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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내리는 밤의 이야기.
“미안하군. 아무래도 조국의 보물을 타인에게 함부로 보여줄 수 없어서 말이지.”
시현보다 어려보이는 소년이 까마득히 낮은 사람을 달래는 듯이 말을 꺼냈다. 졸지에 어린이에게 달래진 기분이 든 시현은 굉장히 찝찝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시현이 그런 기분이 들 때 소년은 고개를 돌려 에단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아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친애하는 벗이여. 자네는 경각심이라는 걸 조금 더 가질 필요가 있어. 호인인 것도 정도가 있지, 그런 부탁을 들어주려 하다니. 아직 왕으로서의 자각이 부족해.”
소년은 에단을 보며 정말 안타깝다는 듯 진심으로 책했다. 아직 어리기 그지없는 소년이 자기보다 머리 하나 넘게 큰 어른을 타이르다니. 가만히 보면 어이를 상실할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만 책망 받은 에단은 전혀 이상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진심으로 소년에게 해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해도 내가 진짜 왕은 아니잖아. 그저 S등급 헌터일 뿐이야. 그리고 나는 그에게 은혜를 입었어. 은인이 부탁하는 걸 마냥 외면할 수는 없어.”
“친우여. 자네는 앞으로 영국 헌터들을 이끌어 갈 헌터들의 왕일세. 겸손한 건 좋지만 그게 도를 넘으면 자기비하라는 걸 아직도 모르겠나? 은인에 대한 은혜를 갚는 마음도 좋지만, 자네의 등에 짊어진 것에 대한 무게를 실감하게나.”
고등학교 1학년이면 딱 어울릴 법한 소년이 자기보다 훌쩍 큰 이에게 진심을 담아 충고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이상한 모습이 너무 잘 어울려 시현은 더더욱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170cm에서 조금 부족한 키에 조금 마른 것 같은 체구는 이제 막 중학교에서 졸업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비율 좋은 몸은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키가 작게 보이지 않았고 마른 것 같아도 단련 된 모습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었다.
은실 하나하나 심어놓은 것 같은 자연스러운 은발을 정갈하게 기른 소년은 특이하게 앞머리를 길게 늘여 왼쪽 눈을 완벽히 가리고 있었다. 유일하게 드러난 푸른색 눈동자는 시릴 정도로 맑았고 그 눈과 어울리는 새하얀 피부 등이 소년을 도도하고 몽환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특히 이 소년이 멀린이란 이름을 쓰는 자이고 세계에서 둘밖에 없던 고클래스 마법사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 점을 알고 있는 시현이었기에 시현은 속으로 외모로 차별하지 말자고 중얼거렸다. 그건 이미 세뇌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음. 시현이라고 했나? 내 혹시 싶어 말하지만 자네에게 유감이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상황이라는 건 때때로 무시 할 수 없는 노릇이라서 말이지. 자네도 한 나라 지배자의 격을 갖추고 있으니 이해해 줄 거라 믿네.”
“말씀하시는 바는 알겠지만, 어, 음. 저는 그렇게 높은 사람이 아닌데요?”
“허어. 이 친구. 자네도 내 벗과 같은 소리를 하는가? 젊은이가 겸손한 건 좋지만 자기 위치에 대해 자각이 없는 건 곤란한 법이야. 오히려 내 벗보다 자네가 더 심각하단 말일세.”
멀린은 정말 딱하다는 눈으로 시현을 타일렀다. 라이벌이라고 경계한 것 치고 진심 어린 충고라는 걸 안 시현은 멀린이 정말로 자신에게 유감이 없음을 느꼈다.
“자네의 주변에 모인 이들이 어떤 인물일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나. 태어난 나라만 달랐다면 그 나라에서 정상을 차지했을 이들이 자네 주변에 모여 있단 말일세. 그 구심점인 자네가 자각이 없다는 건 큰일이야.”
“어, 음. 그게 그렇게 큰일입니까?”
“큰일이고말고. 내 단적인 예를 들어봄세. 자네가 루드비아 인더스트리에게 장비 제공하지 말라고 언질 주는 것만으로도 그 나라의 헌터 사회가 뒤흔들리지. 자네의 입지는 그 정도일세. 그러니 이만 자신에 대한 과소평가를 그만 두게나. 자네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까마득히 대단한 사람이야.”
