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18화
처음 5조가 쓰여 있는 종이를 뽑았을 때 예찬은 시작이 좋다고 생각했다.
보컬 5조만 인원이 가장 적은 6명이었기 때문에 파트 분배가 그나마 고르게 된 편이었다.
물론 예찬의 바로 다음 순서로 우휘겸이 5조를 뽑는 순간 그 생각은 깔끔히 날아갔다.
‘이렇게 자꾸 붙는 게 말이 돼?’
우휘겸도 예찬과 한 조가 된 게 반갑지 않은지 눈이 마주치자 무표정한 얼굴에 한 겹 그늘이 드리워졌다
“어, 나도 5조네.”
또 다른 S등급 보컬 연습생인 박나길마저 5조를 뽑는 순간 예찬은 개인 최다 득표는 과감히 포기하기로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전체 조 중 최다 득표를 받아 8만 표를 얻는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보컬 S등급 연습생이 전부 한 조에 모였는데 그걸 못 해내면 분명 뒷말이 나올 것이었다.
나머지 팀원 셋 중에는 루벨 엔터의 정의탁이 있었다.
“예찬아, 우리 의탁이 잘 부탁해.”
“아, 그런 거 하지 마요!”
예찬의 뒤로 다가온 범세혁이 장난스럽게 부탁하자 정의탁이 질색하며 범세혁을 쫓아냈다.
‘우휘겸에 정의탁이라…….’
영 마뜩잖은 팀이지만 예찬은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 관리를 하며 같은 팀이 된 연습생들의 짧은 자기소개를 경청했다.
“그럼 내가 나이가 가장 많으니 일단 리더를 맡을게.”
스물두 살 박나길의 말에 예찬을 포함한 연습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찬이 기억하는 한에선 우휘겸을 제외하면 특별히 문제를 일으킨 연습생은 없었다.
‘정의탁은 좀 신경 쓰이지만 막상 뭐가 있진 않았단 말이지.’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정의탁은 딱히 노안은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나이보다 묘하게 삭아 보여서 미성년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범세혁에게 땍땍거릴 때는 그나마 제 나이로 보였지만,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쉽게 말을 걸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예찬은 조금 시선을 움직여 그 옆에 마찬가지로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우휘겸을 바라보았다.
겉모습만 봐서는 도무지 협조적일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었지만 예찬은 미리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저렇게 생겨 먹었어도 할 땐 하는 거 같으니 문제는 없겠지.’
그 사이 단상에 올라간 박나길이 곡을 뽑았다.
[보컬 5조가 뽑은 곡은 유피테르의 ‘Erased’입니다!]
보조 MC의 말과 동시에 단상에 설치된 스크린에 곡명과 조원들의 이름이 표시되었다.
예찬은 만족스러운 결과에 뽑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박나길을 향해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Erased’는 유피테르가 최정상에 있었던 4년 전 정규 3집의 더블 타이틀 중 하나로, 퍼포먼스적으로 뛰어난 곡이었다.
‘게다가 이 곡이 제일 어레인지하기에도 좋지.’
다행히 C등급인 김주영을 제외하면 다들 어느 정도 춤 실력도 갖추고 있어서 괜찮은 무대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찬은 벌써부터 설레는 마음에 제동을 걸었다.
“얘들아, 포지션도 뽑기로 뽑아야 한대. 휘겸이부터 뽑자.”
보조 MC에게 뽑기 통을 받아온 박나길이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우휘겸에게 통을 내밀었다.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인 우휘겸이 이내 통 속에 손을 넣어 쪽지를 꺼냈다.
“휘겸이가 보컬 2네. 다음은 수영이.”
박나길의 지시에 따라 조원들이 서 있는 순서대로 차례차례 쪽지를 뽑았다.
“예찬이가 메보네. 잘 부탁한다?”
박나길이 쪽지를 손에 든 예찬의 어깨를 툭 아프지 않게 두드리고 옆 사람에게 넘어갔다.
예찬은 말없이 자신이 뽑은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메인 보컬]
다시 보아도 네 글자가 선명했다.
‘운이…… 좋은데?’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보컬 5를 맡으면 어떻게 할지 각오하고 있었는데 예상외의 선전이었다.
어느 포지션을 맡아도 당연히 햇병아리들에게 질 생각은 없었지만, 이걸로 예찬이 원하는 판이 전부 깔렸다.
무엇보다 보컬 포지션들 사이에서 메인 보컬을 맡는다는 상징성은 절대 작지 않았다.
