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49화
“자, 잠깐.”
눈앞에서 자기 얘기를 하는 걸 듣게 생긴 티알이 당황해서 나를 제지하려고 했다.
“얘기 좀 더 들을 수 있을까?”
동시의 티알의 어머니가 날 재촉하셨다.
“아, 엄마…….”
티알은 방향을 바꿔 어머니를 만류하며 나에게 살려달라는 눈빛을 발사했다. 티알의 어머니가 티알에게 말했다.
“얘는! 부끄러우면 잠깐 저리 가 있어.”
“아니…… 현준…….”
장난은 그만하기로 했다.
“티알한테 혼날까 봐 안 할래요.”
티알의 어머니는 실망한 기색과 함께 티알을 살짝 째려봤다. 티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살짝만 말하면 티알은 공부도 열심히 하고, 훈련도 열심히 하느라 하루에 쉬는 시간이 별로 없을 정도예요.”
“뭐……?”
티알의 어머니가 당황하셨다. 티알은 머리를 감싸다가 내 쪽으로 다가와 등을 밀며 재촉했다.
“현준, 가자, 훈련하자.”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티알은 어머니가 잘 못 하는 한국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이제 우리 훈련해야 해요.”
축객령이다.
티알은 부모님 앞이라 부끄러운 모양이다. 그럴만한 나이지.
내가 티알 앞으로 나섰다.
“숙소 복귀까지 3시간도 더 남았으니까 훈련 구경하다 가실래요? 여기까지 올라오시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셨을 텐데…….”
티알이 또 한 번 배신당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티알의 부모님 쪽에 더 이입이 됐다.
“그래도 될까?”
티알의 어머니는 그렇게 묻고, 티알의 아버지와 함께 나와 티알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당연하죠.”
내 말에 티알이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
“별거 없으니까 편하게 보세요.”
“고맙다.”
티알의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다.
“아우, 진짜, 현준. 빨리 와라.”
티알이 투덜거리면서 날 끌고 가자 티알의 부모님이 미소 지었다.
우리는 축구 골대까지 금세 도착했다. 티알의 부모님이 남아 있는 스탠드까지는 거리가 꽤 됐다.
“현주운…….”
그러자 티알이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늘은 찔리는 게 많았다. 시선을 살짝 피하면서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내가 뭘?”
“……너, 영어 그렇게 잘하면서…….”
“에이, 너 한국어 빨리 배우게 하려고 그런 거지.”
“으음…….”
불만은 있겠지만, 더 파고들기 난감할 것이다. 티알은 내 당당함에 결국 항의를 포기했다.
“……훈련이나 빨리 하자.”
“그래. 패스부터 할래?”
“마음대로 해.”
티알은 대답도 퉁명스러웠고, 입술도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무표정을 가장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웃었다. 지금은 사춘기라 불편하겠지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나중에는 티알도 이해할 거다. ……너무 꼰대 같은 생각인가?
티알의 부모님이 지켜보고 있다더라도 시각적으로 대단해 보이는 훈련은 안 했다.
리프팅, 짧은 패스부터 긴 패스, 약한 패스를 트래핑 하는 것부터 강하고 높은 패스를 트래핑 하는 것 등등 기본기를 하나씩 꼼꼼하게 점검했다.
티알의 자세가 어색하면 말해줬고, 티알은 내 말대로 열심히 했다.
티알은 처음에 부모님의 시선 때문인지 움직임이 어색했고, 집중도 잘하지 못했다. 그래도 훈련이 진행되자 부모님은 잊고 훈련에 집중해 냈다.
그리고 나는 티알의 훈련을 돕기만 한 건 아니었다. 다음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해야 할 게 있었다.
“으아악! 뭐 이렇게 세냐! 손가락 비틀어질 뻔했다.”
“야! 막지 말라니까. 그냥 가운데에 서 있어도 된다고. 상상은 내가 할 테니까.”
티알에게 부탁해서 슈팅과 프리킥을 연습해 봤다. 다음 주에 공현성을 상대하기 위해서 감각을 가다듬어놔야 했다.
