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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다 지망생 강시현.
마른 침이 절로 목을 타고 넘어갔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멀린의 눈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 눈이 향한 곳에는 시현이 꺼낸 책 한 권이 있었다.
책은 그 누가 봐도 참 볼품없다 여길 정도로 허름했다. 가죽을 몇 겹 덧대 만든 커버에 색이 누렇게 바랜 종이 여러 다발, 그걸 가죽 끈으로 질끈 엮은 모습만 아니었다면 책이라고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책은 특이하게도 붉은 끈으로 여려 겹 둘러져 꽁꽁 감싸여 있었다. 그 모양은 마치 누군가가 책을 열지 말라고 꽁꽁 감싼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 책을 내려다보던 멀린은 애써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억지로 떼어내 시현에게 향했다.
“…자네, 이 책을 어디서 찾았는가?”
멀린이 바라본 시현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기업비밀이죠.”
만일 평소 같은 상황이었다면 가볍게 농담으로 받아칠 수 있을 그런 말. 하지만 지금, 멀린에게는 그런 말조차 받아칠 수 없을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그것은 비단 멀린만이 아니라 다른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이리라. 오히려 마법사라는 업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들이기에 더욱 여유가 없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낡아 빠진 책 한 권. 붉은 끈으로 둘둘 말린 걸 뺀다면 대체 골동품으로 넘겨야 하나 고민하게 만들 법한 책 한 권. 일반인의 관점으로 보이는 건 딱 그 정도였다.
하지만 멀린의 눈에는 일반인들이 보지 못 하는 것들이 훤히 보였다. 멀린도 감탄할 정도로 강력하게 봉인 처리 되었음에도 책에서 흘러넘치는 성스러운 기운, 악한 기운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시현의 눈은 멀린이 볼 수 없는 것을 잡아내 시현에게 보여줬다.
●성상악하의 명부 (유니크 / 마도서 : 지구가 있는 세계와 다른 세계, 라크움의 신과 악마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는 마도서. 그 신에 대한 신상명세와 특기 등이 적혀 있으나 수준 미달인 자는 명부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이승을 떠나게 된다.)
시현이 엘릭서, 영검, 엑스칼리버 이후로 보는 네 번째 유니크 아이템. 그것이 바로 시현이 멀린에게 제시한 비장의 카드였고 하루 꼬박 밤 새 스토어에서 발굴해 낸 마도서였다.
제아무리 멀린이 세기를 걸쳐 존재하는 대마법사라 하나 결국은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걸쳐 쌓은 지식 따위 다른 세계의 신과 악마의 정보에 비하면 그야말로 지식 따위일 뿐이다.
“이 세계와는 다른 세계의 신, 악마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는 책입니다. 그를 통해 그 세계에 밝혀지지 않은 창세기, 그리고 여러 이야기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신과 악마들이 즐겨 사용하는 기술에 대한 것도 적혀 있고요.”
시현의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멀린도 이 책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어디서 허언을 하냐고 화를 냈을 것이었다. 아무리 인자한 멀린이라 해도 말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건 가짜로서는 낼 수 없는 존재감을 흘리고 있었다.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이건 진품이겠지. 설령 자네의 말이 거짓이더라도 그와 비등한 힘이 깃든 건 틀림이 없어.”
대마법사라는 칭호는 괜히 있는 칭호가 아니다. 대마법사인 자신도 긴장하게 만드는 이 마도서는 그만한 힘이 있었고, 멀린에게도 그만한 힘이 있는 걸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었다.
자신이 여태까지 쌓은 지식쯤 이 마도서 앞에서는 한낱 지식에 불과했다. 멀린은 그 가치를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었다.
“자네. 왜 이러는 건가?”
바로 이런 궁금증이었다.
“예? 그게 무슨?”
“솔직하게 말함세. 이건 굉장한 것일세. 자네 말대로 이걸 본 이상 나는 자네에게 내 지식을 팔아야겠지. 이젠 자네가 안 판다고 해도 내가 내 지식을 사 달라고 빌어야 할 판이야. 이건 그만한 가치가 있어.”
다른 이들이라면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제 와서 자존심에 매달리자니 살아온 세월의 연륜이 너무도 컸다.
