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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맥의 올바른 사용법.
2010년 7월 15일 목요일.
불타는 금요일 하루 전날인 오늘이지만 성지예의 삶은 지난주부터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지예씨, 작년 2분기 재무상태표에 표시한 부분 확인 좀 해 줘요. 그럴 일 없는데 돈이 안 맞네.”
“아, 네! 금방 정리하겠습니다!”
“금방 할 필요 없고 천천히 해요. 그리고 계좌를 좀 다양하게 만들까 하거든요. 앞으로 일도 좀 자주 돌아다닐 거 같으니까 통화별, 아니, 유로하고 위안만 하면 되겠네요.”
“오늘 중으로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글쎄. 천천히 하라니까. 돈도 적당히 제 계좌에서 빼서 환전해 넣어 주시고요. 금액은 지예씨에게 일임할게요. 아, 그리고 냉장고 안에서 콜라 하나만요. 지예씨도 뭐 하나 드시고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성지예가 방구석에 놓여있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안에 보이는 고급 맥주가 한 순간 성지예의 혀를 유혹했지만 이온음료로 참기로 했다.
성지예는 꺼낸 콜라 캔을 따 건네는 소소한 센스를 발휘했다.
“아. 고마워요.”
콜라 캔을 입에 대고 몇 번 기울인 시현은 캔을 책상에 대충 내려뒀다.
성지예는 그 모습을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사실 성지예가 시현이 콜라를 마신 걸 보고 침을 삼킨 건 아니었다. 콜라가 탐이 났다면 이온음료 대신 콜라를 가져왔으면 될 일이다.
그녀가 침을 삼키게 된 원인은 시현의 책상 위에 펼쳐진 서류들이었다.
“진짜 내가 대충 살았구나. 반성해야겠네.”
별 거 아닌 듯 중얼거리는 시현의 손은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놀고 있었다. 왼손에는 빨갛고 파란 펜 여러 개가 쥐여져 번갈아가며 서류 위를 돌아다니고 있었고 오른손은 오른쪽에 배치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시현의 손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책상에 쌓인 두툼한 서류들이 갱신되거나 자료가 고쳐진다.
성지예는 그 모습을 보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기, 시현님. 어차피 재산관리팀을 마련할 건데 왜 직접 정리를…?”
“그것도 그런데 인수인계는 제대로 되어야죠. 겸사겸사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알고.”
‘그게 겸사겸사 한다고 될 일이 아닌 거 같은데요!’
당사자는 겸사겸사 한다고 하지만 이건 엄연히 봐도 겸사겸사 끝낼 분량이 아니었다. 무려 3년이나 방치 된 분량이 끝낸다고 끝내지겠는가.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그것도 단 두 사람, 성지예가 거들기만 하는 걸 감안하면 시현 한 사람이서 말이다.
성지예가 시현의 비서로 취직한 지도 6일째. 그녀는 6일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가고 있었다.
첫날부터 일 좀 같이 하자고 방긋 웃은 시현은 정말로 지예를 부려먹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성지예 본인이 자기가 김대형 협회장에게 사기 당했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토요일 근무 시작해서 목요일인 오늘까지 성지예는 시현의 비서로서 뼈 빠지게 일하고 있었다. 벌써 집에 못 들어간 것도 5일째였다.
물론 시현이 집에 가지 말라고 한 건 절대 아니었다. 시현은 언제나 성지예에게 가볍게 말했다.
“그런데 정말 집에 안 들어가도 돼요? 정시 되면 눈치 보지 말고 가서 쉬라니까요.”
바로 이렇게 말이다.
“아닙니다. 비서로서 해야 할 일이니까요.”
말이 좋아 비서로서 할 일이지, 톡 까놓고 하늘같은 상사가 일하는데 어떻게 자기 혼자 쏙 하고 집으로 들어가나. 시현이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라는 건 성지예도 잘 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그렇게 돼서 5일째 밤새 야근하고 시현의 집 적당한 객실에서 숙면을 취하고 일을 하는 게 반복되었다. 그리 되다 보니 문제는 따로 있었다.
‘집이 너무 편해…!’
객실로 주어진 방은 자기 집과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좋았고 너무 편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에 돈 십만 원 하는 최고급 용품으로 씻고 케어까지 받으니 더더욱 그랬다.
처음에는 일터에서 자는데 제대로 쉴 수나 있나 싶었지만 압도적인 재력의 편안함은 그런 부담감을 원 큐에 날려버렸다.
거기에 식사 시간에 나오는 음식도 최고급 식재료와 별이 붙는 쉐프가 만들어 주니 입마저 고급스러워지고 있었다.
