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60화
정두식과 축구부원들에게 돌아가는 동안 머릿속으로 훈련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정두식네에게
“허락은 받았어요.”
라고 말했다.
정두식과 축구부원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훈련 계획을 공지했다.
“오늘은 범철 선배, 금요일과 토요일은 두식 선배,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두 선배님을 제외한 분들을 도와드릴게요. 묶어서 하는 이유는 훈련 방식 때문이에요.”
그렇게 나는 박범철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현준아, 곧 잘 시간이잖아.”
박범철이 먼저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만큼 조언이 필요 없으니까요.”
박범철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건방져 보일 수 있겠지만, 일단 깔고 들어가야 할 게 있었다.
“먼저, 저는 우리 축구부원들의 장단점을 다 파악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세요. 선배님의 장단점도 다 알아요.”
“뭐?”
“제 말을 무조건 신뢰해 달라는 거예요. 시간이 많이 남은 것 같으면서 부족하거든요. 의견 나누면 손해에요.”
박범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범철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선배님들이 먼저 부탁하셨으니까,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 제가 안 볼 때도 열심히 해주세요.”
“걱정하지 마. 너랑 나는 저기 위에 초등학교 앞에서 본 적도 있잖아.”
“그때처럼 무리하라는 소리는 아니에요. 철저하게 계산해서 할 거예요.”
“그래. 그런데…… 정말 다 안다고?”
박범철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네, 뭘 잘할 수 있을지, 뭘 못하는지도요.”
“……너 진짜 뭐냐.”
입만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한 팀을 이기는 걸 목표로 준비하는 건 생각보다 간단해요. 상대 팀을 관찰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는 거죠.”
“알지.”
“그리고 자주 상대할 선수들을 분석하고, 장점은 틀어막고 단점은 파고들고, 습관을 이용하기 위한 훈련을 하는 거죠. 선배님이 자주 상대할 선수가 누구죠?”
“홍준서지.”
여름방학 전에 박범철은 후보 중앙미드필더였다.
홍준서 등이 떠나고 홍준서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지상철은 딱 한 가지 전술을 그럴듯하게 운용한다. 공격형미드필더 자리에 에이스를 넣고 몰아주는 방식이었다. 예전에는 윤태상이 그 역할을 했고, 진현 중학교에 가서는 윙에서 잘하는 유망주의 포지션을 바꿔 버릴 정도로 전술에 집착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거밖에 못 한다.
홍준서 등을 데려간 이유도 단순하다. 같은 걸 하려는 거니까 가르친 부원 중에 괜찮은 부원들을 데려간 것이다.
그러니까 박범철은 홍준서의 후보였고, 같은 전술훈련을 반복했었다.
“홍준서가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까다로워하는지 알죠?”
“알지.”
그렇기에 알 수밖에 없다.
“좋아요. 그 정보를 토대로 지금의 홍준서가 얼마나 더 성장했는지, 진현 중학교에서는 어떤 역할로 뛰고 있는지 두 눈으로 보고 파악해야 해요. 같은 전술을 쓴다고 해도 선수가 달라지면 움직임이 달라질 수밖에 없거든요.”
“좋아.”
“이건 선배님한테 맡길게요.”
“응?”
본격적인 팁을 말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자신에게 다 맡긴다고 하니 박범철이 당황했다.
“더 중요한 게 있거든요.”
박범철이 표정을 바로잡고 침을 삼켰다.
내가 시킬 훈련은 단순했지만, 왜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유를 알고 하는 훈련과 모르고 하는 훈련은 천지 차이니까.
“선배님이 우리 팀에서 맡은 역할을 유럽에서는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요?”
박범철은 수비형미드필더 자리에서 팀을 조율하는 나와 공격형미드필더 자리에서 때로는 공격수 자리까지 올라가는 윤태상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맡고 있다.
“여, 영어로?”
“상관없어요.”
박범철이 긴장한 얼굴로 고민하는 거 같더니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세, 센터? 센트럴? 미드필더?”
