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59화
티알과 긴 패스를 주고받으며 훈련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정두식을 포함해서 열 명 정도의 축구부원이 내게 다가왔다. 맨 앞에 선 정두식이 이 무리의 대표인 것 같았다. 맨 앞에서 내게 용건을 말했다.
“우리 힘으로 진현 중학교를 이기고 싶다. 도와줄 수 있냐?”
진현 중학교?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기에 가볍게 대답했다.
“거기요? 그냥 하던 대로만 해도…….”
이길 텐데, 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이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우리 힘으로라는 말도 축구부 전체가 아니라 이 무리를 지칭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유를 듣기로 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그것부터 듣고 싶은데…….”
“아.”
전쟁에 나가는 군인처럼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정두식이 아차 했는지 표정이 평소처럼 돌아왔다.
“무슨 일인가?”
티알이 공을 들고 어느새 근처에 왔다. 함께 훈련하던 내게 축구부원들이 몰려왔으니 당연히 궁금하겠지. 나도 마찬가지고.
정두식과 박범철이 서로를 보고, 티알을 본 후 나를 바라보았다.
“현준아, 어제 시내에서 엿 같은 일이 있었어.”
박범철이 나섰다. 체육대회에서 나와 안 좋게 시작했지만, 야간 훈련 사건으로 다 풀렸다. 심지어 경기에서도 중앙미드필더 파트너로 자주 뛰니 편하게 농담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였다.
집중하고 있다는 뜻으로 박범철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자 박범철이 본격적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티알이 숙소로 돌아가고, 나랑 두식이랑 종혁이랑 PC방에 가려고 했거든.”
박범철을 잘 따르는 1학년생들이 얘기도 안 나왔는데 표정을 찌푸리고, 화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길래 그러지.
의문을 가지고 박범철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진현 중학교 축구부와 말다툼을 벌인 일을 들었다.
어느새 나도 박범철의 추종자들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가 났다는 말이다.
“뭐라고요?!”
뒤통수가 순간 뻣뻣해졌다고 느꼈다.
박범철 뒤에 있던 동갑내기 김성호가 말했다.
“우리도 아까 얘기 듣고 열 받아 가지고! 비록 우리가 주전은 아니지만, 너한테 도와달라고…….”
“또, 또!”
정두식이 김성호의 말을 끊었다. 김성호가 흠칫하더니 말을 바꿨다.
“진현 중학교를 상대로 복수하고 싶어. 한 팀을 상대로 열심히 준비한다면 우리도 출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김성호는 그렇게 말하며 정두식의 눈치를 봤다. 정두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궁금해지는 걸 참고, 일단 김성호가 했던 말에 대답해 주려고 잠시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 팀을 상대로 후보 선수의 깜짝 출전을 준비하는 건 프로에서도 은근히 있는 일이다.
“도와달라는 거면 훈련을?”
“응…….”
김성호가 내 눈치를 보는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는데. 김성호를 도와주는 건 어렵지 않다. 정두식이나 박범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같은 생각인 거지? 괜찮겠어?”
박지훈에게 물었다. 전지훈련 때 박지훈의 무리를 도와주려고 했던 적이 있는데, 거절당했었다.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박지훈이 말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야. 진현 중학교를 상대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싶어. 지상철이나 그 2학년들이나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 음, 염치없을 수 있겠지만…….”
박지훈이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성동현이 말했다.
“너한테 도움받기 싫다고 한 적 있으니까 이러는 게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괜찮아. 이유도 이해가 가고.”
“고마워. 두식 선배 말 들으니까 우리가 예전에 한 말로 자존심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는 걸 알아서…….”
“무슨 말을 들었는데?”
정두식을 보면서 물었다. 정두식이 고개를 열심히 저었지만, 박지훈은 멈추지 않았다.
박지훈은 정두식이 해준 말을 꼼꼼하게 전달했다. 김성호가 왜 정두식의 눈치를 봤는지 이해가 갔다.
정두식은 옆에서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자신의 귀가 빨개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정두식을 전생에 몇 번을 봤는데, 속은 난리가 났을 거다. 장난기가 샘솟았다.
“역시 두식 선배, 우리 축구부의 정신적 지주, 믿고 있었습니다.”
“제발 좀 닥쳐줘…… 아니, 도움받으려는 처지에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정두식은 부끄러움과 해야 할 일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편하게 말해주세요.”
“그러면 닥쳐줘.”
망설임 없는 정두식의 한마디에 여기 모인 모두가 웃었다.
