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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만일 그가 그녀였다면?
“야. 경진이 없으니까 해 보는 말인데 경진이는 여자애로 태어났어야 하는 거 아니냐?”
“야, 이 미친놈아.”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맥주병으로 준의 머리를 후려 갈겼다.
와장창!
“크학! 이 미친 새끼! 아프잖아! 사람 죽일 거냐!”
“뭔 개소리야. 기스 하나 안 났구만. 어디서 엄살이야, 엄살은.”
“기스 안 난다고 사람 대가리를 병으로 후려 치냐! 만에 하나 났을 수도 있잖아!”
준은 그럴싸한 논리를 가지고 내게 빽빽 소리쳤다. 하지만 그 논리는 애석하게도 내게 먹히지 않는 논리였다.
“너 키운 게 누군데. 이 정도로 기스 나라고 가르쳐 준 철포삼 아니거든.”
그도 그럴 게, 이 미친놈에게 철포삼을 가르치고 S등급 헌터로 키워준 게 나 강시현이기 때문이다. 어디서 사부 앞에서 공갈을 쳐.
“하여간 술 빨다 말고 그건 뭔 개소리야? 내가 상한 술을 먹였나?”
“이 대장 새끼가 사람을 진짜로 미친놈으로 모네.”
“아니. 야. 생각해 봐. 내가 갑자기 너는 여자였어야 했어 하면 넌 어쩔래?”
“…씨, 씨발. 내가 잘못했네.”
그치? 나는 준에게 되물었고 준은 궁지에 몰린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내 준은 머리에 묻은 맥주병 조각을 손으로 훌훌 털었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나와 준은 이렇게 집에서 가끔가다 둘이서만 술을 먹곤 했다. 사실 가끔이라기엔 엄청 자주라 준이 꽐라가 돼 죽었을 때를 대비한 전용 침실도 준비 되어 있었다.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둘이서만 술을 빨고 있었는데 이놈이 갑자기 개소리를 지껄인다. 준탱이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라지만 이번에 꺼낸 주제는 여태까지 들은 개소리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할 개소리였다.
“그래서 그건 뭔 소린데. 괜히 할 말은 아닐 거 아냐.”
나는 맥주병 목을 잡고 동전 튕기듯 병뚜껑을 엄지로 튕겼다. 뽕 하고 맥주병 뚜껑이 따이며 경쾌한 소리를 울렸다.
“끄응. 네가 듣기에는 개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이게 또 은근히 말이 되는 이야기라서 말이지. 만약 이 자리에 민영씨나 아영씨가 있었으면 내 말에 동의해 줬을 걸.”
“에이. 설마.”
“너 이 놈, 지금 설마라고 했겠다? 자고이래 사람을 제일 많이 잡아 온 헌터, 설마를 말하다니.”
“…대체 어떡하면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냐?”
준의 실없는 소리를 대충 흘린 나는 빈 잔에 맥주를 채우고 준에게 병을 넘겼다. 준도 자기 잔에 거품 가득한 노란 액체를 가득 채웠다.
“근데 가끔 맥주는 보면 꼭 여자하고 여러 번 하고 난 뒤 싸는 오줌 같지 않냐? 거품 자글자글한 게.”
“뒤진다, 니.”
맥주 맛 확 떨어졌다.
준은 내 말에도 아랑곳 않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나는… 차마 맥주 마실 기분이 아니어서 슬쩍 맥주를 옆으로 치웠다.
“하여간 우리 부라더 경진은 여자애로 태어났으면 끝장났을 거란 말이야. 진지하게 들어 봐.”
주제 자체가 개소리인데 진지하게 들으라 해도 들을 수가 있나. 하지만 마냥 거부하기에는 주제가 솔깃하기는 했다.
“……그래. 뭐. 얘기나 한 번 해 보자. 어차피 할 얘기도 없고.”
나는 소주병을 따며 준에게 응했다.
“이거도 오줌이니 뭐니 얘기하면 뒤진다.”
그리고 재빨리 준에게 덧붙였다.
“……칫.”
혀를 차는 거 보니 이 새끼 소주 가지고도 뭐라 할 셈이었군. 늦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어쨌든 한 번 생각해 봐, 대장. 만약에 경진이가 여자라면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건…!”
