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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참지 않는다.
2010년 12월 11일 토요일.
경기도 외곽 쪽에 있는 럭셔리 펜션에서는 조금 이른 송년회가 시작 되고 있었다.
“야, 지하에 수영장도 있어. 겨울인데도 따뜻해서 수영도 할 수 있겠다.”
“여기 있는 이 술들 제일 싼 게 수십만 원인 건 알고 있냐?”
“와. 위엄 넘친다. 형진아, 이거 진짜 먹어도 돼?”
김형진은 소란스러운 동창들을 보고 고개를 가벼이 끄덕였다.
“그러라고 있는 건데 먹으면 뭐 어때. 마음껏 먹어.”
“오! 통 크다! 싸나이 김형진 완전 상남자네!”
“김형진! 김형진!”
“에이, 씨. 쪽팔리게 뭐 해. 됐어.”
동창들의 환호와 연호에 김형진은 슬쩍 손을 저었지만 속마음은 겉모습과 정반대였다.
그는 이 상황에 매우 흡족해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거금을 들여서 이 펜션을 빌릴 리가 없었다.
경기도 외곽에 자리 잡은 이 럭셔리 펜션은 산 하나를 터로 잡아 만든 초고급 펜션이었다.
당장 펜션 건물만 해도 2층짜리 큰 펜션에 테라스와 지하 수영장, 온갖 놀이시설과 호화로운 것들이 담겨 있었으며 한술 더 떠 펜션 근처에는 야외에서 놀기 좋은 시설까지 두루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 럭셔리 펜션을 빌린다는 건 산을 통째로 빌린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으며 그런 만큼 매우 비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럭셔리 펜션은 언제나 예약이 꽉 찰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김형진도 이 럭셔리 펜션을 빌리기 위해 두어 달 전부터 예약을 했었고 4자리 수에 달하는 거금을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한심한 새끼들.’
평소에는 거들떠도 못 보던 거 좋다고 자지러지는 동창들을 속으로 비웃는 김형진이었지만 그는 이내 다르게 생각하기로 했다.
세상에 저렇게 싼티나고 촌스러운 것들도 있어줘야 자신이 더욱 두드러진다. 자기가 돋보이려면 저렇게 알아서 깔아주는 천것도 필요한 법이다. 금수저는 그 자체만으로도 빛이 나지만 흙수저들과 같이 있으면 더더욱 빛이 나 보이는 법이니까.
그렇게 마음을 바꿔먹자 김형진의 마음에 흐뭇함이 가득 찼다.
“그냥 친구들끼리 이렇게 모여 놀고 하는 거지. 근데 강시현 그 새끼는 그런 걸 모르니까 야속한 새끼지.”
“그것도 그래. 씨발. 좀 벌었으면 같이 밥도 사고 그러는 거지.”
“어이구. 비싸신 헌터님인데 그런 게 되겠냐.”
하물며 김형진의 말 한두 마디에 딸랑거리는 이들이 있으니 안 그럴 수가 있나. 김형진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마음을 담아 웃음 지었다.
누군가가 자기에게 선물을 주면 착한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에게서 물건을 빼앗으면 나쁜 사람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안 한 사람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보통 사람이다.
그런데 동창들은 강시현을 매정한 사람, 야속한 사람으로 몰며 그를 험담했다. 그는 동창들에게 아무 피해도 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몇몇 그러지 않은 사람들이 섞여 있었지만 분위기는 강시현을 헐뜯고 조리돌림 시키는 분위기로 형성되어 버렸다. 일부를 제외한 동창들은 강시현을 안주 삼아 송년회의 흥을 올리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당사자는 그 험담을 보고 속으로 조소했다.
‘병신 새끼들.’
그저 물질적으로 좋게 해 주고 이렇게 밀어주면 좋다고 딸랑댄다. 없던 호감까지 만들어서 팔아먹기까지 한다. 김형진은 그 꼴이 우스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이 싫은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상황을 바란 김형진이었다.
김형진은 강시현이 싫었다. 어느 날부터 갑작스레 눈에 띄기 시작하더니 반을 휘어잡아버린 강시현이 싫었다. 반의 중심이 되어야 할 자기를 외곽으로 밀어내고는 그 자리를 자연스럽게 차지한 강시현이 싫었다.
그런 그가 이런 자리에서 헐뜯기고 병신 취급 받는 걸 보고 있자니 저열한 희열이 솟아올랐다.
“너 돈 많나 봐? 이렇게 마구마구 써도 돼?”
김형진은 그 희열을 입안에서 굴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김형진에게 말을 건 건 당시 반에서 인기가 많았던 김예린이었다. 비록 같은 반이었던 이민영과 김아영에게 밀려 2~3위 취급 받긴 했지만 그녀 또한 매우 예뻤다.
