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4 / 0282 ----------------------------------------------
이기주의자와 똑똑한 호구.
옛날옛날이라고 할 정도로 아주 먼 옛날은 아니지만 옛날에, 구체적으로 한 1~2년 전 옛날에 한 헌터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헌터는 공격을 막는 실력도, 상황을 파악하는 눈도 뛰어난 아주 대단한 헌터였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 헌터를 싫어했어요. 왜냐 하면 그 헌터는 지극히도 이기주의자였거든요. 실력이 뛰어난 만큼 자기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남을 안중에도 넣지 않았거든요.
그 헌터가 남을 깔보거나 험하게 부리는 행동 같은 걸 한 적은 없었어요. 하지만 남을 아예 시야에도 두지 않는 행동은 깔보거나 험하게 부리는 것보다 더더욱 기분이 나빴답니다. 그도 그럴 게, 아예 남이 있다는 인식을 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잖아요? 이런 행위는 말 그대로 무시와 다를 게 없었어요.
하지만 그 헌터에게 있어서는 그게 당연한 일이었어요. 어차피 세상은 자기 혼자 살아가는 건데 남을 뭐 하러 신경 쓰느냐. 나 혼자 잘 해먹으면 되는 거 아니냐. 그 헌터는 그렇게 생각했었거든요.
그렇게 생각했을 그 헌터도 어느 새인가 믿을 수 있는 동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라는 말로 설명하자니 어이가 없었지만 정말로 어쩌다 보니 만들어진 첫 동료였습니다. 언제나 자신만 생각하던 헌터는 처음으로 동료를 시야에 넣게 됐지요.
그러던 어느 날 헌터는 동료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자기 동생이 난치병에 걸려 급히 수술해야 하는데 돈이 필요하다, 그러니 제발 돈을 빌려 달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중에 꼭 갚겠다. 이런 말을 말입니다.
동료의 말을 들은 헌터는 매우 화가 났습니다. 겨우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더니 그 사람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려 한다 생각했거든요. 마음을 터놓기 시작한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헌터는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헌터는 동료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믿었는데 너는 나를 이렇게 배신하려 하느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가져와서는 나를 우롱하려 하느냐.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라.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헌터는 자신과 함께 있던 동료에게 정말로 동생이 있었다는 것, 그 동생이 진짜로 난치병에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동료의 동생이 의식불명이 된 후로 말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 뒤에야 그 헌터는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았습니다. 헌터는 자신을 의지하던 동료를 뿌리친 것입니다. 겨우 마음을 터놓을 수 있던 동료를, 자신을 믿고 부탁한 동료를 믿어주지 못한 것입니다.
그걸 깨달은 그 헌터는 동료의 앞에서 사라지고 과거의 자신을 버렸습니다. 아무도 믿지 못 하던 자신을 버린 그는 누가 봐도 거짓말인 일을 믿는 바보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호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헌터가 호구가 되었다는 건 헌터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봐도 뻔한 거짓말인 건 알지만 과거와 같은 일이 없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헌터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만에 하나, 그 만에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요.
이것은 그 헌터가 스스로 선택한 속죄였습니다. 아무 것도 믿지 못했던 자신에게 주는 벌이자 지금부터라도 남을 믿고 싶다고 생각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헌터는 여태까지 계속 속아왔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로 부탁하는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주고, 있는 돈 없는 돈 쪼개서 자신이 배반한 동료에게 돈을 보냈습니다. 이제 와서는 너무 늦었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담아서요.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009년 3월 24일 화요일.
“크악! 아이고! 우리 안경 미남 동생, 형이 좀 많이 아프다!!”
하지만 이런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이 저 멀리서 촐랑촐랑 뛰어다니며 도망치는 푼수와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슬퍼졌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옛날이야기 풍으로 기껏 잡아놓은 슬픈 여운이 와장창 깨져 나갔다.
“경진아! 잘한다! 그냥 확 보내삐라!”
“크악! 야! 강시현, 너 이 망할, 으악! 꺄악! 엄마야!”
시현은 여운 깨진 분노를 담아 힘껏 소리쳤다. 저 멀리서 준이 자신에게 욕하는 게 들리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준은 아직 약하고 경진이는 훌륭한 자신의 편이니까.
“…이번엔 너무 성급했어.”
