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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인드 축구천재-161화 (128/173)

리마인드 축구천재 161화

로베르토가 서류 검토를 마치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로베르토는 벤치에 등을 기대며 기지개를 쭉 켰다. 늦가을 바람이 시원했다.

-재미있어요?

문득, 방금 송현준이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던 것처럼, 로베르토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르토는 리프팅을 비롯한 자유 훈련을 하는 축구부원들을 보고 있었다.

부임한 지 반년이다. 길다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이었다. 그동안 축구부원들은 틀림없이 알찬 시간을 보냈다. 첫 자유 훈련에서 뭘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던 그들은 이제 각자의 훈련에 집중하고, 웃고 떠들 여유까지 생겨 있었다.

또, 자신도 알찬 시간을 보냈다.

로베르토는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물론, 전부 자신의 실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운이 많이 따랐다.

로베르토는 박범철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는 송현준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멀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지만, 박범철이 진지하게 듣는 게 보였다.

가장 큰 운은 저 아이, 선수, 축구부원, 아니면 친한 동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송현준을 만난 거였다.

조기축구회에서 우연히 만난 송현준은 로베르토가 축구부를 운영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모범적인 태도로 훈련에 도움이 되는 건 물론이고, 전지훈련 장소를 구하기도 했다. 송현준 덕분에 경기에서도 여러 전술적인 실험을 할 수 있었다.

송현준이 가장 고마운 사람은 맞지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축구부 구성원 전체에게 로베르토는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송현준처럼 조기축구회에서 인연을 맺은 이사장 박영대는 자신을 신뢰하고 축구를 좋아해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기존에 있던 김진호 코치나 새로 들어온 김정빈 코치나 업무량이 많음에도 군말 하나 없이 자신을 도와줬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 성장하고 있는 축구부원들도다.

자신의 유소년 시절을 떠올려 보면…… 원래 이 나이대 선수들은 감독이나 코치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여도 경기나 훈련에 들어가면 말을 안 듣는 놈이 태반이었다.

감독이나 코치한테 대놓고 따지는 선수들도 심심찮게 봤다.

트러블이 아예 없던 건 아니지만, 이곳의 선수들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을 잘 듣고, 실행해 줬다.

의문을 가지면서도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는 게 눈으로 보였다.

“흐음…… 선배님! 인간적으로 그건…….”

근처에서 다양한 패스를 주고받는 훈련을 하던 박종혁의 목소리에 로베르토가 시선을 옮겼다.

“더 말하면 죽는다.”

“초등학생 축구부원도 안 할 실수…… 라고 하고 싶지만 참겠습니다.”

“다 말했잖아! 이 자식이! 잡히기만 해봐!”

박종혁은 발끈한 노태신에게 쫓기기 시작했다. 박종혁의 말대로 노태신은 오늘 컨디션이 별로인지 심각한 트래핑 실수를 하긴 했다. 훈련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로베르토는 생각했다.

“악! 잘못했습니다!”

“내가 갈 때 됐다고 자꾸 까불어!”

박종혁이 노태신에게 헤드록을 당하며 비명을 질렀다.

근처에서 훈련하던 다른 축구부원들이 그 모습을 재밌다는 듯 보고 있었다. 로베르토도 웃었다.

말도 잘 듣고, 분위기도 좋고, 착한 선수들이다.

로베르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중 프로가 될 수 있는 선수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걸 로베르토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휘경 중학교와의 친선경기를 통해 전국대회의 수준을 가늠한 로베르토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이들은 한 팀으로 봤을 때 전국대회에서는 제 역할을 할 정도의 재능들은 갖추고 있다. 송현준이라는 이질적인 존재를 제외하고서도.

그렇게 판단했다면, 이들의 실력을 끌어내는 건 자신의 몫이었다.

로베르토는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송현준은 이번 대회를 끝으로 떠난다고 했다. 걱정도 됐지만, 동시에 기대도 됐다. 로베르토는 자신의 능력과 남은 축구부원들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고, 새로 들어올 축구부원들을 만나는 게 설렜다.