정두식은 부끄러운지 나를 재촉했다.
“어떻게 할 거야. 안 된다고 얘기하면 감독님한테 물어볼 게.”
“…….”
“어떻게 할 거냐니까?”
“…….”
정두식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자, 정두식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지금 닥치라고 했다고 그러는 거?”
“예.”
“으아악! 이 자식이!”
적당히 놀려야겠다. 정두식이 광분하려는 것 같아서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줬다.
“도와드릴게요.”
“선배 알기를…… 뭐?”
“도와드린다고요.”
사실 윤태상이 2학년 중에는 최고의 재능과 실력을 갖고 있지만, 정두식이 더 주장감이긴 했다. 실력은 떨어질지라도 정 많고 오지랖이 넓어서 성격이 적합하다.
역시 어떤 삶이든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 사실에 괜히 기뻐져서 미소가 지어졌다.
“근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감독님한테 허락을 받아야 할 거 같아요.”
내 앞에 모인 부원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리 축구부의 절반 정도다.
개인 훈련 시간을 쓴다고 해도 이 정도 인원이 함께 훈련하고 있으면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 로베르토의 허락이 필요하다.
또, 정두식이 한 일을 로베르토에게 얘기해 주고 싶었다. 자기 선수가 성장하는 모습은 감독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일 테니까.
“그러면 같이 가자.”
“괜찮아요. 혼자 다녀올게요. 우르르 몰려가면 조직폭력배 같아요…….”
내 말에 몇몇이 웃었다. 로베르토에게 가기 전에 잠시 이들을 둘러봤다.
정두식과 박범철, 박범철을 따르는 1학년들. 박지훈과 성동현을 포함한 중간에 들어온 부원들.
박범철을 제외한다면 프로에 가기도 어려운 부원들이다.
자기들도 잘 알고 있다는 걸 안다. 그런 사람들이 목적을 가지고 자존심을 굽히면서 나한테 부탁했다.
하루에 해야 할 훈련은 완벽하게 하고 있다. 티알을 돕는 것도 남는 시간에 하고 있었다. 남는 시간에 일 하나 더해지는 건 환영하고 싶었다. 기왕이면 하루를 알차게 쓰고 싶었으니까.
진현 중학교와의 경기는 내가 부상을 입어서 출전 못 하는 게 아니면 무조건 이길 거지만, 기왕 이기는 거 더 즐겁게 이기면 좋을지도 모른다.
전생의 내 삶을 꼬아버린 시발점이자 이번 생에서도 인성 낮은 짓을 연발하는 지상철을 혼내줄 마지막 기회기도 했다.
솔직히 감정은 많이 옅어졌지만, 그 사실만큼은 명백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럼 다녀올게요.”
* * *
로베르토는 운동장에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로베르토는 자료를 읽는 것도 운동장에서 한다.
자유 훈련시간에 축구부원들이 훈련하면서 궁금한 게 있으면 편하게 물어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뭔 일이냐? 너한테 우르르 몰려가던데.”
그래서 로베르토는 내가 다가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축구부원 절반 정도가 나한테 몰려와서 뭔가를 얘기하고, 내가 자신에게 왔으니까.
“뭐냐면요…… 차례로 설명해도 되죠?”
“시간 많아.”
먼저 저들의 부탁을 얘기하기 전에, 어제 있었던 진현 중학교 축구부원들과의 사건을 이야기했다. 로베르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어서 박지훈에게 들은 정두식이 한 일을 천천히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저들이 무슨 부탁을 했는지를 말했다. 그동안 로베르토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말을 끝맺은 후, 로베르토가 기쁨을 누릴 시간을 주기 위해 얌전히 기다렸다.
로베르토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잘했네…….”
누구를 말하는건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렇죠? 두식 선배가 사람이 참 괜찮아요.”
로베르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퇴하면 코치 하려나? 미리 찍어놔야겠는데.”
“그거 괜찮은데요?”
로베르토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뭐, 먼 미래지. 코치 데리고 다니려면 나부터 성공해야 할 테니까.”
“금방 성공할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 거니까. 로베르토가 눈을 찌푸리면서 헛소리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했다.
“됐어. 미래는 모르는 거야. 아무튼, 박지훈네가 의욕 떨어진 건 알고 있었어. 훈련 때도 보이고 김정빈 코치님이 말해줬거든.”
김정빈 코치는 박지훈네와 여름방학부터 인간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대화가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서 로베르토에게 다시 물었다.