“이름인가?”
“병신아! 외모!”
나는 준을 벌레 보는 눈으로 쳐다봤다. 반면 준은 날 병신 보는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니. 이 미친놈아. 일단 이름부터 생각하는 게 맞는 거 아냐?”
“아니지! 이놈아! 경진이가 어떻게 생겼을 지부터 상상하는 게 남자잖냐!”
“그거하고 남자는 뭔 관곈데.”
“아오!”
준은 답답한 듯 양손으로 자기 머리를 부여잡았다. 몸을 부르르 떨 정도면 엄청 답답하다는 건데 대체 뭐가 저리 답답한 건지 모르겠다.
“씁. 좋다. 그러면 이름. 지나 어떠냐?”
“……너 설마 경진아 하고 부르는 호칭에서 경만 떼고, 진아는 안씨에 안 맞으니까 지나라고 바꾼 건 아니지?”
“예리한 새끼….”
나는 준의 대답을 듣고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빠따 하나 준비해 두는 건데.”
“크흠! 흠! 어, 어쨌든 어울리잖아! 그러니까 지나로 해!”
이곳저곳 딴지 걸고 싶은 곳은 많았지만 이 인간하고 대화하면서 딴지 걸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걸 잘 아는 나였기에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 이름은 됐다 치자. 이제는 네가 그렇게 원하는 외모다.”
“브라보! 브라보!”
준은 진심으로 좋아하며 물개박수를 쳤다. 진심으로 좋아하지 마라.
“외모. 외모라….”
나는 준이 꺼낸 주제로 곰곰이 생각해봤다. 경진이가 여자였다면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일단 경진이니까 안경이 잘 어울려야겠지. 왠지 모르게 안경 없는 경진이는 상상이 안 가니까.”
“이름부터 안경진이고. 나 비슷한 이름 아는데. 안경태라고.”
“영심이에 나오는 걔를 말하는 거라면 걔 원래 이름 왕경태야. 안경태 아냐.”
“뭣이?!”
사람들이 많이 착각하곤 하지만 이게 진실이었다. 어쨌든.
“그래서 말 꺼낸 너도 뭐 생각한 게 있을 거 아냐?”
“물론이지. 아마 지나는 흑발 롱 헤어가 어울리는 청초한 미소녀일 거야!”
이름도 벌써 지나가 되어버렸다. 이 순간 준의 안에서는 가상의 미소녀 하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앞머리를 조금 길게 기르고 자기는 맨 얼굴 부끄러워 하지만 사실 엄청 예쁜 미소녀! 거기에 책이 좋아서 매일 책을 끼고 사는 거 어때?”
“점점 어디서 본 거 같이 되어가는 건 둘째 치고, 안경 어디 갔어? 경진이 하면 안경이라니까?”
“밖에서는 콘택트렌즈. 집에서는 뿔테 안경 쓰는 거야. 책을 좋아하다보니 근시가 됐거든.”
쓸데없이 세세한 설정인데 생각 외로 그럴싸한 얘기라 묘하게 납득이 갔다.
그런데 그 설정을 듣고 보니 문득 궁금해진 게 하나.
“근데 왜 그런 번거로운 걸 해? 맨 얼굴을 부끄러워한다며? 그런데 콘택트렌즈를 끼고 밖을 돌아다니는 건 이상하지 않냐?”
“당연히 안 이상하지! 왜냐, 널 위해 콘택트렌즈를 끼는 거거든!”
“…….”
…….
이건 또 뭔 개소리지.
“지나도 자기가 예쁜 건 알아. 하지만 그걸 자랑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부끄러워하는 그런 애지. 왜냐, 수줍음이 많거들랑!”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은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열심히 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현이 널 위해서 용기 내어 자기를 꾸미는 거야! 차마 화장 같은 건 용기가 부족해서 못 하지만 최대한 시현이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콘택트렌즈! 크! 죽인다!”
어. 그래. 죽인다, 그래. 널 죽이고 싶어진다, 야.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였지만 차마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때? 부정할 수 있냐?”
