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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31화 (32/224)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31화

츄즈 마이 프린스 99 팬 사인회가 있을 거란 소식이 알음알음 돌았을 때, 회사원 박모 씨는 가슴 속에 품고 다니던 사직서를 드디어 낼 때가 되었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앞으로 애들 스케줄이 더 빡세질 텐데 각 잡고 쫓아다니려면 퇴사밖에 없겠지?’

입덕 전부터 잡혀 있던 빌어먹을 출장 때문에 기념비적인 첫 경연을 놓쳤다.

스포일러만 찾아보며 피눈물을 흘렸던 경험을 두 번 하고 싶지는 않았다.

4회까지 방영된 지금 츄마프는 아이돌 판의 대세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아직까진 그냥 심심풀이 땅콩으로 보는 거라며 선을 긋는 덕후들도 많았지만, 박모 씨가 보기에 그중 절반 이상은 순위 발표식이 방영되면 과몰입하며 달릴 게 분명했다.

박모 씨는 마침 SNS 타임라인에 주르륵 뜨는 익숙한 닉네임들을 보며 혀를 찼다.

- 자고 일어났는데 아직도 열받네 애들 떨어진 것도 속상할 텐데 그 큰 캐리어까지 끌고 집에 가게 하는 거 진짜 미친 거 같고요

- 내 새끼가 합숙하려고 야무지게 짐 챙겨 갔다가 그거 고대로 가지고 집에 가서 캐리어에서 꺼낼 거 생각하면 맴찢이에요 이런 생각한 놈 진짜 찢어 버려

- 이번에 사인회 한다는 것도 어이없음 5화 방영 전에 한다는 거 같은데 그럼 떨어진 애들 빼고 해서 지들이 스포하겠다는 거임? 만약 떨어진 애들도 데려와서 하면...... 이게 바로 현대식 부관참시다

- 사인회 보이콧합니다

며칠 전 방송국 근처에서 연습생들이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걸 봤다는 목격담이 있었던 후로 각종 커뮤니티와 SNS들은 시시때때로 불타고 있었다.

정황상 아무래도 순위 발표식 이후 탈락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것 같다는 추측이 제기된 것이었다.

제작진이 해도 해도 너무하다며 이번 사인회를 보이콧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었지만, 떨어졌을 리 없는 인기 연습생들의 팬들이 동조하지 않다 보니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묻혔다.

‘빨리 사인회 가서 얼굴이나 보고 싶다.’

4회까지 방송을 보고 난 박모 씨는 어느새 자신의 최애가 돼 있는 예찬을 자기 손으로 직접 찍고 싶어서 근질근질했다.

띠링.

때마침 울린 알림음에 박모 씨는 빠르게 공식 SNS에 접속했다. 츄마프 공식 계정 외엔 무음 설정을 해 둔 상태였기 때문에 망설임이 없었다.

[츄즈 마이 프린스 99 게릴라 사인회 안내]

‘떴다!’

박모 씨는 빠르게 게시글을 확인했다.

날짜가 오늘이었다.

제작진 일하는 꼬락서니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휴일이니 그나마 당장 갈 수 있어 봐주기로 했다.

이제 장소만 확인하면 된다.

이후는 누가 더 빠르게 준비해서 도착하느냐의 싸움이었다.

나머지 공지를 눈으로 훑던 박모 씨는 곧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다섯 군데라고?”

*   *   *

“오늘 사인회는 미리 공지한 것처럼 게릴라로 진행되고요, 사인회 시작 세 시간 전에 공식 홈페이지와 SNS로 홍보를 할 겁니다. 스포일러 조심해 주세요!”

메인 PD의 말이 끝나자 대기하고 있던 작가들이 연습생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1차 경연 1조는 이쪽으로 모일게요!”

“3조, 다 있으신 거 맞죠?”

“보컬 4조, 랩 4조, 댄스 4조! 이쪽입니다!”

우휘겸과 배새벽을 챙긴 예찬은 바쁘게 흩어지는 연습생들 사이를 헤치고 5조를 찾는 김상희 작가에게 다가갔다.

“아!”

