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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카의 투기장.
“으악!!!”
전조 없이 떨어진 번개가 시현의 눈을 한 순간 멀게 했다. 그뿐 아니라 투기장 전체에 강력한 충격이 떨어졌다.
시현은 재빨리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 그건 비단 시현만이 아니라 시현의 일행, 이 경기를 지켜보던 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한 번개는 시간이 조금 지나자 말끔히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류한 충격이 투기장에 여진을 남겼다.
그 남은 충격에 눈을 몇 번 깜빡거린 시현은 귀를 울리는 이명에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내렸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연실색했다.
“이, 이게 뭐야….”
시현의 입에서 얼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현 본인이 들어도 참 멍청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면 누구라도 이럴 수밖에 없었다.
제일 먼저 보인 건 아직도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였다.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듯 연기는 다발적으로 피어올랐다.
그 연기가 피어오르는 땅은 아직도 스파크가 파직거리고 있었고, 그 위에 있어야 할 것들은 재도 안 남고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 광경이 링의 절반을 뒤엎고 있었다.
링의 절반. 듣기에는 참으로 별 거 없어 보인다. 하지만 원형으로 이루어진 링이 야구장 크기인 걸 감안하면 별 거 없어 보일 수가 없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그야말로 아포칼립스였다.
“어머…. 미안해요, 시현. 마정석까지 같이 없애버리고 말았네요.”
그 아포칼립스를 눈앞에 둔 일행의 뒤에서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현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시현의 일행도 시현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 턱을 손가락으로 짚은 소피아가 있었다.
“오랜만에 써 본다고 저도 모르게 힘이 좀 들어간 거 같아요. 그래도 힘을 뺀다고 뺀 건데, 다음에는 좀 더 주의해 보도록 할게요.”
그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시현의 귀를 간질거리자 시현은 어디서부터 딴지를 걸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말도 없이 마법을 쓴 것부터 걸어야 하는지, 아니면 힘을 빼고도 이 정도라는 사실부터 걸어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이런 초월적 상황을 벌여놓고 태연자약한 것부터 걸어야 하는지 시현은 고민했다.
하지만 어디부터 걸든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 사실을 짚어준 건 다름 아닌 준이었다.
“…야. 대장아. 넌 절대로 연애 싸움 하지 마라.”
“그, 그래야겠다.”
싸워도 귀엽게 ‘시현은 나쁜 사람이군요!’ 할 거 같은 소피아지만 이런 걸 보고 나니 감히 덤빌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클라스라는 것인가 싶은 시현이었다.
그런 시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피아는 빙긋 웃으며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자. 다음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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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경기. 종목은 팀전. 상대는 척 봐도 무서워 보이는 트윈 헤드 오우거 세 마리.
콰콰쾅!
사정없이 꽂히는 대포알 크기 급 아이스 애로우 수백 발에 난자 되어 퇴장.
제 3경기. 종목은 단체전. 적은 갑주와 무기를 갖추고 마법사까지 준비 된 일국의 군대.
툭, 콰앙!!
가볍게 뻗은 지팡이에서 뿜어진 불덩이에 통째로 휩쓸려서 전멸.
제 4경기. 종목은 개인전. 이번에는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매서운 검사였다. 심지어 움직임도 빨라 쉽게 잡히지 않기까지 했다.
툭, 쿠구궁…!
그러나 그런 검사도 링 전체를 찍어 누르는 중력은 피할 수 없었다.
“이, 이건 대체 무엇인가! 도전자 측의 마법사! 강하다! 강해도 너무 강하다! 그야말로 압도적!!”
사회를 맡은 사회자 고블린이 고함을 질렀다. 거기에 호응해 수많은 관중들이 환호하며 광희(狂喜)했다. 경기다운 경기가 성립되지 않고 있었지만 관중들은 그걸 무시하고도 남을 압도적인 무력에 홀려 있었다.
링 밖에서 그 풍경을 지켜보고 있던 시현은 어이가 없어져 중얼거렸다.
“이건 뭐 죽창도 아니고 나오면 한 방이야….”
“죽창보다는 이거 그거 같은데. 한 방이면 너도 나도 끝장인 만화 있잖아.”
어이가 없는 건 준도 마찬가지인지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리는 게 보였다. 준만이 아니라 단 한 명, 멀린을 제외한 일행 전부가 소피아의 위엄에 말을 잃었다.
