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인드 축구천재 171화
“먼저 보자고 할 줄은 몰랐는데. 나 학원도 빼고 왔다?”
“그, 그런가?”
“응! 오늘 뭐 하고 놀까? 노래방 갈까? 티알 너 노래 잘하잖아. 그렇지?”
“어, 어음.”
티알은 눈앞에 있는 여학생의 높은 텐션에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박종혁, 정두식, 박범철과 함께 놀았을 때 자신의 말에 가장 잘 웃어주던 여학생이었고, 나중에 밥 같이 먹자고 몰래 얘기했던 친구였다.
공현성과의 협동 훈련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수렁으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박종혁에게 부탁해서 눈앞의 여학생과 연락을 했고, 단둘이 저녁을 먹고 있는 거였다.
박종혁은 평소였다면 ‘오올~ 티알~.’하면서 장난을 쳤겠지만, 이번에는 등을 토닥여 줬다.
‘힘내, 자식아.’
나중에 박종혁에게 맛있는 간식이라도 사다 줘야겠다고 다짐하는 티알이었다.
“티알, 티알? 티아알? 왜 말을 안 해?”
왜긴.
눈앞에서 또래의 여학생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얘기하고 있는데.
티알은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또래의 여학생들과 놀아본 일이 드물었다. 박종혁, 선배들과 함께 놀았을 때는 박종혁과 선배들만 신경 썼기 때문에 아무 생각도 없이 얘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했다. 왠지 모르게 두근거리기도 하고, 말도 잘 안 나와서 티알 본인도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 그게…….”
뭐라도 말해보려고 했는데, 여학생이 티알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설마…… 긴장한 걸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문이 막혀서 괜히 입을 구겨 닫았다. 티알의 입 모양을 본 여학생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작게 환호했다.
“꺄아아, 반응이 귀여워.”
순간, 티알은 충격을 받았다. 귀엽다는 소리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들은 이후로 처음 듣는 말이었다. 자존심이 상해서 어렵게 항변했다.
“……귀엽지는 않다.”
“그래? 그런 거로 할게.”
여학생은 여전히 싱글거리면서 가볍게 대답했다.
놀림 받는 기분이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숨 막히던 축구부의 일상에서 도망쳐 신선한 자극을 느껴보고 싶다는 목적은 확실하게 달성하고 있었으니까.
“내 이름은 알아?”
“송다영이다.”
송현준과 같은 송씨라서 기억하기 쉬웠다.
“맞아.”
송다영은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활짝 웃었다.
티알은 아까부터 있었던 파스타를 포크로 돌돌 말다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안 먹나? 이러다 다 식겠다.”
“저녁 먹고 뭐 할지 기대돼서. 지금 먹으면 체할 거 같아.”
“그, 그런가.”
송다영이 너무 적극적이라서 위축되는 티알이었다. 여학생은 다 이런 것인가. 잘못된 편견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그래도 티알은 웃는 송다영을 보며 고민을 시작했다.
저녁을 먹고 어디를 가야 하는가.
자신이 놀아본 곳은 PC방과 노래방이 다였다. 책방은 조금 구경하려고 하니 친구들이 다 빌렸다면서 나가야 했었다.
티알은 자신의 또래가 노는 곳을 하나도 모른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저기…… 평소에 뭐 하고 노나?”
“평소?”
“나는 오자마자 축구부에 들어가서 애들이 어떻게 노는지 잘 모른다.”
“아…….”
송다영은 감정 표현이 풍부한 친구였다. 찡한 눈으로 티알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많이 놀아본 적이 없어? 그때 종혁이랑 축구부 선배님들이랑 같이 왔을 때는 편해 보이던데…….”
“그게 처음이다.”
“……와우, 축구부 무섭구나.”
괜히 축구부를 욕하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티알은 황급히 반 친구들과의 즐거웠던 기억을 꺼냈다.
“반 애들 따라가서 논 적도 있다. PC방이랑…… 책방이랑…… 노래방 가서 놀았다.”
벌써 일주일 전이었다. 낮에는 정말 재미있었는데, 저녁에는 공현성을 만났고…… 더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티알에게는 복잡한 날이었다.
티알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송다영은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비슷해.”
“그런가?”