격렬해진 마법 공격 피해 발에 땀나게 뛰는 준을 보던 시현은 고개를 돌려 민영을 봤다. 시현의 옆에 서 있던 그녀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 듯 고운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우리에게 상의 없는 건 그럴 수 있다 쳐. 우리 길드의 마스터는 시현이 너고 우리는 널 따르니까 조금 섭섭해도 거기에 큰 문제는 없어.”
“그러면 뭐가 문제인데?”
“몰라서 물어? 저 사람을 우리 길드원으로 받아들이는 건 괜찮지만 왜 네 진짜 신분을 얘기한 건데? 그것도 모자라 네 초능력까지 밝히고 클랜원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했잖아. 아무리 내가 시현이 널 믿지만 이번 건 아니라고 생각해.”
날카로운 말과 날카로운 눈빛이 시현을 이중으로 찔렀다. 시현은 찔리는 마음 그대로 슬쩍 고개를 돌려 준이 있는 쪽을 봤다.
민영의 말대로 시현은 준을 이카로스의 길드원으로, 그리고 리스타트 플레이어를 이용해 클랜원으로 받아들였다. 그것도 준을 만난 지 한 달도 안 돼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엔 너무 성급했어. 사람이 나빠 보이지는 않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
민영이나 다른 클랜원들은 준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시현이 어떻게 준을 클랜원으로 데리고 왔는지 몰랐다. 그저 시현이 뜬금없이 앞으로 같이 할 클랜원이라 하니 그런 거겠지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거다 하고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납득하는 건 별개였다. 민영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민영 본인이 말한 걸 시현이 모를 리가 없는 걸 알기에 더더욱 그랬다.
당연히 시현도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자기 밑천이 리스타트 플레이어인 걸 아는데 그걸 아무에게나 털어놓을 수는 없다.
◎김준 (우정) : ■□□□□
그렇지만 이런 안배를 해 놓는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안배 말이다.
■마성 (A랭크 / 패시브 / 50CP : 남녀노소 불문하고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의 진화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상 이건 매력이 아니라 마력, 마성 그 자체이다)
이게 바로 그 안배다. 마성 어빌리티를 이용해 준의 호감도를 단번에 끌어올린 지금 준은 시현의 비밀을 그 누구에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우정을 느낀 친구를 위해서.
준에게 음료수를 사라고 한 날도 마성 어빌리티의 힘을 빌어 준의 비밀을 캐냈다. 준의 입장에서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둘도 없는 친구처럼 느껴졌을 터이다. 실제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던 비밀도 술술 털어놨고.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준이 외면했다던 그 동료 헌터를 조사해 동생이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알아내고 스토어에서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을 구입해 그 동료 헌터 모르게 동생에게 먹였다. 난치병이 기적적으로 나았다는 말을 들은 동료 헌터가 하늘에 감사하다고 빌며 울던 건 제법 감동적이었다.
“전후사정 모르는 나지만 네가 저 사람을 우리 클랜에 넣으려고 움직였다는 것 정도는 알아. 널 몇 년 옆에서 봐 온 게 아니니까.”
“참고로 나도 몇 년이나 널 옆에서 봐 왔지. 특히 둘이 잠자리 갖고 새근새근 자는 거 훔쳐보는 거. 그거 몇 시간을 봐도 안 질리더라고.”
“…쓸데없는 소리.”
얼굴이 살짝 빨개진 민영은 심술궂은 시현에게 투정 부리듯 시현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큰 효과가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안 하지만.
“어쨌든. 왜 그런 거야? 사정을 말할 수 없다면 그거만이라도 말해 줘.”
옆구리를 꼬집힌 시현은 가볍게 옆구리를 쓸어 따끔함을 달랬다.
“저 놈 저래 보여도 디펜더로서 역할은 뛰어나. 지금 등급에 맞지 않게 실력도 뛰어나고, 내가 갈고 닦아주면 더욱 튼튼한 방패가 될 거야. 내가 너한테 했던 것처럼.”
“그렇게 해서 뭐 하게?”
“앞날을 봐야지. 조만간 길드를 키울 거야.”
