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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를 갈아엎는 방법.
2007년 12월 7일 금요일. 1일 전.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경계라는 것들이 많다. 이 경계는 여러 분야에서 널려 있지만 이번에 언급할 경계는 상식과 냉정에 관한 경계였다.
사람은 생각하지 못 한 일이 일어나면 깜짝 놀라곤 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해 둔 대비를 넘는 일 때문에 반응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럴 때 사람은 깜짝 놀라는 것으로 방어본능을 펼친다.
하지만 사람이 진짜 생각하지 못 한 일, 받아들이지 못 할 일과 마주하면 깜짝 놀라지도 않는다. 놀랄 수가 없는 거다. 상황을 알아야 반응을 하는데 상황조차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김대형 전무와 신민준 상무가 딱 이런 경우였다. 두 사람은 생애 최초로 어떤 표정을 지어야 될지 감조차 안 잡히는 기분을 느꼈다.
“어~ 음. 그러니까 박수혁 헌터님. 제가 잘못 들은 거 같은데 다시 한 번만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표정조차 수습할 수 없는 패닉에서 먼저 회복한 건 신민준 상무였다. 하나하나 사소한 부분까지 계산하는 김대형 전무와 다르게 어느 정도 융통성 있게 움직이는 그였기에 김대형 전무보다 먼저 표정을 수습할 수 있었다.
여느 때라면 김대형 전무보다 빨랐다는 것이 소소한 자랑거리일 터였다. 그렇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때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인데요. 이 가방 안에 옐로우 던전 6곳, 블루 던전 184곳이 담겨 있다고요. 정확히는 던전 입구가 있는 땅을 산 토지매매계약서들이지만요.”
신민준 상무는 다시금 무너지려 하는 표정을 꽉 붙들어 매며 웃었다.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충격에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 김대형 전무가 무너진 표정에서 한 번 더 표정을 무너뜨릴 수 없나 고민하는 것만 봐도 사태가 얼마나 충격적인지 알 수 있었다.
“아. 그리고 이건 두 분을 뺀 나머지 간부 11명의 비리집이에요. 여태까지 뭘 얼마나 해쳐먹었는지 나와 있는데, 조사하는 내내 어이가 없더라고요. 참고로 내 어이는 지금 저 멀리 가출해 있어요.”
종이뭉치 하나가 책상 위에 올려졌다. 책으로 엮으면 영한사정 하나 나올 법한 두께가 올려지자 퉁 하고 가볍게 책상이 울렸다.
회사에서 서류 작업할 때 제법 자주 듣던 소리였건만 신민준 상무는 자신이 듣던 소리와 격이 다르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 그거 굉장하시군요. 이런 건 어떻게 구하신 건지….”
“기업비밀인데요. 굳이 말하자면 내 옆에 선 사람의 도움을 좀 받았달까. 대충 그래요.”
의자에 앉아있던 신민준 상무와 김대형 전무의 고개가 옆으로 움직였다. 책상 위에 올려진 아타셰케이스와 그 위에 쌓인 종이뭉치에서 겨우 시선을 뗀 두 사람은 가볍게 웃는 소피아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렇게 됐네요. 저는 어디까지나 조금 거든 게 다예요. 모든 준비는 수혁이 다 했답니다.”
대한민국 제일가는 자본가들 뒤를 이렇게 쉽게 털어올 수 있을 리 없다. 하물며 옆집 가서 옆집 누나 취향 조사해 왔다는 억양으로 말해지면 더더욱 그렇다. 이렇게 묵직한 비리를 가볍게 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갑자기 쳐들어 온 장본인이 데려온 자가 도왔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제아무리 대한민국 제일가는 자본가들이라 할지라도 상대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대마법사였다. 다른 정보조직에 부탁을 하든 직접 나서든, 어쨌든 그녀가 개입했는데 이 정도 일도 못 할 리 없었다.
“좋습니다. 박수혁 헌터님이 이런 걸 가지고 있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확실히 이런 걸 가지고 있으면 저와 신 상무를 부를 정도는 되는군요. 아니, 차고도 넘칩니다.”
“어? 확인 안 합니까? 내가 아무 땅 계약서 가지고 와서 사기 치는 거일 수도 있잖습니까?”
“박수혁 헌터님이 그런 시시한 일을 싫어하는 건 제가 잘 압니다.”
잘 알고말고. 알기만 할 뿐인가, 어떨 때는 남 같지 않다고도 느낀다. 김대형 전무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잘 아는 사람을 손꼽을 때 분명 다섯 손가락 안에 자신이 들어간다고 확신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갑자기 쳐들어 와서 이런 걸 들이밀었다. 가볍게 차 마시러 왔다고 끝날 이야기가 아니란 건 김대형 전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 터였다.
“그래서. 왜 온 겁니까?”
김대형 전무는 습관처럼 양손을 깍지 껴 책상 위에 올렸다. 그에 대치되듯 김대형 전무의 맞은편에 앉은 그는 다리를 꼬았다.
“이 헌터 협회가 마음에 안 들어서 엎어버리고 싶습니다. 거기에 대해 상담하고 싶어서요.”
김대형 전무와 신민준 상무를 부른 당사자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절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역시 무겁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이거 영 좋지 않은 얘기 같네요. 발 잘못 담갔다가는 발목 째로 날아갈 거 같은 그런 이야기인데.”
“어? 그럼 빠지실 겁니까? 다리 빼신다면 지금 밖에 없는데요?”