“응응, 담배 냄새가 싫긴 하지만, 나는 총게임 좋아해서 PC방 가끔 가거든. 또, 책방 가는 애들도 좀 있고…… 노래방은 나도 좋아하고!”
“오…….”
“그나마 다른 거라면 엄청 맛있는 디저트 맛집 찾아간다고 시내 구석을 찾아다니는 거랑…… 쇼핑할 때 몇 시간씩 구경하는 거?”
“쇼핑을 그렇게 오래 하나?”
“그냥, 예쁜 물건 보는 게 재미있어.”
“그렇구나…….”
이번에는 송다영이 티알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매일 훈련만 하는 거야?”
“응. 새벽에 훈련하고 수업 듣고 오후에 훈련하고 저녁 먹고 밤에는 자율훈련을 하고 10시쯤 잔다.”
송다영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으아아, 말만 들어도 끔찍하잖아.”
“……끔찍한가? 너는 어떻길래…….”
송다영이 고민하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음…… 막상 말해보려니까 별거 없긴 한데. 엄청 평범해.”
“별거 없는 게 궁금하다.”
“그래? 그러면…… 아침에 엄마가 깨우면 일어나서 아침 먹고 학교에 가.”
보통 학생들의 생활이 어떤지 티알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궁금했다. 티알이 빤히 바라보자 송다영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자세히 말해주기 시작했다.
“학교로 가면서 만나는 친구들이랑 인사하고 반에 들어가서 수업을 들어. 쉬는 시간이랑 점심시간에는 어제 본 드라마나 가수들 공연 얘기도 하고…… 수업이 끝나면 같은 학원 다니는 친구들이랑 분식집 들려서 간식 집어 먹고…… 학원에 가서 수업 듣고, 학원 끝나면 집에 가서 저녁 먹으면서 엄마, 아빠랑 드라마 보고…… 숙제 좀 하다가 자는데?”
송다영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처럼 놀자고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학원 몰래 빼먹고 나오고. 진짜 별거 없지? 너무 평범해.”
송다영이 덧붙이면서 민망해했다. 티알은 진지하게 질문했다.
“다 너랑 비슷한가?”
“그렇지 않을까? 다들 학원 한두 개씩은 다니니까…….”
송다영에게 들은 보통의 학교생활에 티알은 자신을 대입해서 상상해봤다. 송현준을 만나 축구부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지냈을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티알은 소감을 말했다.
“신기하다.”
“그래? 엄청 평범하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세상을 보는 거 같다.”
“너는 말을 참 특이하게 하네. 재미있어.”
그래도, 티알은 부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티알은 자신이 송다영처럼 생활했으면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해 봤다.
축구를 뺀다면…… 지루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저녁 먹고 뭐 하러 갈래?”
송다영의 질문에 티알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까의 생각에 이어서 오늘 저녁 훈련을 빼먹고 왔다는 사실이 마음에 와닿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대충 보냈던 일주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아까웠다.
송다영에게 정말 미안했지만, 티알은 지금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았다.
“미안하다…… 저녁 먹고 운동장에 가봐야 할 거 같다.”
“응? 뭐?”
송다영은 티알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갸웃했다.
그리고 잠시 후,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농담이지?”
“진짜다.”
“장난치는 거야?”
“아니다.”
“이유를 말해주면 좋겠는데.”
“……정말 미안하다.”
티알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자 송다영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뚱한 얼굴이었다. 송다영은 팔짱도 끼고 있었다.
티알은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축구를 계속해야 하나 고민했었다. 일주일 동안 훈련을 제대로 안 했다. 그런데, 네 얘길 들으니까 나는 축구를 계속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어려운 말을 하네. 근데 왜 지금 가?”
“일주일 동안 제대로 안 했으니까 지금부터라도 메꿔야 할 거 같다…….”
송다영은 티알을 빤히 노려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지금 바람맞은 거야?”
티알은 바람맞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송다영의 표정과 상황을 보고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티알은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아니다. 너한테 정말 고맙다.”
“저녁 먹고 간다는 거잖아?”
“으으, 마지막 경기 끝난 날에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사겠다.”
“그때도 바람맞히게?”
티알은 자신이 잘못한 걸 알았기에 눈을 질끈 감으면서 말했다.
“약속한다.”
“두 번.”
“응?”
