 경기장 측면 철망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몇 개 없는 벤치에는 경기 뛰고 지친 학생들이 앉거나 누워 있었다. 다 선배들이라 엄태영이 시무룩한 것도 이해가 갔다. 먼 쪽 벤치에는 축구 관계자나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김종엽과 임선호도 보였다. 우리 경기가 끝나자마자 이쪽으로 왔나 보다.
경기장을 슬쩍 보니 조용했다. 응원 소리도 안 들리고, 감독들도 코치들도 학부모들도 입을 꾹 닫고 있다. 선수들도 진지하게 뛰고 있었다. 공 차는 소리만 들린다.
경기 중에 조용해질 수도 있다지만, 이건 이상하다.
“분위기 이상하지 않아요?”
“그러네.”
“너무 조용한데.”
우리는 걸음을 빨리해서 축구부 사람들에게 갔다.
“어, 왔냐.”
로베르토를 포함한 축구부 사람들은 적당히 인사하고 다시 경기장을 봤다.
우리는 갸웃거리면서 벤치에 짐을 내려놓고, 울타리로 향했다. 우리는 오늘 7-0으로 대승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경기를 구경할 줄 알았는데.
“헐? 점수 왜 저래.”
박종혁의 목소리가 커서 나도 모르게 점수판을 봤다.
“아.”
왜 이런 분위기인지 이해가 갔다.
1-0인데 신영 중학교가 이기고 있었다.
우리 축구부와 1위를 다툴 걸로 예상한 진현 중학교가 지고 있었다.
“쟤네 왜 지고 있는 거야?”
박종혁은 대답을 듣지 못했다. 말해주려는 선배가 있었는데, 선배가 입을 열기도 전에 경기장에서 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야! 이 새끼들아! 더 집중을 하라고! 집중을! 이게 몇 번째야!”
지상철은 추가로 욕설을 섞어가면서 선수들을 다그쳤다. 지상철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저 게으른 양반이 벤치에서 일어났네. 쟤네 큰일 났다.”
노태신은 낄낄 웃으면서 옆의 친구에게 말했다.
노태신의 말대로다. 지상철 저 양반이 일어나서 소리를 지를 정도면 경기가 정말 심각한 거다.
어지간한 경기는 지더라도 뚱하게 앉아 있다가 혼내는 양반인데, 수준 이하의 대참사가 일어날 때만 저렇게 벤치에서 일어난다. 나도 지상철 밑에서 한두 번 뛰어본 게 아니라 잘 안다. 쟤네들 숙소 돌아가면 몽둥이질 당할 거다.
“집! 중! 집중하라고!”
지상철의 외침을 배경음 삼아 경기에 본격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진현 중학교의 축구부원 중에는 아는 얼굴이 많았다.
티알도 그렇지만 이들의 재능도 크게 바뀌지 않았을 거다. 지상철이 감독으로 왔다고 해서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모습은 무척 실망스러웠다.
이유는 뻔하다.
“좋아! 잘 뺏었어! 천천히 해봐!”
신영 중학교는 약체다. 에이스라고 할 만한 선수는, 에이스가 될 선수는 하나뿐이다. 공격진에 조금 잘하는 부원이 둘 있다지만, 방금 패스 미스 한 걸 보면 절대 아니다.
“그래! 그거야! 진균아!”
지상철이 간절하게 외치는 진현 중학교의 스트라이커, 최진균은 나도 적당히 아는 사람이다.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같이 뛴 적도 있던 사이니까.
최진균은 2부 리그 주전 정도가 한계지만, 프로가 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도 군계일학일 거다. 진현 중은 중학교 때 기량이 만개하는 조호선 한 사람을 제외하고 비슷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균형이 좋은 팀이다.
“으아악! 또! 또! 그냥 차면 되잖아! 대체 왜 머뭇거리는데!”
그래서 그런가, 미래의 국가대표 골키퍼한테 완전히 틀어막혔다.
최진균과 공현성의 일대일 찬스였다. 공현성은 팔을 벌린 채로 자세를 낮추고, 성큼성큼 나와서 슈팅각도를 다 틀어막았다.
전반전에 얼마나 당한 건지 최진균은 공현성의 전진에 머뭇거렸고, 뒤늦게 슈팅해 봤지만 공현성이 온몸을 던져 슈팅각을 막아내면서 공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공현성은 벌떡 일어났다.
공현성이 최진균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키도 크고 얼굴도 험상궂고, 심지어 무표정이다.
멀리서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최진균이 움찔하는 게 보일 정도였다. 이어서 적 팀 감독 지상철을 무표정한 얼굴로 몇 초 응시하더니 고개를 휙 돌려서 골킥을 했다.
“쟤 화난 거 같지 않냐?”
“그런 거 같다.”
박종혁과 티알이 말을 나누는 동안에도 경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공현성의 골킥은 진현 중학교에게 금세 빼앗겼다.
공을 빼앗았는데도 감독이나 선수들이나 초조해 보였다. 패스 실수도 많았고, 적극적으로 공격하러 나가지 못했다. 자기들이 공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두식 선배, 계속 이랬어요? 진현 중이 때리고, 신영 중은…… 아니, 공현성이 다 막아버리고. 쟤네 겁나서 공격도 못 나가는데요?”
“어, 어 맞아. 공현성 저 자식 뭐냐? 우리랑 할 때랑은 차원이 달라졌는데. 어어?!”
정두식이 얘기하는 와중에 진현 중학교의 홍준서가 중앙수비수 옆에서 달리기 시작한 최진균을 보고 한 번에 패스를 찔렀다.
더 뛰어서 안전하게 슈팅하는 게 맞는 선택일 테지만, 방금 일대일 찬스에서 실패한 최진균은 페널티박스 바로 뒤에서 슛을 때렸다.
정두식이 소리를 지른 건 멀리서 찼는데도 슈팅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시원한 소리와 함께 공은 완벽하게 골대 구석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공현성이 먼저 구석에 도착했다. 공현성은 한 손으로 튕겨내는 게 아니라 공중에서 양손으로 공을 낚아챘다.
“와…….”
정두식은 감탄했고, 골이 들어간 줄 알고 주먹을 내지르던 지상철이 멈췄다. 로베르토도 눈을 부릅떴다.
반응이 어떻건 공현성은 공을 품에 안은 채로 수비수들에게 악을 썼다.
“아아아악! 너희들 집중 안 해? 뒷공간 좀 비어도 내가 다 커버한다고!”
신영 중학교의 수비수들의 얼굴에선 불편해하는 기색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진지한 얼굴들로 공현성의 얘길 듣고 있었다.
태도가 좋으니 공현성의 화도 금세 누그러졌다. 공현성은 신영 중학교 선수들이 공격을 위해 앞으로 나갈 때까지 공을 튕기면서 기다렸다.
그제야 나도 입을 열 수 있었다.
“그걸…… 튕겨내는 게 아니라 잡았다고?”
전생의 공현성이라면 한 손으로 어렵게 튕겨낼 슛이었다. 그런데 그걸…….
멀리에서 김종엽과 임선호의 목소리도 차례로 들렸다.
“쟤, 쟤 누구야!”
“잠시만요…….”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신영 중학교의 선수들이 전진하는 동안 공현성이 날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선을 느낄 수 있었던 건, 대놓고 봤기 때문이었다.
공현성이 눈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나와 다시 승부 하고 싶다고.
삐익!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차!”
심판의 재촉에 공현성은 골킥을 했다.
“허…….”
공현성의 시선이 떨어지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월드컵에 함께 나갈 동료가 이렇게 빨리 성장해서 나타날 줄이야.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