앞으로 헌터 사회는 더더욱 발전할 것이다. 미래에는 헌터가 선망 받는 직업이 되고 시현은 그 헌터를 업으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도 알고 있다. 알기 위해서는 몇 가지 문제가 있는 건 차치하더라도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건 굉장한 힘이었다. 이걸 그대로 썩히는 건 아주 단호한 상황이 있거나 바보이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시현은 그 두 상황에 포함이 되지 않았다. 미래를 엿봐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생각도 없고 미래를 안다는 것의 가치를 모르는 바보도 아니다. 미래를 알 수 있는데 움직이지 않는 머저리는 더더욱 아니다.
앞으로 던전은 더더욱 많아질 것이다. 지금보다 더 강한 던전도 나올 것이다. 최하급 마정석 다음에 하급 마정석이 나온 게 그 증거다. 마정석에는 하급 마정석 이상의 등급이 있고 말인 즉 새로운 던전이 있다는 뜻이다.
“난 계속해서 헌터를 할 거야.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길드를 키우고 확실하게 힘을 키우려고 해. 준은 그때 내게 필요한 인재야.”
시현의 말을 들은 민영은 시현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려 준을 봤다. 저 멀리서 경진의 미사일을 방패로 튕겨내고 허겁지겁 도망치는 인물을 시현이 필요로 한다고 한다.
전후사정은 모르지만 시현의 말은 일리가 있다. 시현이 키운다면 아주 재능 없는 사람도 범접하지 못 할 힘을 가질 수 있다. 그 은혜를 제일 먼저 입었던 민영이기에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민영이기에 시현을 잘 알았다. 그걸 떠나서 둘밖에 없는 시현의 애인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시현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진짜 의미는?”
“난 바뀌려고 노력하는 사람 싫어하지 않아. 오히려 좋아 죽겠거든.”
“그럼 그렇지….”
대답은 즉각 나왔다. 민영은 절로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폭 내쉬며 애인을 쳐다봤다. 옆자리에 서 있는 애인은 저 멀리서 빨빨 뛰어대는 준을 보며 킥킥 웃고 있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바뀌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특히 시현처럼 후회를 겪은 뒤 그 후회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준을 처음 만난 날부터 준의 사정을 듣기까지 왜 그렇게 신경이 쓰였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 “그 동료 헌터 동생, 내가 고쳐주마. 대신 무보수 빡세게 노동 뛰라면 어떡할래?”
- “뭐든지 하겠어. 원하면 네 노예라도 될 테니까 부탁해!”
시현은 언젠가 준과 했던 대화를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놈도 징한 놈이다. 조건도 다 안 나왔는데 바로 무릎 꿇고 머리까지 숙일 줄이야. 시현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길어졌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시현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변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사람을 좋아했다.
“경진아! 잘한다! 확 구워버려라!!”
“크아아아악! 내 어쩌다 저런 놈을 길마로 삼아서, 아이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저 인간하고 노는 거 굉장히 재미있다. 민영이나 아영, 경진과는 다른 맛이 풀풀 넘쳤다. 이건 이제 부정할 수 없다.
시현은 낄낄 웃으면서 열심히 도망치는 준을 봤다.
그 옆에 서 있던 민영은 별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다 이런 남자를 따르게 되었는지 속으로 투덜대는 건 덤이었다.
============================ 작품 후기 ============================
가끔 가다 마성 어빌리티를 꺼내면 많이 드는 생각 중 하나가 이거 까딱 잘못 쓰면 장르에 세뇌물 추가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러다 장르가 위험해져버려...!
사실 이번 챕터는 준비하면서 이야기를 좀 잘 풀어 나가려고 했었습니다...만. 모 처에서 연재 제의가 들어오고 집에서 안 좋은 일이 또 터져 나가고, 그런 와중에 소피아 전투 후로 슬럼프도 몰려오고, 그런 총체적 난국이 터져 고생했습니다. 연재 제의 때문에 이런저런 거 알아보다 거절하고, 돈 문제 푼다고 왔다갔다 하고. 개인적으로 진짜 단기 휴재까지 고민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럴 수도 없기에 어떻게든 쓰긴 썼는데 그 꼴이 영 상태가 안 좋았네요. 작가라는 직업 걸고 이런 부족한 글을 보여서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김준이란 캐릭터에게도 참 미안합니다. 다음에는 제대로 된 내용으로 잘 풀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