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5화
“시간 끝! 신문지를 한 번 더 접어 주세여!”
진행을 맡은 연습생의 말에 여기저기서 한 몸처럼 붙어 있던 연습생들이 후다닥 떨어졌다.
서로를 꼭 붙잡고 있던 예찬과 우휘겸도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멀찍이 떨어졌다.
예찬은 초점 없는 눈으로 긴 다리를 쪼그리고 신문지를 반듯하게 접고 있는 우휘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두 시간 전.
집합 시간이 되자 제작진은 방마다 도어락 카드를 한 장씩 나눠 주었다.
예찬의 방은 가장 연장자인 심상록이 카드를 받았다.
“일단 웬만하면 같이 이동하는 걸로 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번호를 교환해 둘까?”
심상록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자 범세혁도 자신의 것을 꺼냈다.
범세혁이 속한 루벨 엔터는 소속 아이돌 관리를 빡빡하게 한다고 유명했는데 데뷔도 하지 않은 연습생의 핸드폰까지 압수하진 않는 모양이었다.
소속사가 없는 예찬이나 우휘겸도 당연히 핸드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번호 교환은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그 후 방으로 이동한 네 사람은 대충 침대를 나누고 옷장에 들어 있는 연습복으로 갈아입었다.
“아직 시간 남았는데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찍을래?”
등급과 이름, 소속사가 적힌 빨간색 티셔츠로 갈아입은 심상록이 다시 스마트폰을 흔들었다.
“그럴까요?”
범세혁이 기껍게 대답했다.
시한폭탄과 친목 사진을 남겨도 될지 잠깐 고민했지만 여기서 빼는 게 모양이 더 이상했다.
‘둘이 찍은 것도 아니고 룸메이트끼리 다 같이 찍은 거면 직접 올린 놈 말곤 빠져나갈 만하지.’
그리고 예찬은 절대로 이 사진을 제 손으로 올리지 않을 터였다.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능숙하게 셀카 프레임 안으로 들어간 예찬은 머리 위로 브이를 만들었다.
찰칵.
“잘 나왔는데? 지금 단체방에 보낼게.”
부지런한 심상록은 곧바로 단체 메신저 방을 만들어 사진을 전송했다.
남지유 말대로 얼굴만 찍어도 재밌을 놈들이라 그런지 대충 찍은 것치고 결과물이 괜찮았다.
예찬은 ‘츄즈 마이 프린스 99 첫 룸메이트’라는 단체방 이름을 잠깐 바라보다 화면을 껐다.
이후 제작진이 고지한 시간에 맞춰 숙소 옆 강당으로 이동하자 알록달록 등급별로 다른 색의 티를 입은 연습생들이 모여 있었다.
저 끝에서 초록색 옷을 입은 남지유가 예찬을 알아보고 양팔을 붕붕 흔들었다.
예찬은 반가운 척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새 같은 등급 연습생들과 친해졌는지 남지유의 주변에 같은 색 옷을 입은 연습생들이 바글바글했다.
‘붙임성 있는 건 좋지만 과하게 외향적이면 거슬리는데.’
인맥 관리에 미쳐서 예찬을 앓아눕게 했던 전 멤버의 얼굴과 남지유의 구김살 없는 얼굴이 잠시 겹쳐 보였다.
아무래도 남지유를 데뷔 조에 넣고 함께 갈지 말지는 좀 더 신중히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빌어먹을 파티광 놈도 처음부터 그렇게 생겨 먹은 건 아니었거든.’
예찬은 흔들던 손을 내리고 자연스럽게 범세혁의 옆에 섰다.
카메라에 자주 얼굴을 비추려면 미래가 증명해 준 피디 픽 연습생 옆에 붙어 있는 게 제일이었다.
“연습생 여러분, 이곳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연습생들이 전부 모이자 메인 PD가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부터 츄즈 마이 프린스 99의 첫 합숙이 시작되는데요. 부디 이 일주일이 연습생분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뜻 깊은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악마의 편집의 대가로 떠오를 PD가 입에 담기엔 너무나 선량한 발언이었으나 미래를 모르는 연습생들은 빛나는 눈으로 PD를 바라보았다.
“우선 앞으로 3개월간 함께할 옆 사람을 알아 가는 시간을 가져야겠죠? 가벼운 레크리에이션으로 첫 촬영을 시작하겠습니다!”
당연히 프로그램 주제곡 공개와 연습으로 합숙을 시작하리라 기대하던 연습생들 사이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이미 미래에서 주제곡의 춤도 노래도 실컷 보고 듣고 온 예찬은 시큰둥했다.