“…썅.”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경진이가 고등학생 때만 해도 날 친구로 보는 건지 우상으로 섬기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야 경진이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감안해도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저 친구 사이인데 날 우상 보듯 봐 주는 건 부담스러웠으니까.
그랬던 경진이었기에 준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뭐…. 경진이가 나 엄청 신경 써 주니까.”
“그래. 경진이가 지나였다면 걔는 빼박 너한테 푹 빠진 거였을 거라니까!”
차마 그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젠장!
“아. 그리고 나이스바디. 몸이 아주 발칙했을 거야.”
“…엥? 발칙? 슬림한 게 아니라?”
“에헤이. 아니지. 거기서는 남자들 잔뜩 홀리는 발칙한 몸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시현이가 자기를 봐 주면 기뻐져서 자기 몸이 괜히 자랑스러워지는 거지.”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 놈 가관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점점 징그러워졌다.
“너 벌써 취했냐?”
“무슨 소리야! 난 취하지 않았다! 이 모든 건 독자 여러분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 새끼 취했네. 또 개소리나 하고.”
이제는 좀 먹을 마음이 든 맥주를 잔에 따르고 소주를 적당히 거기에 붓는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젓가락을 잔 안에 넣고, 다른 젓가락으로 잔에 넣어 세운 젓가락을 치면….
쨍.
경쾌한 소리와 함께 젓가락의 진동으로 거품이 화악 올라왔다.
나는 맥주잔에서 젓가락을 빼고 술을 마셨다.
“그래. 그렇다 치자. 외모 나왔으니까 이제는 성격이네.”
“일단 지나는 너한테 껌뻑 죽는 여자애일 거야. 네가 장난삼아 비키니 입은 모습 보고 싶다고 하면 얼굴 빨개지면서도 그 날 바로 수영복을 사러 가지 않을까!”
“……남자인 지금도 내가 뭐 해 달라 하면 간도 빼 줄 기세이기는 해. 솔직히.”
“그치. 그러니까 부끄러워 죽으려 하면서도 혼자서 비키니 비교해 보고 누님에게 어떤 게 어울리냐고 물어보곤 하겠지. 누님은 그거 보고 우리 아가가 사랑에 빠졌구나! 하면서 감격할 테고.”
“왜 여기서 소피아 얘기가 나오는지는 모르겠다만 그건 진짜 부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너한테는 부끄러움 잘 타는 여자애겠지만 다른 남자들에게는 냉담하겠지. 특히 너한테 피해 주려는 놈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할 거고.”
“아니, 아니. 그건 아니지. 이건 부정해야겠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경진이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다. 그럼. 그럴 리가 없다.
그런데 내 생각과 달리 준은 날 보더니 대뜸 중얼거렸다.
“…안경진, 이 무서운 놈. 천하의 강시현의 눈을 피한 건가.”
“그리 말하니 꼭 뭔가 있었던 것처럼 들리잖냐. 그건 아니지.”
“안경진, 이 무서운 놈. 앞으로는 대들지 말아야겠다.”
준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더니 김이 빠졌다는 듯 자기 잔에 찬 맥주를 힐끔 봤다.
“그런데 야. 김빠진 맥주는 꼭 잔뜩 참았다가 싼 오줌처럼 찐하지 않냐? 꼭 지린내 날 거 같은 그런 느낌….”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맥주병으로 준의 머리를 후려 갈겼다!
와장창!
============================ 작품 후기 ============================
이 외전은 이번 편으로 끝납니다. 안경진은 끝까지 남자라는 거.
리스타트 라이프는 3인칭 시점이었지만 저는 1인칭 시점을 좋아하고 쓰기가 편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슬럼프에 빠진 기분을 전환할 겸 1인칭으로 써 봤습니다. 다음 화부터는 다시 3인칭 시점으로 돌아갑니다.
덧붙여 다음 화는 다음 주 화요일에 올라옵니다. 몇 달 전 고소했던 악플러를 만나 형사합의조정이라는 걸 해야 해서 조금 준비를 하느라 글에 집중하지 못 할 거 같습니다. 살다살다 이런 걸 해 보는 건 또 처음이네요.
그러면 정의구현하고 다음 주 화요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