민영과 경진이 속 시원한 얼굴로 시현을 보고 있는 걸 보면 멀린의 충고가 옳았음을 짐작했다. 이제는 확실하게 자신에 대한 자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시현이었다.
시현이 멀린과 대화하고 있는 이곳은 시현과 에단이 둘이서 만났던 라운지였다. 멀린을 만나고자 나갔던 라운지로 돌아온 게 채 10분도 되지 않으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 이 라운지에 있는 건 시현 일행과 에단, 멀린뿐이었다. 시현 일행이라 해도 레이첼과 밀리는 파티장을 이용하기 위해 주요 정계 인사와 만나고 있으니 이 자리에 있는 시현 일행은 경진, 민영, 그리고 소피아였다.
멀린의 눈은 시현에게서 떨어져 그 소피아에게 향했다.
“그와 별개로 인생은 참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시간이 까마득하게 지났다곤 하나 내가 마녀의 지인에게 조언을 하는 날이 오리라곤.”
“그러게요. 저도 당신과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게 신기한 기분이에요.”
소피아는 멀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봤다. 그 모습은 시현이 에단과 함께 멀린을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시현은 아까 전부터 느끼던 사소한 의문을 던졌다.
“혹시 두 분 아는 사이세요?”
시현이 가지고 있던 의문은 시현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느끼던 의문이었다. 모두가 궁금해 하던 질문이 나왔으니 자연스레 시선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선을 받는 당사자들은 서로를 물끄러미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것까지는 둘 다 똑같았지만 그 뒤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그건….”
“옛날에 조금 알고 지내던 사이일세.”
조금 망설이는 듯이 말끝을 흐리던 건 소피아였고 시원스레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건 멀린이었다. 두 사람의 반응은 누가 봐도 알 정도로 확연히 달랐다. 거기에 반응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멀린, 당신….”
소피아는 잔뜩 놀란 눈으로 멀린을 쳐다봤다. 언제나 차분하고 부드러웠던 소피아였기에 그녀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는 건 누가 봐도 알 정도로 확연했다.
소피아의 시선을 받은 멀린은 뒷짐을 진 채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이제 막 청소년이 되는 듯한 외모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세월의 연륜이 묻어 있는 표정이었다. 시현은 그제야 눈앞에 보이는 소년이 오랜 세월을 살아 온 마법사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마녀.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 나 또한 널 보면 그때 일이 생각날 수밖에 없지.”
멀린의 말을 들은 소피아는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녀의 표정은 시현이 봐 온 이래 손꼽을 정도로 어두운 표정이었다.
“나는 그때 내가 했던 일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네게 사과할 생각 따위 추호도 없어.”
“그건…!”
“하지만. 그때 네가 한 일 또한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물며 내게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걸 할 필요도 없어.”
뭐라 반박하려던 소피아의 말이 뚝 끊겼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기 말이 잘린 것에 뭐라 하지 않았다. 그저 놀란 눈으로 멀린을 쳐다볼 뿐이었다.
“…당신. 많이 변했군요. 옛날 당신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어요.”
“구태여 말할 필요 없다. 네게 말하는 나도 놀라울 따름이니까.”
멀린은 슬쩍 소피아를 보고 뒷짐을 졌다. 그리고 슬쩍 웃음을 자아내며 고개를 돌렸다.
멀린이 바라본 사람은 경진이었다. 멀린과 눈이 마주치자 경진은 살짝 침을 삼켰다.
“경진이라고 했느냐. 마녀가 후계자를 만들었다는 건 네게 거는 기대가 아주 크다는 것이니라. 그리고 네 할미가 너를 끔찍이도 사랑한다는 것이기도 하지. 네 할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정진하거라.”
멀린의 말을 들은 경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멀린 또한 대답을 원한 게 아니었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늙은이의 설교로 이야기가 샜구먼. 어쨌건 자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다네. 그러니 아서가 진 은혜는 다음에 다른 방법으로 갚도록 함세. 내 친우의 은인은 내게 있어서도 은인이니.”
멀린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런 멀린을 잡는 사람은 없었다.
라운지를 나서는 멀린의 등은 어딘가 미련을 떨쳐낸 것처럼 후련해 보였다. 멀린에 대해 전혀 모르는 시현이었지만 그렇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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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파티는 더더욱 여물었다. 이제 10시가 조금 넘는데도 불구하고 파티장은 아직도 소란스러웠다. 파티장에서 빠져나온 시현은 혀를 내둘렀다.
“휴우. 기운들도 좋아.”