“그냥 해봤다. 골키퍼들은 이런 걸 막고 있는 건가.”
“내가 무지막지한 거야.”
“현준, 박종혁 같다.”
“그거 심한 욕이야.”
“그런가.”
티알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낄낄 웃다가 부모님이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금세 표정관리를 했다.
티알의 부모님은 화장실 한번 가지 않고 계속 티알을 지켜보고 있었다.
티알이 웃을 때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고, 티알이 진지한 표정을 지을 때 눈에 힘을 주시는 모습을 틈틈이 봤다. 행동 하나하나에서 티알을 염려하는 마음이 전해졌다.
“잠깐 쉬다가 하자. 50분 지났어.”
“벌써? 알겠다.”
쉬는 시간이었지만, 티알은 부모님 쪽으로 가지 않으려는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일단은 묻지 않고, 티알의 부모님을 향해 잠시 쉬겠다고 소리쳤다. 티알의 아버지가 알았다고 대답했다. 두 분은 보온병에 싸 온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티알이 물을 다 마시는 걸 기다리고 나서 물었다.
“부모님한테 안 가?”
“방금까지 봤다. 이따 인사만 하면 된다.”
“그래도…… 내가 너무 참견하나?”
“맞다.”
“그래, 그래.”
내가 벌인 친선경기 축제 때문에 전국 대회가 앞당겨졌고, 티알이 더 큰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다. 티알의 상태가 이렇다 보니 부모님과 나쁜 말이 오고 간 게 아닌가 하는 찝찝함이 내 속에 있었다.
하지만 더 말했다가는 반발심만 생길 거 같아서 지금은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런데 티알이 오히려 말을 꺼냈다.
“더 잘하고 싶은데 안 돼서 답답하다…… 부끄럽다…….”
“그러냐.”
“그렇다.”
누구에게 부끄러운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5분 더 쉬었고, 훈련을 재개했다. 티알의 기본기를 더 꼼꼼하게 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열심히 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가 흐른 후, 우리는 티알의 부모님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끝났어요.”
“잘 봤어.”
티알의 어머니가 살갑게 말했다. 동시의 티알의 아버지가 어색한 동작으로 티알의 어깨를 잡았다.
“티, 티알아. 잠깐 나랑 얘기 좀 할래.”
“네?”
티알의 아버지는 연기력이 형편없었다. 티알은 아버지가 자길 데리고 가서 어머니와 내가 얘기할 수 있게 만들려고 한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대신 엄마, 이상한 말 하지 말아요.”
“내가 언제 그랬다고…….”
티알의 어머니가 작게 투덜댔고, 티알은 어머니에게 몇 번 더 신신당부하다가 나한테도 손을 모아서 제발 이상한 말 하지 말라는 몸짓을 하고 아버지와 함께 떠났다.
“티알 학교생활 얘기라도 해드려요? 그런데 티알한테 미안해서 자세히는 못 해드려요.”
티알의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는데, 티알의 어머니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 꺼내셨다.
봉투였다.
나도 모르게 입가가 굳었다.
“그…… 우리 아들 돌봐주는 게 고마워서…… 같이 맛있는 거라도 사 먹으라고…….”
눈을 가늘게 떴다. 손도 내밀지 않고 가만히 쳐다봤다.
티알의 어머니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런 뜻이 아니었는데.
단호하게 말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넣어두세요. 저는 그냥 티알이 마음에 들어서 도와주는 건데, 이런 거 주시면 제 마음을 무시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어서요.”
받고 싶은데 겸양 떠는 거라고 생각할까 봐 냉정하게 말했다.
티알의 어머니는 머뭇거리다가 주머니에 다시 봉투를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얼굴로 날 봤다.
“현준이라고 했지.”
“네.”
“티알을 왜 그렇게 잘 도와줬니? 축구부에도 데려가 줬다고 하고, 학교생활도 도와준다고 하고……. 우리 애는 그렇게 대단한 애가 아닌데……. 원래 살던 나라에서도 동네에서만 공 좀 차고 공부도 보통이었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긴 했다.
