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1 / 0282 ----------------------------------------------
알고 보면 누란지위.
부아아아앙…! 끼이이이익!!
거친 배기음을 쩌렁쩌렁하게 울린 스포츠카가 화려하게 미끄러졌다. 주차장으로 들어선 스포츠카는 빙판길 미끄러지듯 쭈욱 미끄러져 화려한 타이어 자국을 남기며 주차 칸에 주차 되었다.
“뭐, 뭐야? 깜짝 놀랐잖아.”
“영화 찍나? 굉장하잖아!”
길가를 거닐던 사람들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드리프트 주차에 박수를 쳤다. 일부는 날카로운 마찰음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화려한 스포츠카에 시선을 빼앗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포츠카에서 한 남자가 다급하게 내렸다. 그 남자는 리모컨으로 스포츠카 문을 잠그자마자 몸을 가볍게 낮췄다.
팡!
그리고 풍선 터지는 시원한 소리를 울리며 남자의 몸이 수직상승했다. 남자는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솟구쳐 십여 층 되는 아파트 난간으로 뛰어 들어갔다.
“저, 저 높이를! 헌터인가 봐!”
“헌터 굉장하네!”
“그런데 방금 어디선가 본 모습 같았는데. 착각인가?”
그 모습을 지켜본 이들은 다시금 감탄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몇몇 이들은 어디선가 본 거 같은 기분에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그걸 확실히 인지하지는 못 했다.
많은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든 주인공, 시현은 난간을 넘어 복도에 착지하자마자 경진의 집으로 달렸다.
경진의 집에 도착한 시현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건 또 뭔 개소리야?!”
“아, 시현아!”
시현은 문을 벌컥 열며 있는 힘껏 외치자 아영이 다급히 시현을 맞이했다. 왠지 모르게 아까 외쳤던 거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중요한 것도 집안에 펼쳐진 광경을 보자 싹 날아갔다.
“안 된다! 이 할미는 절대 용납 못 한다!”
“아니, 할머니. 얘기를 좀 들어달라니까.”
“들을 필요도 없구나! 할미는 우리 아가 절대 못 내보내!”
집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큰일이 났구나 싶을 정도로 심각했다. 오죽하면 시현도 보이는 광경만 없었다면 조모손자 싸움났다고 경악했을 뻔했다.
그렇다. 눈에 보이는 광경, 경진의 팔에 꼬옥 매달려 고개를 도리도리 짓는 소피아만 없었다면 말이다.
백금발이 아름다운 여성이 안경을 쓴 미남의 팔에 바짝 매달려 있었다. 그 여성은 그 남자가 없으면 못 살 것처럼 절박했다. 한 술 더 떠 그 여성은 시현의 애인이었다.
뭘 모르는 이가 보면 매우 위험해 보이는 상황. 하지만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이 보면 이 상황은 쓴웃음 절로 나올 상황이었다. 그리고 시현은 그 누구보다 이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 시현! 마침 잘 왔어요!”
시현은 자신을 구원군 보듯 반가워하는 소피아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은 시현이 자신을 도와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시현은 그대로 소피아의 허리를 안아 번쩍 들었다.
“꺅! 시, 시현?”
시현에게 번쩍 들린 소피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시현을 돌아봤다. 철떡같이 믿고 있던 구원군이 자신을 돕지 않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우리 소피아, 착하죠. 잠깐만 경진이에게서 떨어집시다.”
“잠깐만요! 왜 저를 떼어내려는 건가요! 시현도 얼른 우리 아가를 말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만일 상대가 경진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시현은 소피아의 편을 들었을 것이다. 그뿐이랴, 내 여자를 이렇게 매달게 만든 호로 새끼를 걷어찼을 것이다. 시현에게 있어 소피아는 언제나 옳은 조언자였고 현명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안경진이라는 남자가 섞여 버리면 상황은 정 반대가 됐다. 경진이 엮인 이상 소피아는 옳은 조언자도 현명한 여성도 아니었다. 그저 손자바보 할머니였다.
“자. 소피아. 일단 경진이 얘기부터 들어봅시다. 착하죠?”
전투력은 몰라도 기본 신체능력은 시현이 압도적이었다. 시현은 힘으로 소피아를 경진에게서 떼어냈다.
“아, 안 돼! 제게서 우리 아가를 빼앗지 말아요! 아아, 아가…!!”