파티장을 빠져나온 시현이 도착한 곳은 호텔 옥상에 있는 라운지였다. 일반객은 호텔을 사용할 수 없고 호텔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전부 파티장에 있으니 옥상 라운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라운지에 혼자 있다는 건 그곳을 독점 한 거 같은 묘한 기분을 주곤 한다. 시현은 그 기분을 만끽하며 라운지 벤치에 앉고 가볍게 웃었다.
12월이 다가오는 11월 바람은 제법 차가웠다. 하지만 춥다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서늘한 정도라 경우에 따라서는 시원하게 느껴졌다. 크게 추위를 타는 편이 아닌 시현에겐 밤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민영은 명월문주로서 파티장을 이용하기 위해 밑에 있었고 경진은 어딘가 가겠다고 하고 자리를 비웠다. 레이첼과 밀리도 밑에 있으니 이 자리에 있는 건 시현 혼자였다.
“여기 있었나요? 밤바람이 차지 않아요?”
그 적적하고도 묘한 기분을 깬 건 소피아였다. 시현은 슬쩍 웃으며 소피아를 반겼다.
“그냥저냥 시원해요. 소피아는 춥지 않아요?”
“제가 누구인지 잊었나요? 추위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랍니다.”
“그러고 보니 그랬지, 참.”
이건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은 꼴도 아니고. 시현은 자신이 무슨 걱정을 했는지 웃겨서 슬쩍 웃었다.
그 웃음에 화답하듯 소피아도 빙긋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그럼요. 저야 환영이죠.”
시현의 환대를 받은 소피아는 시현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아무도 없는 라운지에 단 둘이서 나란히 앉은 기분은 조금 신선했다.
시현은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슬쩍 옆에 앉은 소피아를 훔쳐봤다. 한 올 한 올이 실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백금발이 어울리는 미녀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녀는 어딘가 석연찮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석연찮달까, 그보다는 뭔가 수심 어린 표정이라고 해야 어울릴 법한 표정이었다.
“신경 쓰이나요?”
문득 소피아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름대로 신경 써서 모래 훔쳐본다 했는데 제대로 들켜 버렸다.
“조금은요.”
“그렇군요….”
소피아는 시현의 대답에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조금 불편한 분위기가 시현과 소피아 사이에 흘렀다.
꾸욱 닫혔던 소피아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그 입 안에서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한숨이 살짝 흘러 나왔고 소피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별이 참 예쁘네요.”
시현은 지나가듯 중얼거리는 소피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소피아의 말처럼 하늘을 잔뜩 수놓은 별이 보였다.
도시의 불빛 때문에 밤하늘의 별을 보기 힘들어졌다고는 하나 시현이나 소피아나 보통 사람의 시력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눈에는 하늘에 수놓인 많은 별이 또렷하게 보였다.
“시현은 우리 경진이… 우리 아가를 구해 준 은인이에요. 그 점에 대해서 언제나 감사하고 있어요. 그리고 마녀로서의 저를 이기고 제가 동등한 위치로 인정한 사람이에요.”
밤하늘을 바라보는 시현의 귀에 소피아의 목소리가 와 닿았다. 시현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런 시현에게라면 말할 수 있어요. 제 얘기, 들어줄 수 있나요?”
“저라도 괜찮다면요.”
“고마워요. 그리고 이 이야기는….”
“알아요. 경진이에게,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정말 고마워요. 시현.”
시현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옆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지금부터 들려오는 말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마녀의 이야기였다.
============================ 작품 후기 ============================
요즘들어 연재 주기가 들쑥날쑥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조금 있으면 동생이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게 돼서 그걸 뒷바라지 하느라 연재가 힘들었습니다. 옆나라 일본도 가 본 적 없는 녀석이 혼자서 저 먼 타국으로 1년 넘게 유학을 가게 되니 걱정만 잔뜩 앞서고 있습니다.
핑계가 되어 버렸지만 준비를 도와주고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보니 글도 제대로 안 나갔습니다. 연재가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연재가 늦은만큼 미뤄뒀던 비장의 카드를 뽑았습니다. 이 챕터가 끝날때쯤, 경진이는 시현을 어떻게 부르게 될까요...!
덧. 제목은 세가의 게임 NiGHTS : 별이 내리는 밤의 이야기에서 따 왔습니다. 테마곡인 Dreams Dreams는 노래가 정말 좋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한 번 들어보시는 걸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