그런 기분을 즐기다가, 로베르토가 한숨을 쉬며 혼잣말했다.

“……쉴 땐 좀 쉬어야 하는데.”

송현준에게는 다른 일 하는 게 쉬는 거라고 말했지만, 이탈리아에 있는 친구들도 송현준과 비슷한 말을 하곤 했다. 덕분에 로베르토는 자신의 쉬는 방식이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로 쉬는 효과가 있는 건지도 의문이 들 정도였다.

로베르토는 송현준이나 친구들의 말대로 멍하니 눈을 감고 쉬어볼까 생각했다. 선수들에게 휴식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막상 자신은 일하면서 쉰다는 게 이상하기도 했으니까.

그때였다. 로베르토가 눈을 감으려는 찰나, 박범철이 뻣뻣한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있는 걸 발견했다. 멀리서 송현준이 박범철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해서 박범철을 빤히 바라보니 박범철이 화들짝 놀라면서 시선을 피했다. 그 와중에도 발걸음은 로베르토를 향하고 있었다.

할 말이 있는 거구나.

쑥스러워하는 모습은 선수라기보다는 학생 같다. 선수와 학생 둘 다가 될 수 있는 축구부원의 학생다운 모습은 로베르토를 웃게 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로베르토는 입가에 힘을 줘서 웃는 걸 참았다. 박범철이 편하게 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로베르토가 서류를 보는 척까지 하자 박범철은 금방 도착해서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응, 그래.”

“…….”

박범철은 긴장했는지 굳어 있었다.

편한 말투로 도와주기로 했다.

“무슨 일이야?”

“그…… 저랑 두식이가 시내에서 진현 중학교 애들을 만났는데요….”

박범철은 두서없이 말을 시작했다.

송현준이 해준 이야기의 재탕이어서 로베르토는 완벽하게 집중하지 못했다.

많이 긴장해서 그런지 송현준이 먼저 말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한 거 같았다. 말했어도 까먹었든가.

송현준에게 들은 시내에서 있었던 일 이야기가 끝나고, 박범철은 지상철이 떠났을 때의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박범철의 표정에 순간 분노가 드러났고, 로베르토는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텅 빈 숙소에서…… 저랑 두식이는 멍하니 누워 있었어요.”

박범철의 속마음은 송현준의 이야기에서는 알 수 없었다. 더 집중하게 됐다.

“우리가 얼마나 재능이 부족하면 버려졌을까, 그런 얘기를 가끔 주고받았죠.”

로베르토는 그런 생각까지 했다는 것에 화가 났다. 하지만, 그 얘기를 하는 박범철의 표정이 다시 평온해졌기에 화를 내진 않고 동조만 했다.

“화가 많이 났겠네.”

“맞아요. 근데, 감독님이 오시고 정신이 없어서 우울한 생각 할 틈이 없더라고요.”

박범철이 웃으면서 말했다.

“다행이네.”

진심이었다. 그리고 박범철이 왜 자신에게 왔는지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만 합쳐보면 하소연만 하고 있었다.

훈련 얘기는 이미 송현준이 했고, 박범철은 뭘 원하는 걸까?

궁금하긴 했지만, 로베르토는 기다릴 수 있었다.

마음이 편안했기 때문이었다. 로베르토는 그 순간 확신했다. 선수이자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로베르토에게는 휴식이라고. 마음이 편안해지는데 이게 휴식이 아니면 뭘까.

로베르토는 자신의 방식이 틀리지 않았음을 본인도 모르게 알려준 박범철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면서 기다렸다.

드디어 박범철의 입에서 로베르토가 기다리는 말이 나왔다.

“그래서 그런데…….”

“천천히 말해봐.”

“……진현 중학교를 상대로 꼭 이기고 싶어요. 그래서 현준이한테 도와달라고 했고…… 현준이는 제가 짧은 기간에 체력을 길러야 한다고 했어요.”