‘레크리에이션을 이때 찍은 거군.’
프로그램이 끝나 갈 즘에 풀버전도 아니라 부분부분 짤막한 영상들만 비하인드로 풀렸던 게 설핏 기억났다.
예찬은 모니터링하기 위해 봤던 터라 그냥 이런 것도 했었군, 하고 쓱 넘어갔지만 팬덤은 활화산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 ㅋㅋㅋ이걸 이 시점에 공개하는 제작진 인성ㅋㅋㅋㅋㅋ
- 애들 중 이미 반은 집에 갔는데 왜 보여 줌? 나 빡쳐 보라고?
- 하 태랑이 왜 이렇게 해맑아ㅠㅠㅠ 누나가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아내ㅠㅠㅠㅠㅠ
“레크리에이션에는 당연히 경품이 있어야겠죠? 종목은 총 5가지! 우승한 팀에게는 이번 합숙 동안 사용할 수 있는 매점 자유 이용권을 드립니다!”
그게 경품?
‘매점을 왜 가?’
일이 아니면 6시 이후로 물 말고는 아무것도 입에 넣지 않는 예찬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와. 대박!”
“매점! 매점! 매점!”
“얼마까지 쓸 수 있어요?!”
물론 대다수의 연습생은 예찬과 달리 환호했다.
“지금 연습생들이 99명이라 홀수죠? 그래서 일일 MC를 맡아 줄 연습생을 지원받겠습니다. 내가 해 보겠다 하는 연습생, 손!”
“저여!”
PD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보라색 옷을 입은 D등급 연습생이 잽싸게 손을 들어 올렸다.
“좋습니다. 기태랑 연습생, 여기 마이크랑 큐 카드 받으세요.”
“넵!”
기세 좋게 앞으로 달려 나간 기태랑이 이내 연습생들을 향해 명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여, 오늘 일일 MC를 맡은 기태랑입니다! 모두 소리 질러!”
‘저건 큐 카드에 없었을 거 같은데.’
예찬은 함성을 지르면서 생각했다.
“그럼 빠르게 시작해 볼까여? 첫 번째 게임은 바로바로 사랑의 신문지 게임!”
유치하고 노골적인 게임 이름에 연습생들이 우우, 하고 야유하는 소리를 냈다.
“여러분, 사랑이 어디 연애 감정만 있습니까? 내 가족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고, 내 팬을 사랑하고, 또 옆의 연습생도 사랑하고 하는 거져!”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 내는 기태랑은 물 만난 고기 같았다.
‘큐 카드를 안 보고 있는 걸 보면 애드리브인 거 같은데.’
힐끗 제작진 쪽을 보니 상당히 흐뭇한 얼굴로 기태랑을 보고 있었다.
지금까진 제작진에게 잘 보인 거 같은데 어쩌다 방송 분량이 그렇게 형편없어졌는지 미래를 보고 온 예찬은 의아해졌다.
“사랑의 신문지 게임은 2인 1조로 진행될 건데여. 조는 같은 등급끼리 뽑기로 뽑겠습니다! 자, 등급별로 한 줄 서기 시~ 작!”
S등급은 최종 데뷔 인원과 같은 총 9명.
짝이 될 가능성이 있는 건 8명이나 됐기에 예찬은 우휘겸과 짝이 될 거라는 걱정은 딱히 하지 않고 있었다.
“뽑은 그림이 같은 사람끼리 짝이에여! 다들 짝은 찾으셨져?”
“…….”
“…….”
뭐 걱정했어도 변하는 건 없었을 테니 걱정 안 하길 잘했다고 치자.
곰돌이 그림이 그려진 쪽지를 들고 있는 우휘겸과 나란히 선 예찬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우휘겸 하차하고 공개되는 거라서 100퍼센트 편집되겠군. 적당히 하다 떨어지자.’
마음 같아선 어차피 방송에 안 나올 거 당장 기권하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어느 정도 성실한 모습을 보여 줘야 했다.
우휘겸과 예찬이 친하다고 묶을 증거 영상으로 쓰이진 않을 것이란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 왜 형이랑 하는데요!”
“의탁이 네가 나랑 똑같은 걸 뽑았으니까?”
“형이 나랑 똑같은 걸 뽑은 거죠!”
옆에서는 노란 티셔츠를 입은 루벨 엔터의 정의탁이 범세혁에게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범세혁에겐 전혀 타격이 없는 없는 것 같지만.