멀린은 남 이야기를 하듯 담담하게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 그였기에 당장 마도서를 얻겠다는 탐욕에 젖지 않고 차분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내 드는 궁금증일세. 왜 자네는 기껏 찾아낸 이걸 남을 위해 쓸 수 있는 겐가?”
멀린은 그런 질문을 하며 이 마도서를 꺼낸 이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건 시현의 옆에 있는 경진도 마찬가지였다.
멀린이 말한 것처럼 시현이 꺼낸 마도서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비록 멀린처럼 뛰어난 식견을 갖춘 건 아니었지만 경진 또한 훌륭한 마법사였다. 그런 경진이 마도서의 가치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아마 저 마도서에 가격을 매길 수 있다면 경진은 나라 하나 정도는 사고도 잔뜩 남을 가격을 매길 것이다. 시현이 꺼낸 마도서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시현도 이걸 구하며 많은 손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현은 그걸 흔쾌히 꺼냈다. 시현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진을 위해.
경진과 멀린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어째서 이런 걸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쓸 수 있는가. 두 사람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야 제 친구니까요.”
하지만 대답하는 시현은 멀린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표정은 뭘 당연한 걸 묻냐는, 한 점 흔들림 없는 표정이었다.
시현의 대답은 진솔하고 진지했다. 그걸 알아본 멀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게 다인가?”
“그게 단데요. 뭐 문제 있어요?”
시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을 보는 멀린을 보고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거기에 더해 경진 또한 놀란 눈으로 시현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게 전부라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놀라서 말은 안 하지만 고작 그거 하나 때문에 이런 값진 걸 내놓느냐는 시선이 시현에게 향했다.
하지만 시현에게 있어 그건 절대 고작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였다.
저 책 하나 산다고 몇 년 내내 모은 크레딧의 60%가 날아간 걸 생각하면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건 시현도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다른 세계의 신과 악마에 대해 적어놓은 것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거기에 효율을 따지라면 여러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경진이 강해지면 시현에게 이득이고 이걸 통해 소피아에게 환심을 사는 수컷적인 욕망도 조금 섞여 있었다. 저거 팔면 매우 비쌀 텐데 하는 아쉬움이 없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 외에도 많은 생각과 상념이 있었다. 하지만.
“왜 놀라는지는 대충 알겠는데 제게 경진이는 그 책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친구에요.”
언제나 자신을 최고라고 여겨주고 밑도 끝도 없이 믿어주는 친구가 처음으로 시현을 위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욕심을 부렸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을 경진은 미안하다고, 그래도 욕심 부리고 싶다고 진지하게 얘기를 했다.
“그런 친구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데 그따위 책쪼가리가 중요합니까? 나는 그런 것보다 내 친구가 중요합니다.”
가치라는 건 주관적이다. 누군가에게 있어 다이아몬드가 값진 물건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돌멩이와 다를 바 없는 물건일 수도 있다.
시현에게 있어 경진은 그런 친구였다. 마도서가 아무리 비싸다 해도 내다 버릴 수 있는, 둘도 없는 친한 친구였다.
“야. 내가 팍팍 밀어줄 테니까 열심히 해 봐. 아, 그리고 내가 이렇게까지 잘해줬다는 거 슬쩍 소피아에게 귀띔 좀 해 주고. 티 안 나게 잘 좀 부탁해.”
시현은 너스레를 떨며 경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하지만 경진은 그 너스레에 대답할 수 없었다. 어깨에 둘러진 팔이 너무도 든든해서, 장난스레 말해주는 말이 목을 메게 만들어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 대신 경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믿어주는 친구를 절대로 등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사내놈이 뭐 그리 툭하면 울어. 여자들은 모성애가 넘쳐서 마음이 찡할지 모르지만 남자가 보면 징그러울 뿐이야. 이놈아.”
“하지만 자네. 그는 마녀의 손자일세. 즉, 어떻게 보면 자네의 손자인 거 아닌가?”
“우리 아가! 왜, 왜 울어! 어떤 새끼가 울린 건데!”
멀린의 시선은 호들갑을 떨며 경진을 다독이는 시현에게 고정 되어 있었다. 그를 보는 멀린의 입에는 자신도 모르게 따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면 앞으로 많이 바쁘겠군. 내 지식이라는 건 1~2년으로 끝날 가벼운 것들이 아니니 말일세.”
