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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쉽게 갑시다.
집을 나오기 전 지구를 지키러 간다는 말에 하연이 투덜거리고 경화가 피식 웃었다. 전후사정 모르는 사람이 보일 법한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시현도 아무 것도 몰랐다면 비슷한 반응이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시현이 한 말이 틀린 말이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시현은 정말로 지구를 지키러 가고 있었다.
시현은 아현가류를 이용해 내공을 끌어올려 경신법을 사용했다. 몸을 빠르게 하는 정도가 전부였던 3급 무공이 2급 무공과 대등할 정도로 강화 되어 시현의 몸을 날래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 번 도약할 때마다 시현의 몸이 하늘 높이 뛰어 올랐다. 깃털처럼 가벼워진 몸은 한 걸음 뛸 때마다 하늘을 날 것처럼 가벼웠다.
‘3급 무공이 이 정도인데 전력으로 달리면 무슨 일이 일어나려나.’
그랬다간 영화처럼 달리는데 주변 유리창이 터져나가지 않을까 싶다.
생각해 보니 은근히 멋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한 시현이었지만 실제로 하자니 민폐덩어리 투성이인지라 생각만으로 끝내기로 했다.
아현가류 어빌리티와 투명화 마법으로 사람들의 눈을 피하길 두어 시간 경. 시현은 사람의 눈을 피해 경기도 어느 산 속에 도착했다.
작은 산은 인적이 드문 곳에 있어 오고 가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시현이 도착한 곳은 그 산에서도 길조차 나지 않아 사람의 발길이 없는 곳이었다.
그 대신인지 그 곳에는 있어선 안 될 게 존재했다.
“후. 이런 곳에 짱박혀 있으니 누가 어떻게 아나.”
시현은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걸 보며 투덜거렸다. 그걸 보며 투덜거리자 시현의 눈앞에 알림 창이 나타났다.
◆몽환경계 던전 (중급 / 기타 / 무제한 / 1,700CP : 차원의 균열을 잡아먹고 사는 몽환계의 일부가 섞여버린 던전. 몽환계의 괴수는 차원의 균열에서 자라 차원의 경계를 천천히 무너뜨리며 차원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 괴수가 던전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다. ‘매혹’ 속성 보유)
알림 창을 읽은 시현은 자신을 이곳에 오게 만든 다른 알림 창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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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출현.』
미래 개변 등급 : 1급.
미래 개변 전 : 서기 2010년. 몽환경계 던전으로 인해 차원의 경계가 무너져 괴수가 던전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다. 이로 인해 세계가 격변하며 헌터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미래 개변 후 : (아직 개변 되지 않은 미래입니다.)
비고 사항 : 이번 미래 개변은 현상은 플레이어에게 제공 되는 분기점입니다. 개변 여부에 따라 미래의 상당수가 변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미래 개변 현상 목록에서 완전히 뒤바뀐 미래들이 삭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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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시현은 가볍게 침음성을 흘리고 알림 창들을 눈앞에서 지웠다.
이번 미래 개변 현상이 열린 건 시현이 고독의 신전을 클리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심지어 다른 미래 개변 현상들과 다르게 크레딧을 사용하지 않아도 알아서 개방됐고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까지 친절하게 알려줬다.
그걸 따라 이곳까지 왔을 때 비로소 시현은 무엇이 어떻게 된 건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시현은 기억하지 못 하지만 과거에도 던전은 있었을 것이다. 이건 이번에 나타난 미래 개변 현상에 적힌 말을 통해 입증됐다.
그 사실을 시현이 기억하지 못 하는 이유는 리스타트 플레이어의 기억 통제 때문일 것이다. 시현이 던전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다면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고 리스타트 플레이어는 이를 방지하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회귀하기 전인 미래에는 내가 아닌 리스타트 플레이어가 있었을 거야.’
그렇게 감안하고 보면 미래에 일어난 일들이 대충 아귀가 맞아 떨어졌다. 레이첼이 신소재를 발견한 것도 던전과 다른 리스타트 플레이어가 있어서라고 가정하면 가능성이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시현은 다시금 눈앞에 있는 던전 입구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회귀 전이었던 미래에는 괴수가 나와서 세상을 뒤흔들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괴수로 인해 세상은 큰 피해를 입었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세상이 멸망했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 일을 기점으로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다. 역사의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무림인이나 마법사가 나타났고 마정석과 신소재라는 새로운 자원이 나타났다.
거기에 리스타트 플레이어는 지금이 분기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시현이 알고 있는 미래와 모르는 미래가 이곳에서 결정이 난다고 언급하고 있었다.