티알은 앞으로도 한국에 살면서 군대까지 가고, 한국 프로 축구리그에서 뛴다. 하지만, 나중에는 필리핀 국가대표팀에 선발된다. 또, 전생을 통틀어서, 필리핀의 월드컵 본선을 세 번 이끌 정도로 전설적인 선수가 된다.
기복이 심한 스타일이라 4대 리그에 진출한 적도 있고, 그러지 못한 적도 있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친구다.
그래도 우리나라 프로리그에서는 굳건한 주전으로 활약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프로리그의 규모를 활성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내 월드컵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만, 간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우리나라 리그 규모를 키워놔야 월드컵에서 함께 뛸 선수들의 수준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쉬고 싶으면 연락 안 하고 와도 된다! 언제든지 환영이다!
다섯 번째 전생이었나. 방황하던 시기에 내 전생 중 처음으로 필리핀의 월드컵 본선을 이끌고 큰 성공을 이룩했던 티알이 해준 말이었다.
맞다. 무엇보다 티알은 내게 부담 없이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친구 중 하나였다.
마지막 이유는 어떻게 보면 작고, 어떻게 보면 클 수 있다.
“특별한 이유 같은 거 없어요. 친구라서요.”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이유는 숨기고, 진실만 얘기했다.
티알의 어머니는 순간 숨을 멈췄다가 입을 다문 채로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눈시울이 점점 붉어지는 게 보여서 당황스러웠다.
“고맙구나…… 고마워…….”
감사를 듣고 있으니 민망해져서 티알의 어머니를 진정시키기 위해 위로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음…… 저도 고생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뭐든 새 환경에서 새로운 걸 배우면 어렵더라고요. 보진 못하셨겠지만, 티알은 적응하기 위해서 정말 노력하고 있어요. 제가 보증하니까 앞으로는 혼내는 것 보다 지지해 주셨으면 해요. 게으름 피우면 제가 끌고 다닐게요.”
“…….”
어어? 이제 입을 막고 오열을 하신다. 큰일 났다.
“그, 그만 우세요.”
“아니…… 고마워서 그러지…….”
“계속 그러시면 저 티알한테 혼나요.”
“……그러니?”
티알의 어머니가 살짝 웃으시면서 되물었다.
“예. 진짜요.”
대답하는 동안 티알의 어머니는 눈물을 닦았다. 마침 티알과 티알의 아버지가 돌아오고 있었다. 근처에 있는 슈퍼에 다녀왔는지 마실 것을 들고 왔다.
“아무튼, 본선 때 꼭 보러 오세요. 티알은 분명히 더 잘해져 있을 거예요.”
“그래, 알겠어.”
티알의 어머니는 훨씬 편한 표정으로 여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티알과 티알의 아버지에게 운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인지 품에 있던 핸드백에서 선글라스를 꺼내서 썼다.
“무슨 얘기 했어? 자. 엄마는 왜 갑자기 선글라스 꼈어요?”
티알의 어머니와 나는 대답 대신 서로를 보고, 피식 웃었다. 티알이 불안한 얼굴로 우리를 재촉했다.
“이상한 말 했구나! 무슨 말한 거야.”
“비밀이야. 그럼 난 정문 가서 기다릴게. 얘기 좀 하다가 와. 아저씨,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티알의 아버지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줬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티알이 날 손으로 붙잡으려고 했지만, 재빠르게 빠져나왔다.
그렇게 정문까지 오니 티알과 가족들이 작게 보였다.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처음 봤을 때보다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티알과 그의 어머니는 길게 포옹하고, 티알에게 말했다. 티알의 어머니의 목소리가 커서 이건 들렸다.
“다 필요 없고, 몸만 건강해. 알겠지?”
티알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티알의 아버지에게도 격려를 들은 티알은 부모님과 한 번 더 포옹하고 내 쪽으로 오면서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녀올게요!”
티알의 목소리가 훨씬 더 씩씩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