경진에게서 떨어진 소피아는 구슬피 울며 경진에게 손을 힘껏 뻗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보였다. 상황이 상황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 풍경을 지켜보던 아영은 눈을 깜빡거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누가 보면 영영 못 보는 가족 헤어지는 그런 줄 알 거 같아.”
그 말에는 시현도 전적으로 동감이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와 줘서 고마워. 시현이가 아니었으면 계속 그런 상황이었을 거야.”
“여자 친구가 부르는데 당연히 날아서라도 와야지.”
“말은 잘 해.”
그리 말한 아영은 가느다란 손으로 옆머리를 살짝 넘기며 빙긋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아영은 여전히 단발이 잘 어울렸다.
하지만 시현은 그런 단발보다 그 밑에서 큼지막하게 부푼 가슴이 신경 쓰였다.
“못 본 사이 더 커진 거 아냐?”
시현의 눈길이 크게 부푼 아영의 가슴께에서 맴돌았다. 시현의 시선을 가슴으로 한껏 받은 아영은 그대로 시현을 흘겨봤다.
“저질. 응큼해. 그래도 궁금하면… 나중에 확인해 볼래?”
하지만 아영은 이내 배시시 웃으며 살짝 어깨를 펴 가슴을 내밀었다. 그에 따라 남자의 꿈이 꽉꽉 뭉친 가슴이 도드라졌다.
한동안 안 쓰던 비밀 아지트의 열쇠를 드디어 꺼낼 날이 왔다. 시현은 아영의 가슴을 꼼꼼하게 확인해주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시현은 마음속 다짐을 잠깐 구석으로 미뤄뒀다.
“그래서 왜 때 아닌 가출 논란이 불어 닥치는 건데?”
“가출 아니야. 그저 할머니가 호들갑 떤 거라니까.”
“그럼 그렇지.”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시현은 소피아를 떼어낸 자신의 판단에 만족하며 자신에게 매달린 소피아를 쳐다봤다.
정확히는 경진의 벽이 되었기에 자신에게 매달리는 소피아를 쳐다봤다.
“흑. 아가, 이리 오렴. 아아, 우리 아가…!”
“소피아, 일단 진정하고요. 착하죠?”
시현은 경진에게 가려고 발버둥거리는 소피아를 마주 보고 껴안아 토닥거렸다. 등 뒤에 있는 경진은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고 있었다.
시현의 앞에는 소피아가, 뒤에는 경진이 앉아 있었다. 말하자면 경진과 소피아 사이에 끼어버린 그런 상황이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영이 살짝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너는 왜 여기 있냐?”
소피아를 토닥이던 시현은 고개를 돌려 아영을 보고 물었다.
“지난 달 정산 내역을 정리해서 전해주려고. 겸사겸사 오랜만에 언니 얼굴도 좀 볼까 했었어.”
이카로스 길드의 서무 담당은 유일무이 아영뿐이었다. 예전에는 시현의 전담 비서였지만 이제는 이카로스 길드의 여러 업무를 지원해주는, 잘 보이지는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인재였다.
어떻게 보면 아영이 여기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시현이 연락 받고 여기 올 일도 없었을 뿐더러 있었더라도 상황이 더욱 복잡해진 뒤 도착했을 터였다.
“그래서 대체 이게 뭔 소동이냐. 설명 해 봐.”
시현은 소피아를 꼬옥 껴안으며 경진을 돌아봤다. 그 행동이 경진을 소피아로부터 지키기 위한 행위임을 모르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본 경진은 얕게 한숨을 쉬곤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너한테는 제일 나중에 말하고 싶었는데.”
경진은 한탄하듯 중얼거리고는 쓴웃음을 얼굴에서 지웠다. 쓴웃음을 지운 경진의 표정은 시현이 조금 놀랄 정도로 진지하고 단호한 표정이었다.
“시현아. 나 헌터 일을 쉬고 싶어. 그리고 조금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진지하고 단호한 만큼 나온 안건도 묵직했다.
그걸 들은 시현의 표정이 절로 굳었다.
“이카로스를 그만 둘 거면 헌터를 그만 둔다 했을 텐데, 그건 아니고. 말하자면 휴가를 좀 달라 뭐 그런 거야?”
“비슷해. 시현이 네가 헌터를 하는 한 나도 계속해서 헌터를 할 거야.”
경진은 그리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경진을 본 시현은 의아한 마음에 물었다.