“왜 내 지갑을 네가 걱정해 줘? 나한테 관심 있어?”
“참 나. 뭐래. 나 눈 높거든.”
그렇게 말하는 김예린의 눈에서는 김형진에 대한 관심이 살짝 일렁이고 있었다.
김형진은 김예린의 눈빛을 만끽하며 슬쩍 그녀를 스캔했다. 타이트한 스키니진과 몸에 살짝 붙는 스웨터는 김예린의 여성적인 곡선을 여실하게 강조하고 있었다.
오늘 밤이 즐거워질 것 같다. 김형진은 그리 생각하며 슬쩍 웃음을 지었다.
부우우웅…!!!
하지만 그 생각을 깨듯 힘찬 배기음이 펜션 밖에서 들려왔다.
김형진을 비롯한 동창들 몇은 그 배기음을 따라가듯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가는 그들은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했다.
“왔나 보다.”
하지만 단 한 명은 그런 기색 없이 기다렸다는 듯 밖으로 나섰다. 바로 총대를 메고 강시현에게 전화했던 친구이자 강시현을 험담하는 분위기에 대놓고 불쾌해 하던 박준욱이었다.
사람들이 나가자마자 본 건 은색으로 말끔하게 도장된 차량이었다. 강렬한 배기음을 울리며 펜션 주차장에 자리 잡은 차는 납작한 전면이 인상적인 차였다.
‘저, 저 차는…!’
다른 사람들은 멋진 자동차 정도로만 생각하며 떠들었지만 차에 관심이 많은 김형진은 그 차를 보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펜션 주차장에 들어선 차는 부카디 페이론 차량 중 하나이자 30억이 넘는, 세계에서 단 4대 밖에 없다는 하이퍼카였으니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형진을 경악케 한 건 그 차에서 내린 청년이었다.
“와. 차 봐라. 이거 얼마나 하냐.”
“잘 모르겠어. 이번에 여기 놀러 간다니까 아는 형이 선물해 줘서. 내가 너무 늦게 왔어?”
“온 게 어디야. 얼른 와.”
청년은 박준욱의 환영에 맑게 웃으며 펜션으로 들어섰다. 자연스레 청년을 향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청년은 가는 턱선과 테 없는 안경, 입가에 건 미소가 인상적인 청년이었다. 윤기 있는 머리칼과 여자가 봐도 부러워할 정도로 잡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 거기에 안경 안쪽으로 보이는 눈엔 부드러움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 청년을 장난스럽게 모신 박준욱은 동창들과 김형진을 보며 소개했다.
“내가 강시현 그놈은 못 끌고 나왔지만 대신 다른 사람은 하나 끌고 왔다. 바로 어렵사리 모신 비밀 게스트, 안경진님이시다.”
“그렇게 말하지 마. 괜히 이상하잖아.”
소개 받은 경진은 슬쩍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가 동창들을 둘러봤다.
그 시선을 받은 동창들이 몸을 움찔 떠는 건 당연했다. 생각을 해 보라. 직간접적으로 괴롭히거나 자기에게 피해가 올까 무시하던 사람이 자기보다 더욱 대단해져서 왔는데 찔리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경진은 그런 불안을 종식시키듯 가볍게 웃음 지었다.
“늦게 와서 미안해. 원래는 좀 더 일찍 오고 싶었는데 선물 하나 가지고 오느라 늦어서.”
내심 불안해하던 동창들은 뜬금없는 경진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보복을 각오했는데 선물을 가지고 오니 더더욱 그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경진은 카드가 담긴 고급스러운 봉투를 꺼내 박준욱에게 건넸다.
“매 번 모일 때마다 자리 없어서 고생했다며. 그래서 아예 여기를 사 뒀어. 미리 연락하면 셔틀버스도 갈 테니까 앞으로는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
“……허, 헐….”
대수롭지 않게 봉투를 받았던 박준욱은 손을 벌벌 떨며 봉투 속에 담긴 카드를 꺼냈다. 검은색과 금색으로 멋들어지게 만들어진 블랙카드는 펜션 이용 허가를 나타내는 카드였다.
이런 곳 빌리는 것만 해도 네 자리 수에 달하는 돈이 들어가는 걸로 아는데 오랜만에 나타난 경진은 아예 이곳 자체를 사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것도 과거에 경진을 괴롭혔던 자기들을 위해서.
“옛날 일은 옛날 일이고 같은 반 친구잖아. 그러니까 괜히 마음 쓸 필요 없어.”