“포지션별 파트 분배는 연습실에 가면 전해 준다고 하시니까 이동하자.”
조원들이 뽑기를 마치자 박나길이 말했다.
지정된 연습실로 이동하자 같이 연습실을 쓰는 댄스 5조가 파트를 확인하고 있었다.
제법 익숙해진 범세혁의 뒤통수가 보였는데, 악보에 집중하고 있는지 예찬과 조원들이 들어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연습실 벽 쪽에 놓인 테이블에 보컬 5조의 악보가 준비되어 있었다.
맨 앞장에 조원들의 이름과 파트까지 야무지게 적힌 채였다.
보컬 5조 – Erased (JUPITER)
메인 보컬 – 하예찬
보컬 1 - 박나길
보컬 2 - 우휘겸
보컬 3 - 정의탁
보컬 4 - 김주영
보컬 5 – 김수영
예찬은 건네받은 악보를 빠르게 넘겨 파트를 확인했다.
원곡자인 유피테르가 4인조 그룹이다 보니 메인 보컬 파트 일부를 다른 조원들과 나누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온전히 예찬의 파트로 남아 있었다.
‘오히려 보컬 1이랑 보컬 2가 손해를 봤군.’
보컬 5를 제외하고 나머지 넷의 비중은 비슷했다.
슬쩍 보컬 5를 맡은 김수영을 살피자 신경질적으로 악보를 넘기고 있었다.
‘열여덟이라지만 표정 관리가 너무 안 되네.’
그 옆의 동갑내기 정의탁은 그러고 있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자기 파트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보컬 4를 맡은 김주영만이 슬금슬금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는 김수영의 눈치를 살폈다.
“센터는 포지션과 상관없이 각 조에서 알아서 정하라고 쓰여 있는데, 하고 싶은 사람 있어? 일단 나는 하고 싶어.”
박나길의 말에 다른 조원들도 하나둘 손을 들었다.
예찬은 비어 있는 센터 파트를 힐끔 보고 말했다.
“일단 한번 연습해 본 뒤에 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럴까? 다들 이 곡은 알고 있지?”
묘한 텀을 두고 박나길이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저 자식, 내가 토 달았다고 빈정 상했네.’
가끔 자기가 한 말에 다른 대안을 제시하면 더 나은가 아닌가와 관계없이 기분 나빠하는 이상한 놈들이 있는 건 알았다.
그래도 이렇게 별거 아닌 일에 기분 나쁜 티를 내는 놈을 보니 신선했다.
“그럼 시작한다.”
박나길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제작진이 준비해 둔 반주를 틀었다.
가볍게 안무를 맞추며 각자 파트를 불러 보자 예찬은 확신이 섰다.
‘이 곡은 메인 보컬이 센터를 할 수 없어.’
여러모로 동선을 짜 봤지만 예찬이 메인 보컬 파트를 소화하고 센터까지 맡으면 그림이 예쁘게 나오지 않았다.
욕심을 부려도 되는 부분이 있고 버려야 하는 부분이 있다.
지금은 명백히 후자였다.
‘그럼 누굴 밀어야 하나.’
훗날 이 멤버들과 같이 데뷔할 수도 있다는 걸 고려했을 때, 상위권에서 밀려나는 일이 거의 없던 연습생을 밀어주는 게 제일 무난한 선택이었다.
가볍게 숨을 고른 박나길이 조원들을 돌아봤다.
“그럼 센터를 정하자.”
이제 됐냐고 말하는 듯 도전적인 시선이 예찬에게 진득하게 머무는 것이 좀 전에 앙금이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예찬이 박나길을 센터로 지지한다면 사르르 풀릴 만큼 같잖은 앙금이겠지만 말이다.
예찬은 눈앞의 거울을 통해 숨을 고르고 있는 조원들의 얼굴을 차례로 살폈다.
그리고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센터 하고 싶은 사람?”
박나길의 말에 예찬이 손을 들었다.
박나길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예찬이는 메보 하면서 센터까지 하는 건 힘들지 않겠어?”
돌려 말하고 있지만 메인 보컬이 센터까지 욕심내냐고 따지는 거였다.
예찬은 이런 짜증 따윈 아무렇지 않다는 듯 카메라를 의식하며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네, 그건 동선이 안 나올 거 같고요.”
잠깐 말을 끊은 예찬이 왼편에 서 있는 정의탁을 가리키며 당당히 말했다.
“전 의탁이가 하면 좋을 거 같아요.”
“저요?”