“……혀는 갑자기 왜 굴려요?”
“그래, 나 공부 못 한다. 이 자식아.”
“아니, 왜 그렇게 가요.”
박범철은 민망한지 시선을 피했다. 박범철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기에 본격적으로 설명했다.
내가 물어본 건 어디서 뛰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뛰는지였다.
“제가 수비형미드필더 자리에 서고 있지만,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게 다양하잖아요? 제 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역할을 앵커라고 부르고, 저처럼 뒤에서 팀을 조율하는 수비형미드필더를 딥라잉플레이메이커라고 불러요. 이런 역할을 물어본 거였어요.”
“아…… 그래, 역할. 역할 알지.”
괜히 유럽에서 어떻게 부르냐고 물어봤다. 더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냥 경기 때 뭐 하는지 물어볼걸.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 이어서 설명했다.
“명칭이 중요한 건 아니에요. 나라마다, 전문가마다 제멋대로 부르거든요. 자기들이나 팬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고 임의로 붙인 이름이라. 사실 우리가 뛸 때는 내가 앵커다! 이런 거 깊게 생각 안 하고 뛰잖아요. 훈련하던 대로 하는 거지.”
“그렇지.”
그래도 역할을 부르는 명칭은 중요하다. 명칭이 있다면 경기 중에 자신의 역할을 되뇌고, 뭘 훈련해야 할지 목표가 뚜렷해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범철 선배가 맡고 있는 역할은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라고 불러요.”
“뭐? 박스? 상자가 왜 나와.”
“아니, 그 박스가 아니라.”
박범철이 또 뚱한 얼굴을 했다.
“두식이 말이 사실이었구나. 네가 가끔 공부 잘한다고 자길 놀린다더니…….”
음해를 당하다니 억울했다.
“아니거든요. 들어보세요. 골대 주변을 페널티박스라고 부르잖아요.”
“설마?”
“맞아요. 페널티박스를 박스라고 줄여서 부르는 거예요. 어려운 단어가 아니라고요. 우리 팀 페널티박스에서 적 팀 페널티박스까지 끊임없이 뛰면서 궂은일을 하는 미드필더를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라고 불러요. 박스에서 박스까지 뛴다는 말이죠.”
“오…….”
“어때요?”
박범철이 신기해했다.
“응. 내가 하는 거네.”
“측면 수비수들과 함께 일반적으로 축구에서 가장 많이 뛰는 역할이죠. 그러면 뭐가 중요하겠어요?”
박범철은 가장 많이 뛰는 부원이었다. 자기 역할에 뭐가 필요한지는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체력.”
“역시 선배님. 정답이에요.”
박수도 쳤다. 아닌 척했지만, 삐진 것 같았던 박범철의 표정이 풀렸다.
“맞아요. 그러니까 지금 체력 훈련 프로그램을 짜 드릴 거예요. 일주일에 한 번씩 일요일마다 짜줄 테니까 절대 게으름 피우면 안 됩니다.”
로베르토는 휴가에서 선수들이 복귀하면 감독 숙소 겸 식당에다 훈련 일정을 적은 표를 붙여준다. 아까 봤기 때문에 머릿속에 있다. 로베르토의 말대로 그걸 토대로 박범철이 견딜 수 있지만, 한계까지 쥐어짜 내야 하는 프로그램을 짜줄 것이다.
“자, 그럼 앉아서 기다리세요.”
설명을 마친 나는 근처 벤치에 가서 앉았다. 벤치에는 내 가방이 있었다. 가방에서 항상 가지고 다니는 공책과 펜을 꺼냈다.
박범철이 내 옆에 앉았다.
“……체력? 그걸로 되는 거야?”
“중앙미드필더가 갖춰야 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요. 한 달 만에 여러 가지를 할 수 없으니 가장 중요한 걸 하는 거예요. 팀 훈련도 해야 하지, 상대 팀이랑 상대 선수 분석하는 것도 해야 하지, 여기에 체력 훈련까지 하면 다른 거 할 시간 없어요.”