“그런 거라면 이렇게 심각할 필요도 없잖아?”
헌터 사회가 활발해진 요즘 헌터와 달리 이카로스 길드는 개인 행동 성향이 매우 강했다. 비록 중급 던전에서 쩔쩔 메는 길드원들이었지만 이들은 하급 던전을 혼자 클리어 할 정도로 강했다. 후방 지원인 경진도 혼자서 하급 던전 공략이 가능할 정도였다.
거기에 중급 던전이 쉽게 나오는 것도 아니라 어지간해선 파티 사냥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시현도 길드원 관리를 방치에 가까울 정도로 자유로이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냥 가볍게 말하면 될 걸 뭐하러 이리 진지하게 말하나 싶은 시현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게 아니었다.
“아니. 내 생각대로라면 오래 걸릴 거 같아. 그래서 그래.”
“얼마나 오래 걸리기에 그렇게 진지해?”
“…그걸 모르겠어. 아마 빨라도 1~2년이 아닐까 싶어.”
경진이 내놓은 대답은 사태의 심각성을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가볍게 생각하던 시현도 이것이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정도였다.
그 말을 들은 시현은 잠깐 침묵한 뒤 입을 열었다.
“아영아. 민영이하고 준 불러. 우리끼리 들을 얘기가 아니다.”
시현의 말을 들은 아영은 급히 민영과 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둘 다 나름대로 일이 있었던 것 같지만 중요한 일이라 아영이 말하자 금방 오겠다는 대답을 꺼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영과 준이 경진의 집에 도착했다.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급하게 왔어. 많이 늦었어?”
“뭐냐, 뭐냐. 중요한 일 아니면 가만 안 있을 거다.”
“준! 우리 아가가 이 늙은이를 떠나 가출한다고 했답니다! 준은 꼭 말려줄 거죠?”
“씨발, 중요한 일이네! 동생아! 다시 생각해 봐!”
“형, 가출 아니라니까요!”
“아오! 좀! 다들 진정하라고!”
기껏 진정된 분위기가 말 한 마디에 뒤집어졌다. 시현은 머리를 쑤시는 편두통에 버럭 소리 질렀다. 그 편두통 덕분인지는 몰라도 상황은 제법 빠르게 진정됐다.
조금 소란스러웠지만 어쨌든 분위기는 진정됐다. 거기에 민영과 준이 모이는 것으로 이카로스 길드원 전원이 소집됐다.
그렇게 사람이 모인 속에서 다시 한 번 경진이 말을 꺼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솔직히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건 나한테 꼭 필요한 일이야. 그래서 당분간 헌터 일을 쉴까 해.”
“대체 무슨 일을 하려고 이렇게까지 진지한데?”
질문을 받은 경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멀린을 찾아갈 거야. 그리고 그에게 가르침을 요청할 거야.”
경진이 꺼낸 말은 생각보다 더욱 심각한 말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이었다.
“아, 아가? 그게 무슨 말이니?”
“…미안해. 할머니.”
잔뜩 떨리는 소피아의 목소리에 경진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와 손자로서만이 아닌, 마법사로서도 소피아의 후계자인 경진이 소피아가 아닌 다른 스승을 찾으려 한다. 그 말이 내포하는 바는 몇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소피아가 허망한 표정을 짓고 경진이 고개를 못 드는 건 당연했다.
그 말을 들은 일행도 경진이 꺼내놓은 안건의 무게감에 할 말을 잃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무게감에 압도 되어 버린 것이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침착한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계속 얘기해 봐. 얘기를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그 유일한 한 명은 팔짱을 끼며 경진을 직시했다. 바로 시현이었다.
시현의 재촉을 들은 경진은 잠시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가 마음을 굳혔다. 마음 굳힌 그는 고개를 들어 일행과, 자신의 소중한 가족을 한 번 훑어봐 더욱 마음을 다졌다.
“……알았어. 전부 얘기할게.”
그렇게 해서 경진의 얘기가 시작됐다.
============================ 작품 후기 ============================
금이야 옥이야 키운 손주새끼가 옛날 웬수한테 고개 숙이러 간다 합니다. 할로인 수난시대로세.
작가는 과연 무슨 생각으로 이따위 플롯을 꺼내놨을까요? 저도 궁금해집니다.
2016년 4월 23일. 문맥 수정. 어색해 보이던 맨 마지막 줄을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