S등급 인원이 홀수다 보니 한 명은 다른 등급과 짝을 지어야 했다. 그렇게 짝꿍이 된 게 하필 같은 소속사인 범세혁과 정의탁이라니.
직접 뽑기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조작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 이제 시작합니다! 먼저 신문지 한 장~!”
예찬과 우휘겸이 멀뚱히 신문지 위에 섰다.
둘이 서 있기 충분한 넓이라 떨어지는 연습생은 아무도 없었다.
“전원 통과입니다! 이제 신문지를 한 번 접어 주세여!”
“악!”
기태랑의 말에 본능적으로 몸을 숙인 예찬과 우휘겸의 머리가 부딪쳤다.
예찬은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다.
‘돌대가리 새끼!’
“괜찮아?”
말을 놓기로 한 적은 없었지만 우휘겸이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니 예찬도 편하게 말하기로 했다.
“어, 괜찮아. 너는 안 아파?”
“난 돌머리라.”
“응, 그런 거 같더라.”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을 돌머리라 칭하는 우휘겸이 더없이 진지해 보여서 어이가 없었다.
“신문지는 내가 접을게.”
“그래, 난 환자니까 너한테 맡길게.”
돌대가리와 부딪힌 머리가 정신을 못 차렸는지 어질어질했다.
예찬은 그냥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겼다.
“둘 다 발을 올리는 건 안 되겠다. 내 발을 밟아 봐.”
“응, 그래.”
어느새 조막만 해진 신문지 위에서 예찬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래도…… 되냐……?’
아무리 방송을 안 탄다고 해도, 남들이 보기에 너무 친해 보이면 안 되지 않을까?
지금 얘랑 나 완전 절친같이 보이지 않나?
“시간 끝! 신문지를 한 번 더 접어 주세여!”
기태랑의 말에 남아 있는 연습생들이 순식간에 떨어졌다.
우휘겸도 발등 위에 올라가 있던 예찬을 안전히 땅에 내려놓고 신문지를 한 번 더 반듯하게 접었다.
초연한 얼굴을 하고서는 승부욕이 대단한 놈이었다.
“아, 형! 신문지 비뚤어졌잖아요!”
“그런가?”
“쫌 절로 비켜 봐요! 내가 할게요!”
처음부터 삐걱대길래 금방 떨어지리라 예상했던 루벨 엔터 팀이 예상외로 악착같이 살아남아 옥신각신했다.
저 팀은 지난 라운드에서 범세혁이 정의탁을 업고 있었다.
이번 라운드에서는 예찬과 우휘겸도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들어 올려야 할 것 같았다.
“자, 올라가 주세여!”
신문지를 만족스럽게 접은 우휘겸이 예찬을 향해 팔을 벌리며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예찬의 눈앞에 홀로그램 창이 튀어 올랐다.
<연계 퀘스트 발생!>
― 우휘겸을 목말 태우고 사랑의 신문지 게임에서 1등을 차지하세요!
응, 어쩐지 네가 오늘 조용하다 했다.
예찬은 손바닥을 세워 다가오는 우휘겸을 막았다.
그리고 그 앞에 말없이 한쪽 무릎을 세워 앉았다.
“……타라.”
“응?”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예찬은 엄지를 세워 자기 어깨를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타라.”
“저, 목말을 할 거면 내가 더 키가 크니까 내가…….”
“내가.”
“…….”
“태운다.”
단호한 예찬의 태도에 반항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우휘겸은 두말없이 예찬의 어깨에 올라갔다.
“악, 엉덩이 쪼개지겠어요!”
“의탁아, 엉덩이는 원래 쪼개져 있어.”
얼마 남지 않은 연습생들이 줄지어 탈락하는 와중에 예찬은 마치 동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라운드.
한 발로 까치발을 한 채 188cm의 건장한 청년을 어깨에 태우고 늠름하게 버틴 예찬은 이견 없이 우승을 거머쥐었다.
“와, 진짜 독하다.”
“저건 인정해야지.”
“……왜 저렇게까지 하지?”
연습생들의 수군거림과 박수 소리가 어쩐지 아득하게 들렸다.
<퀘스트 성공!>
<축하합니다! 연계 퀘스트를 훌륭하게 완수한 당신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1 포인트가 추가됐어요!>
<레벨 업!>
<축하합니다! 레벨 업을 한 당신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1 포인트가 추가됐어요!>
홀로그램 창도 예찬의 승리를 축하했다.
‘언젠가 죽인다. 어떻게든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예찬은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바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홀로그램 창을 향한 살의를 갈고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