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48화
“……너무 일찍 나왔나?”
티알로 만나기로 약속한 시각은 2시, 지금은 1시 30분.
숙소에 5시까지 복귀해야 해서 2시간 정도 훈련하고 일찍 가서 짐 풀고 씻을 계획이었다.
일찍 나와서 나쁠 건 없지. 친숙한 길거리를 느긋하게 구경하며 걸었다. 마침 길가에 있는 식당에서 열 명 정도가 우르르 나왔다. 가족들인지 생김새가 비슷했다.
“우리 손주 재롱잔치 보러 갔어야 했는데…….”
“다음에는 꼭 보러 와요! 내가 얼마나 대단했는데!”
“뭐? 하하하하.”
귀여운 꼬마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할아버지로 보이는 분이 크게 웃었다.
대화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지나쳤다.
동시에 경기를 보러 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시던 부모님 두 분의 얼굴을 떠올렸다.
정말로 미안해하실 필요 없는데.
전생을 포함해서 친선경기부터 훈련까지 지켜보시는 부모님을 간혹 보긴 했다. 말 그대로 간혹이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부모님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이 회사원이나 장사를 해야 했기에 물리적으로 올 수가 없었다.
이번 생에도 훈련 때 간혹 부모님들을 보긴 했다. 물론 소수였다. 오셨다고 해도 보통 멀리서 보시다 가거나 인사 잠깐 하고 가는 정도라서 흔치는 않았다.
물론, 공식경기는 다른 분위기이긴 하다. 일반적인 전국대회였다면 보통 주말에 열리기 때문에 주말 앞뒤로 휴가까지 내고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았겠지.
하지만 어제는 갑자기 생긴 대회였기에 가족들의 수가 많지 않았다.
평소의 절반 정도? 온 부모님보다 안 온 부모님이 많았다.
“아, 멍청했네.”
진작 이렇게 설명할걸. 그러면 부모님이 덜 미안해했을 텐데.
뒤통수를 주먹으로 살짝 치면서 자책했다.
로베르토도 부모님들이 찾아오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걸 얘기해도 좋았을 거다. 기분 덜 상하게 대화하는 건 여러 번 살아도 참 어려운 것 같다.
부모님에 관한 생각이 정리되니 이번에는 로베르토와 어제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송진 중학교와의 전국대회 조별 예선 첫 경기가 끝나자마자 로베르토는 관객석을 보면서 복잡한 얼굴을 했었다.
* * *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고, 벤치에 앉아있던 코치와 후보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뛰쳐나가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다만, 감독 로베르토는 벤치에서 일어난 자리 그대로 멈춰 있었다. 정확히는 몸을 돌려 뒤쪽의 관객석을 살펴보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는 아니네.”
로베르토가 보는 곳을 봤다.
송진 중학교 축구부원의 가족들은 누가 봐도 울상이었고, 대영 중학교 축구부원의 가족들은 누가 봐도 표정이 좋았다.
전생을 통해 로베르토가 뭘 마음에 안 들어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안타깝지만 이긴 사람이 있으면 진 사람도 있는 거죠.”
“갑자기 냉정하게 말하네. 내가 금지하자고 했냐.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지.”
“아.”
“유소년 선수들은 프로가 아닌데…… 참 어렵다.”
“뭐가요?”
“응원해 주는 건 좋은데 뒤에서 별의별 소리가 다 들린단 말이야. 3-0부터 얼마나 신경 쓰이던지.”
“송진 중 응원하는 아저씨들이 송진 중 감독 욕하던 거요?”
“그것도 그렇고…… 제발 이겨야 한다고 자기들끼리 말하는 것도 그렇고. 선수들 패스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고.”
“좋은 거 아니에요?”
로베르토가 고개를 저었다.
“난 별로 같다. 그럴 거면 유소년 선수들도 프로에서 뛰라고 하지. 왜 성인이랑 유소년을 따로 놓겠냐? 성인이랑 유소년이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야. 어릴수록 주변에 흔들리기 쉬운데…… 관중의 태도도 달라야지.”
그 말을 마친 로베르토는 고민에 잠겼다. 그동안 나는 속으로 웃었다.
방금 한 대화는 간단한 확인이었다.