여기서 시현이 아는 미래로 간다면 시현은 더욱 많은 걸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괴수 출현으로 인해 생기는 피해를 최소화 하고 그를 통해 얻어낼 것을 얻어낼 수 있다. 회귀를 막 시작했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 시현에게는 그럴 힘과 인맥이 넘쳤다.
하지만 피해를 최소화 한다고 노력해서 피해가 전무한 건 아니다. 괴수가 나타나면 누군가는 반드시 피해를 입게 된다. 시현은 그게 싫었다.
딱히 시현에게 희생정신이 있다거나 사람을 구하겠다는 영웅심 같은 건 없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시현이 제일 싫어하는 말은 큰 힘에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이었고 자기에게 소중한 사람만 챙기면 남이 죽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에 괴수가 나타나고 괴수에게 희생된 사람이 시현의 소중한 사람과 관계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 죽어버린다면 시현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슬퍼지게 된다.
“그런 거 절대 가만 안 두지.”
시현은 인벤토리에서 블랙 드래곤의 롱 코트를 꺼내 몸에 걸쳤다. 이제는 시현의 상징이 되어버린 롱 코트가 시현의 몸을 감쌌다.
“가 볼까.”
시현은 가볍게 중얼거리며 망설임 없이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가볍게 중얼거린 목소리는 어디로 산책 가나 싶을 정도로 가볍고 별 거 아닌 목소리였다.
이 날. 아무도 모르는 시각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네 번째 레드 던전이 공략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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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31일 목요일.
“현재 시각 오후 11시 45분. 이제 2009년도 단 15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떠나는 2009년이 아쉬운 사람들은 몇 시간 전부터 보신각 앞에 모여 제야의 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엄마, 엄마! 빨리! 조금 있으면 시작해!”
“아직 시작하려면 15분이나 남았다, 얘!”
하연의 호들갑에 경화가 웃으며 핀잔을 줬다. 시현도 호들갑 떠는 하연을 보며 피식 웃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일상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풍경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자. 하연이, 오빠하고 맥주 한 캔! 이건 어른이 주는 술이니 받아도 돼!”
“어? 진짜요? 엄마! 진짜 마셔도 돼?”
“야! 너 애한테 뭘 들이대는 거야!”
“거 15분 뒤면 이제 어른인데 어른 미리 좀 가불하자! 융통성 없긴!”
“맞아! 오빠 융통성 없어!”
듬직한 신체를 가진 준이 어울리지 않게 떽떽떽 소리쳤다. 기회일세라 하연도 준의 옆에 착 붙어 시위에 동참했다.
시현은 갑작스레 찾아온 두통에 얼굴을 구겼다.
“뭐 어떠니. 오늘은 날이니까 한 번만 허락해 주렴. 대신 너도 많이 마시면 안 돼. 알았어?”
“와! 엄마 사랑해!”
“크으! 역시 사모님, 젊으신 외모처럼 융통성도 있으시네요! 어디의 누구랑 달리!”
“저 새, 아니, 저 놈 누가 데리고 왔어. 당장 쫓아내.”
시현은 입에서 나오려던 욕설을 재빨리 필터링했다. 낳아주신 분 앞에서 욕을 지껄이는 버릇없는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으하하! 천하의 강시현을 윽박지르는 날이 오다니! 2009년 내 마지막 행운이 여기에 있었구나!”
“와, 우리 오빠가 저러는 거 몇 번 못 보는데. 준 오빠 굉장해요!”
“이 오빠가 좀 굉장하긴 하지. 뭐니 해도 S등급 헌터 아니겠냐, 크. 자, 자, 건배 하자.”
“형. 너무 시현이 괴롭히지 마요. 나중에 뒷감당 어떡하려고 그래요?”
“아! 경진이 오빠도 같이 한 잔 하자.”
“아가, 술은 적당히 마시렴. 술을 즐기는 건 좋지만 너무 많이 마시면 못 써요.”
“민영아, 이거 봐! 시현이 어릴 적 앨범이야!”
“오! 앨범! 시현, 이거 봐도 될까요?”
“…안 된다고 해도 볼 거지만. 말려도 소용없어. 아영아, 뺏기지 않게 잘 지켜.”
누가 누군지 헷갈릴 정도로 많은 목소리들이 영상실을 가득 채웠다. 시현은 그 풍경을 단 한 마디로 훌륭하게 정리했다.
“누가 보면 여기가 무슨 시장판인 줄 알겠다.”
“시장판이면 어떠니. 엄마는 이렇게 떠들썩한 거 좋더라.”
“아. 저도 말이 그런 거지 이런 거 안 싫어해요. 왁자지껄한 거 좋잖아요.”
시현은 어머니의 말에 냉큼 대답하고 가볍게 웃었다.