끄덕끄덕, 로베르토가 고개를 흔들자 박범철이 한숨을 쉰 후 말했다.

“체력훈련 프로그램을 따라가려면 출전 시간 조정이 필요하대요.”

10분 넘게 기다린 끝에 나온 본론이다.

박범철이 송현준이 적어 줬다는 체력훈련프로그램 표를 로베르토에게 건넸다. 한글과 영어를 둘 다 적어놔서 알아보는 데 문제는 없었다.

“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역시 송현준이다. 훌륭했다.

물론, 박범철의 출전 시간을 절반 정도로 줄였을 때 말이다. 송현준은 그 정도는 빠져야 훈련 효율이 나온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로베르토가 박범철을 보며 물었다.

“정두식 친구라서 휩쓸린 건 아니야? 차분하게 생각해 봐. 출전 시간을 줄이면 그만큼 널 증명할 기회가 줄어드는 건데 괜찮겠어?”

박범철은 틀림없는 주전이다. 로베르토가 원하는 역할을 팀에서 가장 잘 소화한다.

가장 효과적으로 이기기 위해서는 이런 질문 대신 안 된다고 거절하는 게 맞다.

프로축구였다면 말이다.

“……그런 게 아예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제 의지입니다.”

로베르토는 박범철이 긴장한 채로 자기 소망을 말하는 모습을 보며 알을 깨려는 아기 새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로베르토가 말없이 자신을 보고 있자 박범철이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갑자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귀찮게 해서…….”

“아니야, 괜찮아.”

두 번째 라운드까지 오면서 로베르토는 모든 팀의 경기를 두 눈으로 봤다. 진현 중학교의 선수들은 신영 중학교와의 일전에서는 정신적으로 많이 흔들렸지만, 다음 경기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기본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강팀이 맞았다.

공현성의 신영 중학교는 골키퍼를 중심으로 한 특유의 한방이 있어서 위험했지만, 이미 이겨서 만날 일이 없다.

그리고 나머지 중학교는…… 냉정하게 말해서 대영 중학교보다 한참 아래였다. 진현 중학교와의 경기 전까지 당연히 전승을 해야 한다.

로베르토는 다른 팀들과 전력 차가 나는 걸 활용해서 후보 선수들이 실전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마지막 경기까지 틈틈이 실험할 생각이었다.

박범철의 요청을 들어주려면…… 박범철의 자리에서 뛰는 후보 선수들의 출전 시간을 늘리고, 그에 맞춰 계획을 수정하면 된다.

잠 좀 덜 자면 된다.

생각을 정리한 로베르토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알겠어. 원하는 대로 해줄게.”

박범철의 표정이 밝아졌다.

“네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건 항상 생각하고.”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긴장했지만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이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로베르토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 열심히 해라.”

“열심히 하겠습니다!”

박범철의 큰 목소리에 축구부원들의 시선이 모였다. 박범철이 민망한지 고개를 숙였다.

“대답 참 우렁차다. 그리고 그때까지 기량이 안 올라오거나 부상을 입는다면 경기에 무조건 출전하지 못할 거라는 거, 항상 생각해.”

박범철이 진지한 얼굴로 이번에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범철의 눈동자에서는 용기를 낸 것에 대한 기쁨을 읽을 수 있었다.

정두식뿐만 아니라 모두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장하고, 성장한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아까 송현준에게 말했던 것처럼 로베르토는 이곳에서 일하는 게 즐겁다고 느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아차, 궁금한 게 있었는데.”

박범철이 뒤로 돌려다가 멈췄다.

“너 말고 다른 애들도 오려나?”

“모르겠어요. 현준이가 각자 다르게 하겠다고 하던데‧.”

“그래?”

“너무 대단해서 질투도 안 나는 녀석이에요.”

“그건 그래.”

로베르토는 박범철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 내일부터 어떻게 도와주는지 구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지금 느껴지는 기쁨, 그러니까 보람을 즐기기도 바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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