전생의, 그러니까 내가 알던 로베르토와 지금 로베르토가 같은가. 로베르토는 첫 공식경기를 하면 매번 지금처럼 생각하곤 했기에 전생마다 확인하는 일종의 루틴이었다.
이 간단한 확인을 하고 나면…… 묘하게 안심이 된다.
로베르토가 입을 열었다.
“성적이랑 승리에 집착하는 문화가 뿌리 깊게 내려 있구나…….”
“가족들 오는 거 못 막아요.”
전생의 로베르토가 몇 번 축구협회를 향해 급발진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경고 차원에서 말했다. 로베르토는 이런 쪽 일에 재주가 없어서 고생만 한다. 그 광경을 또 보고 싶진 않았다.
“안 막아. 그냥, 가족들이 오더라도 경기는 편하게 보고 갔으면 해서 하는 말이야.”
“그렇군요. 되게 어려운 문제긴 해요.”
“그렇지.”
로베르토는 잠깐 생각하는 것 같다가 금세 머리를 쥐어뜯었다.
“모르겠다. 차라리 훈련 세션 짜는 게 편하네. 그런 건 임선호 씨 같은 행정가들이 알아서 하겠지. 나는 내가 좋다는 방식대로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좋은 성적 내야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자기 할 일에 충실하는 게 최고다.
“저만 믿어요. 로베르토가 옳다는 걸 증명할게요.”
로베르토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날 봤다.
“그래, 근데 너 오늘…… 진짜 못하긴 하더라. 믿어도 되려나.”
나도 눈을 가늘게 떴다. 나도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닌데,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됐어요. 안 해.”
“이 자식 봐.”
로베르토는 낄낄 웃으면서 내 등을 탁 소리 나게 쳤다. 이어서 기뻐하는 축구부원들을 집합시켰다.
그 후에 로베르토가 칭찬을 곁들인 경기 후 연설을 하고, 공현성과 진현 중학교의 경기를 보러 갔던 것이다.
* * *
어제 일을 떠올리면서 걸으니 어느새 초등학교 운동장에 도착했다. 개인 훈련도 많이 하고, 김채아와도 함께 훈련하던 장소다.
천천히 걸었는데도 약속 시각까지 20분이 남아있었다.
“몸이나 풀…….”
혼잣말을 하며 기지개를 켜다가 입을 다물었다.
운동장 스탠드를 가로질러 운동장에 내려가려고 했는데, 그 방향에 익숙한 뒤통수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티알과 티알의 부모님이었다.
당연히 두 분 다 잘 안다.
아버지 류성호는 이번 생에서도 만난 적 있었고.
“현준이한테 피해 안 끼치게 무리한 부탁하지 말고.”
“알았다니까요…….”
티알은 아버지의 말에 힘없이 대답했다. 둘은 영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이어서 티알의 어머니가 티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직 날 모르시겠지만 반가웠다. 요리를 아주 잘하셔서 전생마다 자주 얻어먹었다.
“송현준이라고 했지? 고마워서 한번 만나고 싶은데…….”
티알에게 인사를 하려다가 그대로 멈췄다. 티알의 어머니에게서 내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티알이 물었다.
“네? 왜요?”
“왜요 라니? 당연히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그러지 마요. 부끄러워요.”
“부끄럽다고?”
티알의 어머니가 눈을 부라렸다. 티알의 어머니의 특징을 하나 더 말하자면, 성격이 불같은 편이라는 거다.
“티알, 장난하니!”
목소리도 크시다.
“티알, 장난하니?! 너 한국 온 지 반년 됐어, 반년! 봐봐, 엄마랑 아빠가 똑같이 생겼니? 응?”
“…….”
“저기, 여보.”
“기다려 봐요.”
티알의 아버지가 말려보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티알의 어머니는 티알을 꾸중했다.
“엄마와 아빠의 차이처럼, 너는 여기에선 외국인이야. 한국어 좀 한다고 해서 외모가 바뀌지는 않는다는 건 너도 알잖니? 다른 사람들이 한국 처음 와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또 들어야겠니?”
“……어제 많이 하셨어요. 기억해요.”
“알면서 그러니! 송현준 그 애한테는 항상 고마워해야 하고, 진심으로 고마워. 우리 아들을 평소에도 잘 도와준다고 하니까. 근데 그런 얘기를 하는 게 부끄럽다고? 너 현준이 없었으면 따돌림 당했을 수도 있다는 거 모르니?”