넓디넓은 영상실 가운데에는 테이블이 몇 개 놓여있고 그 위에 음식들과 음료들이 놓여 먹기 좋게 되어 있었다. 벽 한쪽에 설치 된 커다란 스크린에는 제야의 종 행사를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었고 여기 모인 사람들은 다 같이 그걸 보기 위해 모여 있었다.
언제나 가족끼리 맞이하던 한 해의 끝이었거늘 정신 차리니 같이 맞이할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있었다.
친구인 경진과 준, 여자 친구인 민영, 아영, 레이첼, 소피아까지. 시현과 가족인 경화, 하연을 포함하면 그 수만 벌써 아홉 명이었다.
원래 이 자리에 김대형 협회장, 신민준 부협회장, 레이첼의 비서인 밀리까지 왔어야 했지만 그들은 바빠서 오지 못 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이 당연히 바쁠 시기일 터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둘째 쳐도 레이첼은 여기 있어도 돼? 바쁘다거나 그런 거 아냐?”
“전혀요! 이런 기회 흔치 않은데 빠질 수 있나요?”
“…세상에. 우리 오빠가 루드비아 인더스트리의 CEO와 알고 지낸다니. 볼 때마다 믿기지 않아요.”
“노, 노. 그렇게 부르면 딱딱하니까 레이첼이라고 불러요. 시현의 동생은 저한테도 동생이니까요.”
레이첼은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고 하연에게 윙크했다. 그 당차고도 모델 같은 모습에 하연이 동경하는 눈빛을 빛냈다. 아직 세상 경험 적은 소녀에겐 레이첼이 멋져 보이기만 했다.
셋이 모여도 접시 깨는 여자가 두 배나 모여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나이를 잊은 여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떠들었다.
“야. 근데 레이첼씨에게는 하연이가 동생이 아니라 시동생 아니냐?”
“…형. 그거 지금 들리면 큰일 나요. 다들 못 들었으니 다행이지만요.”
준과 경진이 속닥거린 소리는 경진이 말한 것처럼 여자들의 귀에 닿지 않았다. 시현은 그 일을 다행이라 여기며 고개를 돌렸다.
“2009년, 드디어 5분 남았습니다. 조금 있으면 새로운 해, 새로운 출발을 맞이하게 됩니다.”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시현은 생각에 잠겼다.
며칠 전 던전을 공략한 것으로 미래는 바뀌었다. 이제 시현이 알고 있는 미래의 대부분은 없던 일이 될 것이고 자연스레 미래 개변 현상 목록에서 많은 미래가 사라질 것이다. 시현의 이점 중 하나가 큰 타격을 입는 셈이었다.
아쉽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건 거짓말일 거다. 미래를 안다는 건 그만큼 매력적인 것이고 시현은 그걸 스스로 쳐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만일 회귀한 것처럼 며칠 전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선택하라 해도 시현은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돈은 이미 엄청 모았고 모을 건수도 넘쳤다. 굳이 욕심 부리지 않아도 잘 살 자신이 있는데 구태여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이왕 맞이하는 새해, 슬퍼하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나.
“시현아?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음? 아. 그냥 여러 가지. 내가 생각해도 나 참 잘 컸구나 싶어서.”
“풋. 시현이도 참. 그리 말하니 꼭 늙은이 같잖아.”
시현은 옆에 앉은 아영을 보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거기에 맞춰 아영도 가볍게 킥킥 웃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2010년을 맞이하는 새해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겠습니다. TV 앞에 계신 국민 여러분도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세어 주시기 바랍니다!”
“오빠, 카운트다운 한다!”
“애냐. 넌.”
시현은 호들갑 떠는 하연을 보고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리 말하면서도 하연에게 맞춰 같이 카운트다운을 셌다.
시현이 카운트다운을 세자 하나 둘 맞춰 카운트다운을 세고, 어느 순간부터는 영상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수를 세고 있었다.
“2, 1, 0! 2010년 1월 1일을 알리는 제야의 종소리가 보신각을 울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괴수가 나타나지 않은 2010년이 찾아왔다. 그리고 시현이 모르는 미래가 펼쳐졌다.
============================ 작품 후기 ============================
@Mable Fantasm//그리고 그런만큼 멸망 이야기는 딱 몇 줄 처리로 끝. 이겼다, 지구 지키기 끝!
쉽게 쉽게 가자는 소제목은 멸망물 소재 등으로 질질 끌지 말고 쉽게 가자는 뜻에서 지은 것입니다. 실제로도 늘어지기 전에 재빨리 끝냈고요.
근데 쓰고 보니 딱 여기서 완결 딱지 달아도 될 그런 느낌마저 드네요. 그냥 그동안 리스타트 라이프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을 쓸...
2016년 5월 14일. 오타 수정. 보스곰님께서 지적해주신 부분을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