성지예는 자기가 회사에 조교 당하는 거 아닐까 심도 깊은 고찰을 했다.
“슬슬 점심시간도 가까워지니까 미리 식사 부르죠. 오늘은 뭐 먹고 싶어요?”
“…랍스타가 먹어보고 싶습니다.”
“여보세요. 여기 랍스타 좀 세팅 좀 해 주세요. 아, 그리고 가츠동도.”
고찰과 별개로 이 회사 생활을 즐기는 건 그녀가 나쁜 게 아니었다. 나쁜 건 압도적인 재력의 폭력이었다.
음식 주문을 끝낸 시현이 다시금 일에 몰두했다. 성지예는 시현의 보조를 하며 감탄했다.
성지예가 업무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시현이 쉬는 모습을 본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시현은 아침 일찍 성지예보다 먼저 일을 시작해서 밤늦게 성지예가 잠을 들러 간 뒤에도 일을 계속했다. 그것도 밤을 새면서 말이다.
시현이 처리하는 일은 3년 간 시현이 관여하지 않은 여러 서류 작업. 재무제표부터 시작해서 이카로스 관리에 필요한 정보, 시현 본인과 얽힌 국제역학관계에 대한 자료 조사까지. 온갖 일을 두루두루 해내고 있었다.
한 팀이 달려들어 몇 주 걸려 해내야 할 분량을 혼자서 일주일도 안 돼 70% 가까이 끝내버리는 모습. 그 모습은 이미 인간이라고 부르기엔 경이롭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성지예는 왜 김대형 협회장이 시현을 그리 눈여겨보는지 이해했다. 그리고 시현이 서류 작업을 하지 않은 건 몰라서가 아니라 할 필요가 없어서라는 것 또한 확실히 깨달았다.
똑똑.
시현의 보조를 맞추며 감탄하고 있자니 집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성지예는 시현의 양해를 구한 뒤 시현의 보조에서 이탈했다.
그녀가 문을 열자 사용인 십 수 명이 들어와 집무실에 기다란 식탁과 다양한 랍스타 요리들, 싱그러운 샐러드와 산해진미를 세팅했다. 화룡점정이 가츠동이라는 건 조금 아이러니했다.
랍스타나 여러 음식이나 분명 준비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들은 시현이 주문하면 정확히 30분 내로 그 어떤 음식도 준비해냈다. 성지예는 그게 참 신기했다.
“시현님. 식사가 준비됐습니다.”
“자. 먹고 합시다. 사람이 먹고 살려고 이러는 거지.”
시현은 집무를 보던 책상에서 일어나 테이블 앞에 앉았다. 시현을 따라 성지예가 음식 앞에 착석했다.
처음에는 좌불안석이기만 했던 단 둘만의 식사시간도 이제는 음미하며 즐길 수 있게 되다니. 성지예는 새삼 자신의 적응력에 자화자찬했다.
“요 며칠 바쁘게 일만 시켜서 미안해요. 대신 금방 지예씨 도와줄 사람들 모을 테니까 조금만 버텨줘요.”
“아, 아닙니다. 시현님께서 신경 써주시는 덕분에 괜찮습니다.”
이건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일은 시현이 거의 다 하고 지예는 시현이 시키는 일과 보조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예씨 없었으면 시간 더 걸렸죠. 이번 달까지만 조금 힘들고 다음부터는 좀 편하게 갈 수 있게 할게요.”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도 미안하니까요.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이번 달 월급은 좀 더 챙길게요.”
“감사합니다.”
방금 전까지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태도였다. 하지만 사양은 한 순간이고 금전은 오래 간다. 성지예는 살짝 빨개진 얼굴을 돌리며 재빨리 받아들였다.
호화로운 식사시간이 끝나자 대기하던 사용인들이 음식과 테이블을 치웠다. 시현은 치워지는 테이블을 보며 가볍게 기지개를 폈다.
“그러면 조금만 쉬었다가 바로 일로 들어가죠.”
자신의 상사는 매우 절륜한 체력의 소유자였다. 성지예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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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벌써 6시네. 지예씨는 퇴근해도 돼요. 저는 좀 쉬었다가 더 해야겠네요.”
“그러나 대장, 네놈은 나로 인해 쉴 틈이 없어질 것이다! 으악! 의자 던지지 마!”
“아오, 씨!”
시현은 있는 힘껏 의자를 집어 던졌다. 집무실 문을 열었던 준은 기겁하며 의자를 피했다.
“아! 왜! 난 이제 보기만 해도 싫은 거냐?”
“싫으니까 당장 돌아가.”