예찬을 보고 순간 반가운 티를 낸 김상희 작가가 금방 표정을 가다듬고 말을 시작했다.

“보컬 5조 하예찬 연습생, 우휘겸 연습생, 댄스 5조 배새벽 연습생 체크했고요. 버스에 타시면 됩니다.”

작가의 지시대로 버스에 오르니 앞좌석에 정의탁이 앉아 있었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있는 모습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왔어요?”

예찬이 옆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정의탁이 고개만 슬쩍 돌리고 아는 척을 했다.

“응, 어제 연습을 어떻게 했길래 하루 사이에 이렇게 낡았어?”

“낡았다니……! 하, 아니에요.”

잠깐 발끈했던 정의탁은 화낼 기운도 없다는 듯 눈을 감았다.

‘심상록은 연습 때 심하게 몰아가는 타입이 아닌데…… 아.’

정의탁과 같은 조인 연습생들을 떠올리자 짚이는 얼굴이 있었다.

‘선우이경이군.’

맑은 눈의 광인이라 불렸던 선우이경을 떠올리자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정의탁도 연습량이 남보다 많은 편인데 그 정의탁의 진을 이렇게 쪽 빼놓다니. 아무래도 방송으로 본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와, 우리 차는 뭔가 텅 비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앞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막 버스에 오른 범세혁이 생글생글 웃으며 차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음, 그러고 보니 랩은 5조가 없으니 우리가 수가 제일 적겠구나. 팬들이 화내면 어쩌지?”

“에이, 설마요. 여기 1, 2위가 다 있는데.”

“인원수는 그렇다 쳐도 무대가 하나 비는 건 좀 크지 않나?”

이곳저곳에서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전부 일리 있는 말이었다.

이번 게릴라 팬 사인회는 강남과 명동, 상암, 홍대, 그리고 영등포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사인회는 츄마프의 주제곡인 ‘Choose your prince’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후 선착순 100명의 팬에게 사인을 해 주고, 각 조의 경연 무대를 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연습생 숫자가 다른 조보다 부족한 것은 상위권 연습생이 많으니 크게 불만이 나오지 않겠지만, 무대가 다른 조보다 하나 더 적은 것은 충분히 아쉬울 만했다.

‘사인을 못 받고 뒤에서 구경만 한 사람들은 더 그렇고.’

무엇보다 예찬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껏 나를 보러 왔는데 어떤 면으로든 꽝이란 생각이 들게 하고 싶지 않아.’

거기까지 생각한 예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습생들의 이목을 끌었다.

“잠깐 제 얘기 좀 들어 주세요.”

익숙한 얼굴들이 예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댄스 5조도 베네핏 덕분인지 1차 순위 발표식에서 떨어진 연습생이 없었다.

덕분에 열세 명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예찬은 씨익 웃었다.

“우리 무대 하나만 같이 꾸며 봅시다.”

*   *   *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일곱 번째로 줄을 선 박모 씨는 초조하게 목에 건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하, 여기 아니면 어떡하지.’

선착순이란 말에 일단 가장 가까운 곳으로 달려왔지만 불안한 마음에 자꾸 커뮤니티와 SNS를 새로 고침하고 있었다.

‘제발 다른 위치에 예찬이 말고 딴 애들 왔다는 후기 좀 떠라…….’

그때 장내가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입구 쪽에서부터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악!”

“하예찬!”

“휘겸아아악!”

반가운 이름을 외치는 소리에 박모 씨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선착순 백 명은 무대 앞에 준비해 둔 의자에 앉혀 둬서 연습생들 쪽으로 달려가진 못하고 목만 쭉 뺀 채 뒤편을 살폈다.

인파 사이로 예찬의 눈부신 얼굴이 언뜻언뜻 보였다.

‘예찬이 말고 휘겸이랑 의탁이도 있네. 1차 경연 조로 나눴구나!’

박모 씨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1차 경연 무대와 비슷한 옷을 입고 온 걸 보니 사인과 가벼운 토크로 끝내지 않고 무대도 보여 줄 예정인 것 같았다.

“아아악! 범세혁! 악! 얼굴 미쳤다!”