“…이건 대단하군. 위치 퀸이 멀린과 대등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솔직히 최고의 마법사는 멀린이라고 생각했었다. 과장이 심할 거라고 생각했었지.”
시현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에단을 쳐다봤다. 그도 놀란 눈으로 링을 올려다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굉장해. 음. 굉장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벗이여, 저 마녀가 괜히 마녀의 여왕이라 불리는 게 아닐세. 나도 모르는 고대의 마법을 알고 있으니 비술로만 따진다면 내가 한 수 접어야 하지.”
“그 정도인가…. 굉장하군.”
에단과 멀린의 대화가 들리자 저절로 시현의 몸이 몸서리를 쳤다. 소피아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제 3자의 눈으로 보니 그 굉장함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도 절절히 느껴졌다. 시현은 슬쩍 침을 삼키며 소피아와 싸웠던 일을 떠올렸다.
‘아니. 아무리 소피아가 봐 줬고 내가 온갖 삽질을 했다지만, 나는 대체 어떻게 저 사람을 이긴 거지?’
자기가 저지른 일이라지만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인 건지 시현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소피아는 시현을 돌아보며 살짝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자기가 활약하는 걸 지켜봐 주는 게 기뻐 보이는 모습처럼 보였다. 시현은 그 모습에 슬쩍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줬다.
“하지만 도전자! 애석하게도 이번 경기에서 퇴장해 주셔야겠다! 왜냐, 이번 제 5 경기 또한 개인전이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그 모습은 제 5 경기에서 보여줄 수 없게 됐다. 한 명이 연달아 개인전에 출전 할 수 없다는 룰 때문이었다.
그 선언을 들은 소피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링에서 내려왔다. 링을 내려오는 모습에서는 아쉬움이 살짝 묻어났다.
“미안해요. 시현이 빨리 궁금증을 해결했으면 싶어서 빨리 끝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힘든가 봐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여기까지만 해도 소피아는 잘해준 거잖아요. 고마우면 고마웠지, 소파이가 미안해 할 이유 없어요.”
“후후. 그래요? 그러면 저, 칭찬 받을 일을 한 거군요?”
링에서 내려온 소피아는 시현의 말을 듣고 조금 기쁜 듯 웃었다. 그리고는 챙이 긴 마녀 모자를 벗으며 시현에게 다가왔다.
“그러면 좀 더 칭찬해 줄래요?”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소피아가 시현을 향해 까치발을 들었다. 그런 그녀의 입술이 살짝 앞으로 내밀어져 다소곳이 모아졌다. 누가 봐도 키스해 달라고 살짝 조르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시현은 살짝 침을 삼키고 소피아의 입술에 입을 살짝 맞댔다 뗐다.
쪽,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입술과 입술이 가벼운 버드 키스를 했다. 소피아는 입에 닿은 감촉에 행복함을 느끼며 웃었다.
“후훗. 앞으로도 열심히 해서 칭찬 받아야겠어요. 그러면 좀 더 많이 해 줄 거죠?”
“그, 그럼요….”
배시시 웃는 소피아의 나긋한 웃음이 시현의 마음을 자극했다. 그 모습을 본 준이 “저게 어딜 봐서 할머니야!” 하고 소리쳤고 경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민영은 슬쩍 시현을 흘겨보다가 소피아가 부러운 듯 살짝 쳐다보곤 했다. 에단은 가볍게 감탄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멀린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상 참 말세로다. 그 나이를 먹고도 그러고 싶냐는 말은 안 하겠다만, 나잇값은 하라고 말하고 싶군.”
“저기, 이미 다 말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뭔가요? 불만이 많아 보이는 건 제 착각이겠죠?”
“아니. 불만이 있을 리가. 서로가 좋다면 상관이 없지. 하지만 마녀, 혹시 자릿수라는 말 아나? 너와 그 젊은이의 나이는 말 그대로 자릿수가 다를 텐데. 쯧쯧.”
“네. 잘 알겠어요. 시비 거는 거 맞군요. 한 번 해 볼 셈인가요?”
멀린과 소피아는 서로 투닥거리며 말을 나눴다. 그 모습은 사이가 나빠 보이는 모습이지만 그게 또 묘하게 사이가 좋아 보였다.