“두 번으로 해. 그러면 봐줄게.”
송다영의 새침한 말에 티알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말 고맙다.”
송다영은 눈앞의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이거보다 더 맛있고 비싼 거 먹을 거야.”
“좋다. 용돈 받은 거 아끼겠다.”
티알의 현실적인 발언에 내내 인상을 찡그리던 송다영이 풋 하고 웃어버렸다.
그리고 억울해했다.
“아, 짜증 나. 기분이 풀려 버렸어. 어이가 없어 가지고.”
“봐줘서 고맙다.”
“진짜, 말하는 거 봐. 아무튼, 아직 저녁 다 안 먹었으니까 다 먹고 같이 나가.”
“당연하다.”
송다영과 티알은 사소한 얘기를 하며 저녁을 먹었다. 송다영은 티알이 영어를 잘하는 모습이 꽤 멋졌다고 말했다. 티알은 부끄러워했고, 송다영은 꺄르륵 웃었다.
그리고 티알은 송다영과 헤어지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티알이 가지고 온 가방에는 다행히 운동복과 축구화도 들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곳에 와서 항상 가지고 다녔다.
티알은 자신의 생활에 축구가 얼마나 깊게 녹아 있는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티알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듯이 걸어 운동장에 도착했다.
평소보다 더 늦은 시간이었지만, 지금부터라도 하면 된다. 티알은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옷을 갈아입기 위해 운동장의 큰 나무 뒤로 향하기로 했다.
그렇게 티알은 정문을 지났다.
그때였다.
정문 바로 옆 벤치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뭐 하다 왔어?”
송현준이었다.
* * *
티알은 깜짝 놀라서 움찔했다가, 숨을 골랐다.
송현준이 왜 여기에 있는가.
일단 도둑질하다 걸린 도둑처럼 괜히 죄책감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훈련하러 온 거였다.
“저녁 먹고 훈련하려고 왔다…….”
송현준이 티알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티알은 문득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동네 친구들과 공을 차고 놀다가 동네 가게의 유리창을 깨고 도망쳤던 날이었다. 사건을 알고 있던 어머니는 지금의 송현준처럼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었다.
송현준이 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다행이네.”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었다. 정말로 걱정했던 게 송현준의 어조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티알은 송현준의 모습에 여전히 자신의 어머니가 겹쳐 보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또, 의문점이 있었다.
“현준, 훈련할 시간 아닌가?”
송현준의 운동복은 땀에 하나도 젖지 않았다.
“그렇긴 한데…… 혹시나 해서.”
“뭐가 혹시, 인가?”
이번에는 티알이 송현준을 바라보았다.
송현준이 티알의 시선을 피했다.
티알은 송현준이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티알은 송현준을 계속 바라보았다. 송현준이 결국 한숨을 또 내쉬고 말했다.
“요즘 기운 없어 보이길래, 매번 하던 훈련도 빠져 버리니까 네가 아예 축구를 포기해 버릴까 봐.”
“내가? 내가 왜 그만두나?”
티알은 송현준이 자신의 의지를 그렇게까지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려고 했다.
“송현준은 고마운 사람이다. 하지만…….”
‘날 더 믿어줬으면 좋겠다. 나는 축구를 그렇게 쉽게 그만두지 않는다.’라는 뒷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티알은 하지만, 에서 말을 멈춘 채로 송현준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왜 기운이 없었는지 티알은 이제 잘 알고 있었다.
송현준의 말과 태도에서 공현성과 자신을 다른 등급으로 보고 있다는 걸 강하게 느꼈다. 송현준은 공현성에 비하면 자신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다.
송현준은 티알을 축구부로 데려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허무함을 느꼈다.
지금 송현준의 말도 비슷하게 들렸다. 기운 없어 보이는 것 정도로 자신이 축구를 그만둘 거라고 생각하다니.
티알은 송현준이 보는 자신이 고작 그 정도라는 것이 정말 실망스러웠다.
티알은 하던 말의 방향을 틀기로 마음먹었다. 돌직구를 던지기로 했다.
“현준, 궁금한 게 있다.”
“뭔데?”
“너는 내가 공현성과 수준 차이가 심하다고 생각하나? 재능도 한참 아래라고 확신하나? 그래서, 도전도 안 하길 원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