그런 생각들을 불 보듯 훤히 읽은 경진은 더욱 친근함을 담아 웃었다.
그들에게 악감정이라거나 묵은 원한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하나에 원한을 갖는 사람은 없듯이 경진이 동창이라는 남을 보는 눈은 그런 눈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면죄부를 주듯 밝게 웃었다.
“겨, 경진아…!”
“진짜, 옛날엔 진짜 미안했어.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알아. 다 잊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라니까.”
가소롭다 못 해 웃음이 나올 사과들이 경진에게 쏟아졌다. 경진은 그것들을 환한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왜냐하면 오늘의 주적은 같잖은 동창들이 아니었으니까.
“오랜만이네. 예린아. 잘 지냈어?”
경진은 동창들을 지나쳐 김예린을 향해 웃었다. 김예린은 김형진의 옆에 서 있다가 화들짝 놀랐다.
“어, 어? 어, 자, 잘 지냈어! 그런데 날 기억하는 거야?”
“당연히 기억하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넌데.”
물론 그냥 하는 소리다. 그저 기억력이 좋아서 기억하고 있을 뿐, 경진에게 있어 김예린은 경진을 혐오스러운 눈으로 보던 여자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한껏 훈훈해진 경진을 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래, 세상에, 어떡해!’
어떻게 들으면 진부하기 짝이 없을 말도 경진이 부드럽게 웃어주며 말하니 달콤하게만 들렸다. 김예린은 미친 듯이 뛰는 심장소리가 경진에게 들리진 않을지 걱정했다.
“그런데 형진이하고 같이 있는 거 보니, 혹시….”
“아, 아냐! 얘하곤 그런 거 아냐!”
퍽! 소스라치게 놀란 김예린이 김형진을 냅다 밀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김형진에게 관심을 갖던 여자라고는 전혀 생각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경진은 황망한 표정으로 얼떨떨해 하는 김형진을 보고 대충 감 잡았다.
“그래? 다행이다.”
감을 잡았으니 남은 건 행동하는 것뿐. 사소한 말이라도 달달한 목소리로 말해주자 김예린은 행복한 생각에 빠졌다.
그런 김예린을 보던 경진은 고개를 돌려 빙긋 웃었다.
거기에는 세상 모든 걸 빼앗긴 듯 무너진 표정을 짓는 김형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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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12일 일요일.
- “너 절대 경진이하고 척 지지 마라. 무조건 잘 지내라. 알았냐?”
“이건 또 뭔 개소리야?”
총대를 멨던 친구는 뜬금없이 그 말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시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기 전화를 보다가 경진을 쳐다봤다.
“너 뭐 했냐? 얘 왜 이래?”
“아니? 나 아무 것도 안 했는데?”
“…근데 이놈이 왜 이러지.”
경진이 아니라고 하니 아닐 터인데, 그렇다면 총대 멨던 친구가 뜬금없이 이럴 리는 없다. 그냥 뉴스라도 본 건가? 시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경진은 그런 시현의 모습을 남몰래 훔쳐보며 웃었다.
원래는 시현에게 절대 말하지 말아달라고 하려고 했던 경진이었지만 입단속을 그렇게 심하게 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시현이가 알아주면 어떤 모습을 보일까?’
원래는 시현이 걱정하지 않게 시현 모르게 일을 처리하려 했으나 속으로는 시현이 알아줬으면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칭찬해줬으면 좋겠다.
걱정 끼치고 싶지는 않은데 칭찬은 받고 싶다니. 경진 스스로가 생각해도 사람의 마음이란 참 들쑥날쑥한 것이다.
“근데 너 진짜 아무 것도 안 했어? 솔직히 말해보라니까.”
“정말로 안 했다니까.”
자기를 의심하는 시현을 보며 경진은 슬쩍 웃음 지었다.
사실은 내가 널 위해 이랬어! 하고 자랑하고 싶은 경진이었지만 경진은 그걸 꾸욱 참았다.
참느라 입이 간지러워 죽는 줄 알았다.
============================ 작품 후기 ============================
사실 경진이 한 건 별 거 없습니다. 그저 김형진이 점찍어둔 여자를 김형진의 옆방에서 열심히 기쁘게 해주고 걔가 기뻐하는 소리를 김형진에게 열심히 들려준 정도입니다. 정말 별 거 없네요!
10월 초에 돌아온다고 했다가 겨우겨우 시간이 걸려 어떻게든 돌아왔습니다. 솔직히 슬럼프는 여전하지만 더 이상 독자 여러분께 폐를 끼칠 수는 없어서 어떻게든 써 봤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 대단히 감사합니다. 너무 푹 쉬었고 염치 없지만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