철천지원수였던 두 사람이 저런다는 건 두 사람 다 어느 정도 과거를 극복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며칠 전만 해도 멀린을 거북해 하던 소피아가 그를 똑바로 쳐다 볼 수 있는 것만 해도 그렇다.
멀린은 그 사실을 깨닫고 슬쩍 시현을 쳐다봤다. 소피아가 과거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도와 준 청년은 소피아와 멀린을 보며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래. 내게 있어 내 벗 아서가 자네에게 있어서는 저 친구였군.”
멀린은 슬쩍 시현을 보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멀린을 째려보던 소피아는 그 말을 듣고 에단과 멀린을 번갈아봤다.
“…그렇군요. 당신에게도 시현 같은 사람이 있었던 거군요.”
“아무래도 말일세. 솔직히, 혼자서 견디기엔 좀 무거운 무게가 아닌가. 아마 내 벗이 없었다면 나도 너와 마주하기 거북했겠지.”
“좋은 친구를 뒀네요.”
시현에게도 했었던 말을 들은 소피아는 빙긋 멀린을 보며 웃음 지었다. 시현이 알아듣지 못 한 그 말을 소피아는 알아들은 것이다.
소피아 자신에게 시현이 있었듯, 멀린에게는 에단이라는 이가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멀린이 저렇게 신뢰하는 걸 보면 믿을 수 있는 남자일 것이다. 자신보다 먼저 과거를 받아들인 멀린이기에 에단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더욱 이해가 갔다.
만일 자신에게 시현이 없었다면, 그리고 멀린에게 에단이 없었다면.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웃는 날은 영영 오지 않았을 것이다.
소피아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멀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멀린은 슬쩍 소피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는 너는 멋진 애인을 뒀군. 비록 까마득히 어린 꼬마 신랑이라지만…. 말하고 보니 역시 이건 뭔가 아냐. 마녀, 혹시 나잇값이라는 단어 아나?”
“역시 시비 거는 거군요. 이젠 확실히 알았어요. 당장 링 위로 올라올래요?”
소피아가 살짝 발끈하자 그 신선한 모습에 멀린이 큭큭거렸다. 자신도 마녀를 보고 이렇게 웃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 했다. 만일 에단 같은 존재, 시현이라는 청년이 없었다면 꿈에도 상상하지 못 한 이 일은 영영 찾아오지 못 했을 터다.
멀린은 그런 시현에게 이유 모를 고마움을 느꼈다. 이유 모를 고마움이라는 건 뭔가 모순 된 거 같지만, 아무렴 어떠랴.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아니. 됐다. 링에는 나 혼자 올라가지. 그래야 얼른 끝내고 저 젊은이의 호기심을 풀어줄 수 있지.”
그래서 멀린은 몸을 돌려 링으로 향했다. 원래는 적당히 맞춰주는 정도만 하려 했지만, 지금은 이유 모를 고마움에 조금만 도와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시현은 멀린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 없었다. 그보다는 먼저 드는 생각에 당황하기까지 했다.
“어, 어어? 잠깐만요! 멀린!”
시현은 링으로 사뿐히 올라가는 멀린을 말리려 했다. 소피아와 달리 아무 장비도 없는 멀린이 올라서려 하는 것이 걱정이었다.
“괜찮아요, 시현.”
하지만 시현의 행동은 소피아에 의해 말려졌다. 시현은 조금 놀란 눈으로 소피아를 봤다.
“하지만 소피아, 장비 없이 그냥 올라가기는….”
“괜찮아요.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에요.”
시현을 말린 소피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보는 건 링으로 올라서는 소년의 등이었다.
“저 사람은 굉장히 강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소피아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그걸 느낀 시현은 자연스레 소피아를 따라 멀린을 쳐다봤다.
이윽고 은발이 잘 어울리는 소년이 링 위에 올라섰다.
============================ 작품 후기 ============================
사전공지 없이 며칠 휴재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날이 추웠다 따뜻해지다 반복하던 사이 걸린 독감 때문에 며칠을 앓아 누웠습니다. 온몸이 쑤시고 정신없이 지내느라 글 쓸 엄두도 안 나더군요...
최대한 빠르게 몸을 추슬러서 정상적인 연재 페이스를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공지도 없이 쉬어버려 대단히 죄송하고 독자 여러분도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