보컬 5조의 뒤를 이어 다른 연습생들이 입장했는지 뒤쪽이 한 번 더 크게 술렁거렸다.

범세혁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짖는 팬의 목소리에 박모 씨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찬이 있다는 것만으로 오늘의 모험은 이미 성공이었지만 범세혁까지 있다니!

이 영등포가 객관적으로도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 분명했다.

경호원의 에스코트를 받아 무대 위로 올라간 연습생들은 별다른 인사 없이 삼각 대형으로 자리를 잡고 뒤를 보고 섰다.

벌써부터 주위에서 입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미친, 이거 츄유프잖아?’

박모 씨가 심장을 부여잡기 무섭게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삼각형 대열의 가장 앞부분에 서 있던 예찬이 먼저 뒤돌아보면서 시작으로 노래가 시작되었다.

[Choose your prince. 네가 선택하는 세계, 그 끝에 내가 있기를.]

‘하예찬 첫 센터!’

카메라. 당장 카메라가 필요했다. 박모 씨는 희열로 손을 부들부들 떨며 셔터를 눌렀다.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왜 예찬이가 센터지? 혹시 순발식에서 1위 했나?’

바로 코앞에서 춤을 추는 예찬이 너무 완벽해서 추측에 신빙성을 더했다.

‘저렇게 잘하고 저렇게 잘생기고 저렇게 완벽한데 1등을 안 하는 게 이상하지! 응? 잠깐…….’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미친 듯이 셔터를 누르던 박모 씨의 손이 일순 멈췄다.

예찬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

뷰파인더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예찬의 눈이 반으로 접혔다.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는 본능이 박모 씨의 손을 움직였다.

찰칵!

*   *   *

[하나, 둘, 셋. 안녕하세요, 츄즈 마이 프린스 99 보컬 5조.]

[댄스 5조입니다.]

각 조의 리더였던 박나길과 공두찬의 선창에 이어 연습생들이 입을 모아 인사를 했다.

예찬은 주머니에 넣어 뒀던 티슈로 살짝 배어 나온 땀을 닦았다.

‘너무 열심히 했나.’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팬들을 보면 ‘적당히’라는 선택지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예찬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팬들과 눈을 마주치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좋은 게 좋은 거로 생각하기로 했다.

[보컬 5조 리더 박나길입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너무 기뻐요!]

[안녕하세요, 보컬 5조 김수영입니다! 앞으로 많이 사랑해 주세요!]

왼쪽에 선 순서대로 연습생들이 인사를 시작했다. 예찬은 간만에 떠오른 선택지를 무심한 눈으로 훑었다.

<선택지 발생!>

새 인생의 첫 팬 사인회! 팬들에게 인상 깊은 첫인사를 남겨 볼까요?

― 공주님들의 왕자가 되고 싶은 하예찬입니다♡

― 아니, 분명 공주님들이 오셨다고 들었는데 왜 빛밖에 없지? 아, 눈부셔.

― 예찬이를 왕자로 만들 수 있는 건 오직 공주님들의 사랑뿐! 하트 뿅뿅♡

‘다 나쁘지 않은데?’

리스피릿 시절에는 상상도 못 했던 새로운 계열의 대사들이었지만 내성이 생긴 건지 세 가지 전부 무난하다 못해 괜찮아 보였다.

[보컬 5조 우휘겸입니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짧게 인사를 끝낸 우휘겸에게 마이크를 건네받은 예찬은 여유만만하게 선택지를 읊었다.

[안녕하세요. 보컬 5조, 공주님들의 왕자가 되고 싶은 하예찬입니다. 하트 뿅♡]

당당하게 대사를 읊은 예찬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눈에 익은 카메라 렌즈를 향해 가볍게 윙크를 날렸다.

객석에서 비명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카메라 셔터 소리가 빠르게 쏟아졌다.

예찬의 오른쪽에 서 있던 정의탁은 마이크를 받으며 조용히 엄지를 들어 올렸다.

‘이 정도를 가지고 뭘.’

남은 선택지의 대사도 꽤 마음에 들었던 터라 잠시 후 있을 토킹 시간에 야무지게 써먹을 예정이었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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