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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35화 (36/224)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35화

‘말도 안 되는 루머로 매장된 사람을 하나둘 본 것도 아니면서, 눈앞의 우휘겸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정보만 믿었어.’

과거의 우휘겸이 아무 변명 없이 하차했기 때문에 예찬으로선 당연히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빚은 받은 것도 진 것도 두 배로 갚는 것이 인지상정.

예찬이 결연한 눈으로 우휘겸을 올려다보았다.

“일단 지금 얘기는 아무한테도 하지 말고, 혹시 네가 학폭러다 뭐라 얘기가 나와도 절대로 하차한다고 하지 마.”

“하지만…….”

호구한테 너 지금 호구 짓 한다고 알려 줘 봤자 못 고친다.

예찬은 접근 방향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네가 한 행동은 다른 친구를 위해서였잖아. 그런데 그걸 학폭이라고 인정하고 물러나는 건 좀 아니지. 그 친구가 알게 되면 과연 기분이 좋을까?”

“아.”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다고 얼굴에 투명하게 쓰여 있었다.

‘이렇게 알기 쉬운 놈인데!’

편견이란 콩깍지를 벗어낸 예찬은 탄식했다.

“그리고 지금 널 응원하고 있는 팬분들 생각도 해야지. 네가 그냥 하차하면 그분들은 자기가 학폭 가해자를 응원했다고 생각할 텐데 얼마나 실망스럽겠어?”

우휘겸이 입술을 꽉 깨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휴, 됐다.’

어떻게든 설득이 된 모양이었다.

예찬은 속으로 한숨을 돌렸다.

‘우휘겸이 학폭러라고 첫 제보가 뜨는 게 분명 이번 합숙 끝나고 6회가 방영될 즈음이지.’

속으로 날짜를 헤아려 본 예찬이 말을 이었다.

“정찬양 새…… 선배님 입에서까지 이런 말이 흘러 흘러 왔으니, 가만히 두면 정말 그런 썰이 돌긴 할 거야. 일단 이번 합숙이 끝나면 네가 다녔던 학교에 같이 가 보자.”

“같이 가 주려고?”

깜짝 놀란 우휘겸은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예찬은 눈을 가늘게 뜨고 대꾸했다.

“당연히 같이 가야지. 네가 혼자 가서 뭘 할 수 있겠어?”

“……고마워.”

우휘겸이 잠깐 고민하다가 얌전히 감사 인사를 했다.

자기 객관화가 잘되어 있는 놈이었다.

예찬은 상황을 정리하기로 했다.

“우휘겸.”

비장한 목소리로 우휘겸을 부른 예찬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응?”

“너한테 직접 물어 보지 않고 남의 얘기를 믿어서 미안하다. 지금까지 내 태도에 섭섭했을 텐데, 그건 차차 갚을게.”

낯간지러운 말을 재빠르게 쏟아낸 예찬은 우휘겸이 뭐라고 답할 새도 없이 그를 떠밀었다.

“다들 기다리겠다. 얼른 돌아가자.”

*   *   *

다음날은 츄마프 5회 방영일이었다.

연습생들은 본방송 한 시간 전에 강당에 모여 앉았다.

5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첫 번째 순위 발표식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지난 합숙에서 방송을 모니터링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줄줄이 이어진 탈락자들의 순위 발표가 끝나고 나서야 무거웠던 공기가 그나마 가벼워졌다.

‘베네핏을 받은 연습생은 베네핏이 몇 표인지도 체크해 주는군.’

촬영 당일에는 집계된 표의 수는 알려 주지 않고 순위만을 발표했었다.

방송에서는 득표수를 자막으로 안내해 주고 있어서 예찬은 자막에 집중하며 방송을 시청했다.

중위권은 표 차가 크게 나지 않아서인지 베네핏이 제법 유효하게 작용했다.

‘응?’

1위인 범세혁의 득표수가 공개되고 뒤이어 자동으로 2위가 된 예찬의 득표수가 공개되었을 때, 연습생들 사이에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두 사람의 베네핏 차이는 총 5만 표.