응, 너요.
예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의탁이 눈동자가 미심쩍다는 듯 파르르 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예찬은 태연하게 생각했다.
‘박나길로 가면 편하겠지만, 무대의 완성도로 봤을 땐 정의탁이 더 나은 선택지란 말이지.’
S등급인 만큼 박나길의 실력은 분명 연습생들 중 상위권이었다.
그러나 뭐든 평균이라는 느낌이지 노래도 춤도 눈에 띄게 돋보이는 곳은 없었다.
오히려 B등급인 정의탁이 비주얼을 포함해 전반적인 부분이 박나길을 웃돌았다.
부족한 부분은 다른 멤버들의 장점으로 덮으면 될 일이었다.
‘팬들은 무난한 무대가 아니라 특별한 무대를 기대하니까.’
무난한 무대와 완성도 있는 무대 중에 선택하라고 하면 당연히 완성도 있는 무대였다.
떨떠름한 얼굴로 예찬을 바라보던 박나길이 정의탁에게 물었다.
“그래? 그럼 의탁이는? 의탁이도 센터하고 싶어?”
“전…….”
말을 고르던 정의탁이 떨어진 곳에서 연습 중인 댄스 조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잠깐 범세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의탁이 입을 열었다.
“저는 하고 싶어요.”
예찬의 계획대로였다.
정의탁의 말에 박나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나랑 의탁이 말고 또 센터 지원하는 사람 있어?”
파트에 불만이 많던 김수영이 팔을 번쩍 들었다.
“휘겸이랑 주영이는 괜찮아?”
“네.”
“어, 저도 괜찮아요.”
정말로 센터 자리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우휘겸과 달리 김주영은 누군가 떠밀어 줬으면 좋겠다는 듯 우물쭈물했다.
“그럼 휘겸이랑 주영이는 누가 센터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모든 조원의 시선이 우휘겸과 김주영에게 집중되었다.
“어, 저는 수영이가 하는 게 괜찮을 거 같은데…… 파트도 너무 적었고…….”
“주영아, 센터는 파트랑 별개로 생각해야지. 누가 센터를 해야 우리 조가 더 좋은 무대를 꾸밀지로 결정해야 하지 않겠어?”
박나길이 짐짓 엄한 얼굴로 김주영을 꾸짖었다.
“어, 그, 그런가요?”
순식간에 기가 죽은 김주영이 박나길의 눈치를 보고 있자 김수영이 발끈했다.
“제가 센터에 서면 무대가 별로일 거란 뜻이에요?”
“그런 말이 아니야. 주영이가 파트만 생각해서 정했다는 것처럼 말을 하니까 얘기한 거지.”
박나길이 차분하게 달랬지만 역효과였다. 김수영의 눈빛이 더욱 표독스러워졌다.
“그래요? 근데 아까 예찬이 형보고는 메보랑 센터 같이하려면 힘들 거 같다면서요. 형도 보컬 1이라 분량도 많은데 센터까지 하기 힘들지 않겠어요?”
예찬은 턱 끝까지 차오른 한숨을 간신히 삼켰다.
이렇게 대놓고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연습생 때나 할 수 있는 짓이었다.
문득 회귀를 반복하며 데뷔 초의 리스피릿을 어르고 달랠 때의 기억이 떠올라 애잔해졌다.
노골적인 비아냥에 박나길의 얼굴에도 미쳐 다 숨기지 못한 불쾌함이 배어 나왔다.
“메인 보컬 빼곤 솔직히 다들 비중이 비슷하지 않나? 난 그렇게 느꼈는데.”
“그런가요? 보컬 5는 파트가 너무 없어서 그거 보고 놀라느라 다른 사람들 파트가 몇 마디인지는 제가 못 세 봤네요.”
예찬은 슬며시 주위를 둘러봤다.
숨죽이고 이쪽을 찍고 있는 카메라맨들이 속으로 얼마나 신이 났을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어그로 제대로 끌리겠군.’
이대로 이 생산성 없는 싸움을 계속하게 둘 순 없었다.
“우휘겸.”
갑작스레 예찬에게 이름이 불린 우휘겸이 눈에 띄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너는 누가 센터에 어울릴 거 같아?”
그 말에 모두가 멈칫했다.
예찬의 말대로 김수영과 박나길이 서로 주먹을 주고받든 말든 결정권을 가진 건 우휘겸이었다.
예찬이 우휘겸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도 입을 다물고 우휘겸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이내 우휘겸의 얇은 입술이 움직였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