“설마요. 위기는 뒤집으면 기회잖습니까. 이런 커다란 기회를 안 탈 수 없지요.”
신민준 상무의 웃음이 짙어졌다. 실눈을 휘며 웃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여우같이 얍삽해 보였다. 하지만 살짝 뜨인 실눈 사이로 보이는 눈은 뱀의 그것과 흡사했다.
“그러면 이야기를 계속하죠. 여기에 백여 개의 던전이 있습니다. 그 중 여섯 개는 옐로우 던전이고요. 던전은 소피아를 이용해 숨겨뒀고 정당하게 매매까지 거쳤습니다.”
수혁의 손이 닫힌 아타셰케이스 위를 내리쳤다. 손이 떨어진 아타셰케이스가 쿵 소리를 울렸다.
“즉. 이 던전은 모두 내 거다, 이 말입니다. 이 던전을 조건 하에 전부 한국 헌터 협회에 대여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 조건이란?”
“김대형 전무님이 헌터 협회 회장이 되는 조건입니다.”
“휘유….”
실눈을 슬쩍 뜬 신민준 상무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반면 김대형 전무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깍지 낀 검지를 몇 번 까딱인 게 반응이라면 반응이었다.
김대형 전무는 천천히 사고(思考)했다. 이게 만일 다른 사람과의 거래였다면 볼 것도 없이 거절해야 했다. 막강한 힘을 붙여줄 테니 네가 짱 먹으라는 얘기는 네가 짱 먹으면 내가 뒤에서 널 조종하겠다고 돌려 말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건 다른 사람과의 거래가 아닐 뿐더러 절대로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상대는 박수혁, 아니, 강시현이었다. 김대형 전무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정도로 자신이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김대형 전무는 천천히 생각했다. 과연 이 인간이 뭘 원해서 이러는 것일까.
그리고 알아냈다. 천천히 생각했지만 답은 즉시 나왔다.
“깽판 치고 싶은데 뒤처리가 귀찮은 거군요. 그걸 저한테 떠넘길 생각입니까?”
“바로 그거죠.”
상대가 산뜻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즉답이 나오는 걸 보니 본심을 숨길 생각도 없었다.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신민준 상무마저도 이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솔직히 그렇잖아요. 여태까지 지들 배 처 불렀으면서 해야 할 일은 안 하는 게 괘씸한데 그냥 쑤시자니 뒤가 피곤해지고, 짜증난 걸 풀고 싶은데 오히려 짜증이 나면 본말전도잖아요.”
“그러니까 뒤처리는 제가 하고 박수혁 헌터님은 깽판만 치겠다, 그 대신 훌륭한 무기를 줄 테니 개혁은 알아서 해라. 이겁니까?”
“바로 그거죠. 역시 전무님은 대화가 통하네.”
물론 그거만은 아닐 거다. 시현이 사건 하나에서 여러 가지 이득을 동시에 후려쳐 먹는 자라는 건 자신이 잘 안다. 이번 일에도 분명 손해 보지 않을 몇 가지 이득을 챙겼을 것이다. 손해만 안 본다 뿐일까.
하지만 그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시현이 움직인 이유는 단 하나다. 그 이유는 절대 타산적인 게 아니고 이타적인 것도 아니다. 그냥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유다.
“사실 옛날부터 해 보고 싶었거든요. 높으신 분들 뒤통수 후려치기. 그것도 대가리 깨질 정도로 시원하게.”
그냥 이런 이유다. 다른 인물이 이리 말했다면 그 안에서 숨은 뜻을 찾아야 하지만 이 인간이 이리 말했다면 그대로 듣는 게 정답이다.
김대형 전무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이게 만일 다른 사람과의 거래였다면 볼 것도 없이 거절해야 했다. 막강한 힘을 붙여줄 테니 네가 짱 먹으라는 얘기는 네가 짱 먹으면 내가 뒤에서 널 조종하겠다고 돌려 말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건 다른 사람이 아닌 시현과 하는 거래였다. 그리고 절대 일반적이 아니다.
“그거 좋군요. 이참에 협회장이라는 것도 해 보고, 나쁘지 않겠군요.”
뒤처리만 해 줘서 협회장에 앉고 비리를 뿌리째로 뽑아버릴 수 있다. 이런 꿀 같은 제안을 놓치면 한국 헌터 협회 간부 자리를 내놔야 했다.
김대형 전무는 시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시현은 그 손을 꽉 잡았다.
“참고로 이 뒤처리 이번 일에만 국한 된 게 아닙니다. 아시죠?”
“1년. 딱 1년만 기다리십시오. 어딜 가서 설쳐도 참을 필요 없게 만들어 드리죠.”
“설친다니 말이 심하시네. 설칠 건 맞지만!”
시현의 입가에 야수처럼 거친 웃음이 걸렸다. 그 웃음을 받아들이는 김대형 전무는 얼음처럼 차가운 웃음을 지었고 지켜보던 신민준 상무는 뱀처럼 소름 끼치게 웃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소피아는 생각했다.
‘……우리 아가는 절대 이 사람들 만나지 않게 해야지.’
세기의 마법사고 뭐고 소피아는 손자가 세상에서 제일인 할머니였다. 그런 할머니 입장에서 끔찍이 아끼는 손자를 이런 곳에 데려올 수 없었다.
소피아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곳이 헌터 사회의 그라운드 제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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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실제로 저런 인물 셋이 모여서 웃고 있는 곳을 봤다면 저는 당당하게 걸어갈 겁니다. 문 워크로 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