“와, 동생, 쟤 봐라. 이제 우리 필요 없다고 저런다.”
준이 투덜대는 걸 경진이 받아주고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 뒤를 잇듯 민영과 아영도 집무실로 들어서 두 사람만 있던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오랜만이네. 일은 잘 되고 있어?”
“그냥저냥. 조금만 더 매달리면 끝날 거 같긴 해.”
“언니~ 오랜만이에요.”
아영이 아는 체를 하자 성지예는 살짝 고개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민영도 거기에 맞춰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수고하셨어요. 시현이 때문에 고생 많으시죠?”
“아닙니다. 시현님께서 유능하신 덕분에 큰 고생 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게. 할 줄 알면 진작 했으면 좋았잖니?”
‘아니. 이거 일주일 전에 할 줄 알게 된 건데.’
사실 리스타트 플레이어의 보정을 받았을 뿐이지만 시현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어쨌든 온 김에 쉬었다 가. 아, 저건 좀 버리고 와라.”
“적어도 저놈이나 저새끼라고 불러! 사람 취급 정도는 해 주길 원한다!”
준이 뭐라 외쳐댔지만 시현은 그 외침을 무시했다. 일행들도 자연스레 준을 무시했다. 이제는 일상인 풍경이었다.
“어쨌든 왔으니까 좀 쉬었다 가. 아, 지예씨는 퇴근해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시현이가 안 쉬는데 비서님이 어떻게 퇴근을 해?”
“아, 아닙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성지예는 경진의 변호를 듣고 당황했다. 경진의 변호는 고마웠지만 아무래도 부하로서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현은 경진의 말을 듣더니 진지하게 고민했다.
“흐음. 5일씩이나 못 들어간 것도 있으니까. 오늘은 정말로 퇴근해도 돼요. 저도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같이 할 테니까.”
시현의 말이 끝나자 기뻐한 건 다름 아닌 아영이었다. 아영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성지예에게 쪼르르 달라붙었다.
“와! 잘 됐다, 언니! 그러면 이따가 같이 놀러 갈래요?”
“근데 아영이 쟤는 왜 지예씨에게 언니, 언니 저러고 있어?”
“우리끼리는 사석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어. 한 3일쯤 됐을 거야.”
빠르기도 해라. 시현은 민영의 대답을 듣고 가볍게 감탄했다.
“맞다. 지예씨. 싱크탱크 목록 추려놨어요? 미안한데 그거만 좀 가져다주고 가요.”
“아, 예! 알겠습니다.”
시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성지예가 재빨리 자신의 책상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일하는 내내 틈틈이 추려둔 종이 십 수 장을 시현에게 내밀었다.
“여기 시현님의 전략기획부 소속으로 내정될 후보들을 골라본 서류입니다. 각 분야에서 이름 있고 실력 있는 인물들을 최우선으로 추렸습니다.”
“흐음.”
시현은 성지예가 보는 앞에서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차분히 읽어 내려갔다.
성지예는 이유 모를 위통에 입을 꾸욱 다물었다. 분명 퇴근하라고 해 놓고 이제 와 퇴근하지 말라는 그런 압박인 것인가!
성지예가 온갖 생각을 하며 위를 부여잡고 싶어 할 때쯤 시현이 서류를 전부 읽었다. 성지예는 무슨 말이 떨어질까 잔뜩 긴장했다.
“음. 괜찮네요. 그러면 이제부터 지예씨에게 전권 일임할게요.”
하지만 시현이 꺼낸 말은 예상치도 못 한 말이었다.
“…예?”
“시간은 넉넉하게 줄 테니까 지예씨가 마음껏 뽑아 봐요. 거기에 대해서 절대로 뭐라 안 할 테니까.”
가서 장 봐 오라고 대충 말하듯 말하고 있다. 거기에 정말 그러라는 듯 서류까지 내밀고 있다.
방금 전 보고할 때 내밀었던 서류가 돌아올 때는 이유 모를 존재감을 뿜어대고 있었다. 분명 방금 전과 같은 재질일 터인데 왜 이렇게 무겁게만 느껴지는가.
“그러면 힘내요. 섭섭하지 않게 챙겨줄 테니까 열심히 합시다.”
차라리 혼을 내 주세요! 성지예는 서류를 받아들며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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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금요일 하루만 쉬려고 했는데 왜 저는 몸살감기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는 걸까요. 이런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던데...!
괜찮을 줄 알았더니 금토일 3일을 내리 쉬어버렸습니다. 그러고도 아직도 몸이 쑤셔 당분간은 연재 텀이 좀 있을 거 같습니다. 기다리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