멀린은 그리 말하며 자신의 홍차 잔을 들어 가볍게 차를 마셨다.
“그런 당신을 위한 시간 절약 패키지. 원하는 기억, 지식을 추려서 보내줄 수 있는 다른 세계의 마법서가 세상에 무료!”
그리고 성대하게 홍차를 뿜었다.
대마법사인 그도 1+1로 딸려온 무료 패키지에는 이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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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11일 금요일.
그리하여 1~2년 넘게 걸릴 시간이 3~4일로 단축 되어 버렸다. 그거 가지고 시간 질질 끄는 건 시현의 취향이 아닐 뿐더러, 소피아를 혼자 두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
“진행 속도 봐라. 우리 대장이는 무슨 메가패스니?”
“그게 대체 언제적 거냐. 이왕이면 사이다 지망생으로 불러 줘.”
그리 말한 시현과 준은 느긋한 모습으로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 서 있었다. 유명한 얼굴을 감추기 위해 선글라스 쓰고 사소한 변장을 한 건 덤이었다.
두 사람이 인천국제공항에 있는 이유는 경진을 맞이하기 위해서라는 지극히 간단한 이유 때문이었다.
갈 때는 텔레포트를 이용해 뿅 하고 쉽게 갔지만 텔레포트가 쉽게 사용할 마법은 아닐 뿐더러 매 번 수고스럽게 하기 싫다는 이유가 숨어 있었다. 그렇게 경진에게 거절당한 소피아가 섭섭해서 훌쩍댄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지식을 머리에 쌓는다 쳐도 그걸 소화해내는 건 별개 아냐?”
입국장에서 경진을 기다리던 준은 문득 든 궁금증에 시현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경진이니까 금방 소화해 낼 거야.”
“하긴. 내 동생이 그 정도도 못 할 리 없지.”
언제부터 경진이가 네 동생이냐. 그렇게 태클 걸려던 시현이었지만 입국장으로 들어서는 반가운 얼굴을 보자 태클에 대한 걸 잊었다.
“야. 이쪽!”
“웰컴 투 코리아, 마이 브라~더!”
입국장으로 들어선 경진은 자신을 부르는 친구와 친한 형을 보고 웃었다. 안 본 게 며칠 밖에 안 됐는데 왜 이리 반가운 건지 경진 스스로도 신기했다.
“정말 나왔네. 안 나와 줘도 되는데.”
그런 두 사람을 본 경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투덜거리듯 중얼거렸지만 입가에 웃음이 걸리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가는 발걸음이 가벼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뭐하러 나왔어. 형도 괜히 여기까지 오시고.”
“어허. 형이 동생 마중 나오는데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야.”
경진은 팔짱 끼며 콧방귀를 끼는 준을 보며 쓴웃음 지었다.
그리고 자신을 마중 나온 친구를 보며 웃었다.
“못 본 사이에 조금 듬직해진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 친구는 단 며칠 못 봤을 뿐인데 몇 년 만에 본 것처럼 반가웠다. 그리고 어제 본 것처럼 변함없이 자신을 맞이해 준다.
그 친구에게는 받은 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경진은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직은 부족하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그러면 아주 듬직해져서 네 등을 받쳐줄게.”
왜냐하면 고맙다는 말로 끝내기엔 받은 게 너무 컸기에, 그만큼을 전부 돌려준 뒤에 고맙다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경진의 말을 들은 준은 가볍게 감탄했다. 그리고 시현은 씨익 웃었다.
“말은 무지하게 잘 하게 됐네. 일단 밥부터 먹으러 가자.”
시현은 그리 말하며 등을 돌려 앞서 걸었다. 그 뒤를 준이 따랐고 경진은 잠깐 서 있다가 걸었다.
경진이 따라가는 등은 자신을 믿어주는 둘도 없는 친구의 등이었다.
============================ 작품 후기 ============================
최근 친구가 댓글창을 보더니 엄마 닉네임을 쓰는 독자 분들, 여성 독자 분들이 생각 외로 많다고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본격 모성애 자극하는 작가라는 별명을 제게 붙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응애 하고 울어볼까 합니다.
사실 이 시간에도 자야 하지만 쿠폰이 들어와서 잘 수가 없었습니다. 속물이지만 돈을 위해서라면 열심히 쓸 수 있습니다. 그냥 그렇다는 말입니다.
응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