눈은 노트에, 손은 바쁘게 움직이면서 박범철의 질문에 대답해 줬다.
“으음…….”
“시간이 없는 만큼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하셨는지가 중요해요. 열심히 하셨어요?”
잠시 펜을 멈추고 박범철을 바라보았다.
박범철은 충격받은 눈으로 잠시 멈췄다가, 눈에 힘을 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박범철이 열심히 한 건 내가 잘 안다.
“그러면 괜찮을 거예요. 아까 제가 말했잖아요. 제 말을 신뢰해 달라고.”
“미안하다.”
“괜찮아요. 선배님이 해야 할 중요한 게 하나 더 남았거든요.”
“체력훈련 말고 또?”
“체력훈련 관련이에요.”
중학생이니까 회복력이 남다르긴 하다. 하지만, 매주 경기를 뛰고 체력 강화 훈련을 하는 건 몸에도 안 좋고 경기에도 안 좋다.
“훈련 강도를 올리면서 경기도 다 풀타임으로 뛴다. 가능할 거 같아요?”
짧은 기간도 아니고 거의 한 달이다. 프로팀들이 시즌을 준비할 때 말곤 고강도의 체력 훈련을 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정신력으로…… 안 되겠지?”
박범철은 조심스럽게 말하다가 내가 정색하자 황급히 말을 바꿨다.
“정신력은 최후의 보루고요. 평소에는 합리적으로 해야죠. 제가 이거 다 쓰면 감독님한테 가서 솔직하게 말하세요. 진현 중학교 때 전력을 다하고 싶으니 경기 출전 시간 조정이 가능하겠냐고.”
프로 선수였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일 수 있지만, 축구부다.
진현 중학교와의 경기가 가장 중요하기도 하기에 전략적으로도 나쁜 게 아니다. 로베르토는 박범철이 부탁하면 거절하진 않을 것이기도 하다.
“……감독님한테? 직접?”
하지만 박범철은 정두식이 아니다. 그런 게 익숙하지 않다.
“선수 선발 얘기를 감독님한테…… 화내지 않으려나?”
원하는 걸 얻고 싶으면 축구만 연습해선 안 된다. 필요할 땐 해야 한다.
이런 태도는 팀에도 안 좋다. 속에 불만이나 원하는 걸 담아놓고 얘기하지 않으면 팀 분위기를 해칠 수도 있고 선수의 기량도 떨어진다.
대화를 통한 정리가 필요하다.
일부러 한숨을 쉬었다.
“선배님. 진현 중학교를 진짜로 이기고 싶은 거 맞아요?”
박범철이 당황하더니, 급히 말했다.
“이기고 싶은 거 맞아.”
“그러면 말해요. 로베르토 감독님은 자기 의견 얘기하면 좋아하면 좋아했지,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아직도 모르겠어요? 안 되면 안 된다고 하시겠죠.”
“그렇지만…….”
“우리 감독님은 지상철이 아니에요. 로베르토라고요.”
박범철이 망설이는 이유를 정확히 짚어줬다.
박범철이 깨달은 얼굴을 했다.
“알겠어.”
“좋아요. 그러면 그건 알아서 하시고, 저는 감독님이 적절하게 출전 시간을 조정해준다고 가정하고 계획을 짤게요. 잠깐만 기다려 봐요. 다 적고 뜯어서 드릴게요. 감독님한테 보여드리면서 여쭤보세요.”
“……고맙다.”
박범철의 말에 살며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뭘요. 저도 홍준서가 선배님들을 함부로 말한 건 마음에 안 들거든요. 선배님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시는데.”
박범철의 몸이 멈추는 게 느껴졌다. 조용해졌다. 박범철이 옆에서 그러건 말건 나는 전생의 기억에서 박범철에 맞는 훈련 종목들을 찾아내고, 조합하는 데 집중력을 쏟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박범철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고맙다.”
“뭘요.”
늦가을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낙엽 소리와 펜이 움직이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