티알은 내 도움 없이도 잘 적응하는데. 나와 만나지 않은 티알의 전생을 알아서 괜히 미안했다.
어수룩한 말투에 특이한 외모, 티알의 어머니의 말대로 따돌림을 걱정하기 쉽다. 하지만 티알은 축구를 잘한다. 그것도 선수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이 있다.
나와 어른이 돼서야 처음 만난 전생의 티알은 반 친구들과 축구 한 번 하니까 금방 친해졌다는 무용담을 풀었었다.
“…….”
아무튼 현재의 티알은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티알의 어머니는 티알을 계속 다그쳤다.
“지금 그게 무슨 태도니? 티알! 정신 똑바로 차려! 여기 오자마자 축구선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잘 대해주는 사람도 있어. 엄청난 기회인 거 모르겠니?”
“…….”
“어제부터 계속 그렇게 기운 없이 쳐져서…… 하, 그러고 있으면 뭐가 해결되니? 고작 한 경기 못 했다고 그러는 게 말이 돼?”
“알죠, 아는데…….”
“그러면! 억지로라도 씩씩한 척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니? 그렇게 기운 없이 있으면 될 것도 안 되는 거 몰라?”
“저기, 여보, 티알도 매일 열심히 했을 텐데 휴가 날에도 그래야겠어?”
티알의 아버지가 다시 끼어들었다.
“티알은 더 잘해야 해요. 한국에 오자마자 인생에 다시없을 기회를 얻은 건데, 자기 발로 차 버리려는 거 같잖아요. 티알이 좀 더 열심히 했으면 문제없었을 거예요.”
순간 티알의 어깨가 들썩였다. 화가 났을 때의 습관이다.
작게 기침을 해서 목을 풀었다.
원래 사이좋은 가족인데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됐다 보니 다들 신경에 날이 서 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건 힘들 수밖에 없다.
티알은 배울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피곤하고, 티알의 아버지는 일과 가족을 동시에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티알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이런 건 시간을 들여 익숙해지는 방법뿐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끼어들어서 분위기를 풀어주자.
“어?!”
일부러 큰 목소리를 냈다. 뛰어온 척하기 위해 제자리 뜀박질을 했다.
소리가 들리자 셋은 말을 멈추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 발견한 티알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그러건 말건 나는 뻔뻔하게 인사했다.
“티알 벌써 와 있었네. 오? 아저씨,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씩씩하고 활기차게.
티알의 아버지에게 인사하고 어머니 쪽을 봤다. 방금까지 안절부절못하던 티알의 아버지는 내게 재빠르게 말했다.
“아! 현준이구나, 오랜만이다. 티알한테 잘해준다고 얘기 많이 들었다. 이쪽은 티알의 어머니인데…….”
티알의 어머니는 아직 한국어가 미숙하시다. 상냥한 얼굴로 인사를 하시려다가 말문이 막혔는지 우물쭈물했다.
그래서 영어로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 영어 할 줄 알아요.”
“어……? 정말이네?”
유창한 발음에 티알의 어머니가 깜짝 놀랐다.
티알도.
“아니…… 현준…… 너…….”
티알은 경악한 얼굴로 말을 더듬고 있었다. 처음 만난 날부터 티알이 한국어를 못해서 답답해해도 절대로 도와주지 않았다. 도와주더라도 딱 중학교 1학년 수준으로 단어만 말해주고 말았다.
왜냐면 한국어를 잘 배워야 하니까.
티알을 위해서 그랬는데 티알은 배신당했다는 표정으로 변하고 있었다. 맛있는 거 사주면 풀리겠지.
“네가 현준이구나! 어쩜! 이렇게 영어도 잘할까? 우리 아들한테 정말 잘해준다고 들었는데…… 너무 고마운데 갑자기 만나서…… 정신이 없어서 지금…….”
방금까지 화내던 티알의 어머니는 온데간데없었다. 정말 당황했는지 얼굴이 붉어지고 횡설수설하려고 해서 차분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티알은 기술이 좋아서 도와줄 맛이 있거든요. 반에서도 재미있고요.”
“재미있어……?”
티알이 부끄러운지 손을 열심히 내젓는 게 시야에 들어왔지만, 못 본 척했다.
“네, 친구들한테도 인기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