“도와줘도 되나요? 얘기하는 거 들어보면 제가 개인훈련에 조언을 해줬으면 하는 거 같던데.”
로베르토가 갸웃했다.
“뭐가 문제야? 조언은 원래 해줬잖아.”
“한 명 한 명 하는 거랑 단체는 다르죠. 보는 눈이 많은데.”
아까도 생각했지만, 괜히 위화감을 조성할 수도 있다.
로베르토도 바로 수긍했다.
“……그건 맞네. 근데 너는 안 피곤하겠어? 운동량 늘렸잖아.”
“괜찮아요. 기말고사 포기하고 수업 때 눈뜬 채로 명상하면 돼요. 피로는 조절하면 되죠.”
“……별걸 다 할 줄 아네.”
전생의 경험을 통해 얻은 노하우다.
“전교 1등은 포기해야겠지만요.”
그동안의 성적이면 부모님과 정미영 선생님을 충분히 즐겁게 해 드렸다고 생각하니까 괜찮을 거다. 전국대회 예선까지 겹치니 이해도 해주실 거고.
로베르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해. 내일 미팅 때, 축구부원들한테 내 지시로 네가 너희들 훈련 돕는다고 공지해 줄게.”
“감사합니다.”
“팀 훈련량 생각해서 걔네 훈련량이랑 컨디션 조절도 할 수 있지?”
로베르토의 물음에 멈칫했다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할 수 있죠. 근데 너무 믿는 거 아니에요?”
“너는 그냥 규격이 다른 애인데 똑같이 대하는 게 이상하지. 떠나는 날까지 코치처럼 부려 먹을 거야.”
로베르토는 당연하다는 듯 얘기했고, 나는 망설임 없이 항의했다.
“그러면 월급 주세요.”
“야, 봐줘라. 박봉인 거 알잖아.”
“농담이에요.”
로베르토와 나는 서로를 보면서 작게 웃었다.
로베르토가 너스레를 떨었다.
“이 자식, 자꾸 어른을 놀리네. 아무튼 난 허락했다. 그리고 박범철네는 또 무리한 훈련 못 하게 감시 좀 해줘.”
“알겠어요. 근데 뭐 보세요?”
용건을 끝마치고, 로베르토의 손에 들린 서류를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오기 전까지 로베르토가 읽고 있던 건데 얼핏 보니 로베르토가 평소에 만드는 서류와 양식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로베르토가 내게 서류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저번에 찾아왔던 전북축구협회장님이 읽어달라는 게 있어서. 한국 유소년축구대회 개편계획이라는데 보고 이상한 거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셨어.”
신기했다.
“논문 공부하는 줄 알았어요.”
로베르토가 고개를 저으며 기지개를 켰다.
“일요일이야. 직장인들은 쉬는 날이라고, 나도 좀 쉬어야지.”
“쉴 거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누워 있는 게 최고 아니에요?”
“난 이게 쉬는 거야.”
로베르토는 일벌레다. 쉬는 것도 그랬다. 기존에 하던 일 말고 다른 일을 하면서 머리를 식히는 타입이었다.
전생에서도 신기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전생의 생각에 잠겨 있으니 로베르토가 추가로 말했다.
“날 필요로 한다는 게 기분 좋기도 해서.”
로베르토는 외국인이다. 여타 전생에서 로베르토는 축구협회는커녕 감독들이랑도 친하게 지내는 경우가 드물었다.
바로 해외로 떠나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는 로베르토를 축구부 감독으로 데려올 때마다 미안한 감정이 드는 이유기도 했다.
잘 지내는 거 같아서 다행이다.
“부탁하는 거 다 들어주면 호구 돼요.”
“받을 거 다 받고 하는 거야. 걱정하지 마라. 자문료 주신다고 했어.”
완벽하니까 걱정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이번 생의 로베르토에게는 좋은 사람이 유난히 더 많이 모여 있는 거 같았다.
“나준하 감독님에 한 지역의 협회장까지…… 어중간한 감독한테는 인맥도 안 꿇리겠네요.”
“……그러게.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됐다.”
로베르토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런 로베르토에게 가장 궁금한 걸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재미있어요?”
“응.”
망설임 없는 대답에 안심됐다.
“그러면 됐어요.”
로베르토에게 적어도 2년 안에 이탈리아나 다른 빅리그의 팀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줄 계획이었다.
그때까지 로베르토가 즐겁게 지낼 거 같아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