그리고 두 사람의 전체 득표 수 차이는 4만 9천 표였다.

‘베네핏이 없었으면, 내가 위였다!’

예찬은 저도 모르게 범세혁 쪽을 바라보았다.

같은 마음이었는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먼저 미소 지은 것은 범세혁이었다.

지금까지 봐 온 범세혁의 얼굴 중 가장 호전적인 얼굴이었다.

예찬은 말없이 마주 미소 지었다.

‘그래, 베네핏도 정당한 실력으로 얻어낸 결과물이지. 너의 승리를 부정하지 않겠어. 그리고 이번 경연은 정당하게 내가 이긴다.’

예찬의 마음이 호기롭게 일렁거렸다.

5회 방송이 끝나고 예고편에는 모자이크 처리가 된 정찬양이 예찬과 우휘겸을 절친이라 묶는 장면이 지나갔다.

아마 리스피릿 팬들을 낚기 위해 만든 예고인 것 같은데, 우휘겸의 학폭 의혹이 루머임을 알게 된 지금으로선 전혀 타격이 없었다.

예찬이 제대로 울음보가 터진 기태랑을 달래 방으로 막 돌아왔을 때였다.

“예, 예찬아!”

허옇게 질린 남지유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직도 코를 훌쩍거리는 기태랑에게 휴지를 쥐여 주던 예찬이 돌아보자 남지유는 기세 좋게 들어온 것과 다르게 우물쭈물했다.

“형, 이것 좀 읽어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남지유와 같이 옆방을 쓰는 배새벽이 남지유의 뒤에서 쓱 튀어나와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불길한 예감이 예찬의 등줄기를 쓸고 지나갔다.

[츄즈 마이 프린스 99의 우휘겸에 대해 폭로합니다.]

‘미친.’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온 익숙한 제목의 글에 예찬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왜 지금 올라와?’

[안녕하세요, 저는 츄즈 마이 프린스 99에 참여한 우휘겸 연습생의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저희 반으로 전학을 온 우휘겸은 키도 크고 잘생겨서 전학 온 첫날부터 유명했습니다.

다른 반 친구들은 물론이고 선배들까지 그 친구의 얼굴을 보기 위해 저희 반 복도를 기웃거릴 정도였습니다.

말수가 없는 성격도 멋지다고 다들 좋아했고요.

그런데 우휘겸은 저를 무척 싫어했습니다.

왜 그렇게 제가 싫었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옆을 지나가면 발을 걸거나 괜히 한숨을 쉬는 것으로 시작한 괴롭힘은 제가 반응하지 않자 점점 노골적으로 변했습니다.

수업 중 욕설을 쓴 쪽지를 보내거나 뒷자리에서 지우개 가루를 던지는 것은 일상이었습니다.

일부러 책상을 치고 가거나 제 노트를 멋대로 구기는 일도 있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에게 우휘겸은 여전히 과묵하고 멋진 친구였기 때문에 누구에게 하소연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저는 우휘겸을 복도로 불러내 저를 괴롭히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제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고치겠다고도 하고요.

그러자 우휘겸은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않고 얼버무리다가 갑자기 화를 내며 저를 계단 아래로 떠밀었습니다.

이 일로 저는 팔이 부러졌고 학폭위도 열렸습니다.

퇴학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건지 얼마 후 우휘겸은 자퇴를 했습니다.

그즈음 우휘겸이 저희 학교로 전학을 온 이유도 강제 전학이었다는 소문이 돌더군요. 저 또한 그때 받은 충격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처음 우휘겸이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왔다는 걸 우연히 알았을 때, 그냥 모른 척 지나갈까 고민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더 이상 엮이기도 싫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자마자 우휘겸이 6위를 했다는 기사가 뜨더군요.

지금 나서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 이름을 계속 보고 살아야 할 거란 생각이 들자 숨이 막혔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우휘겸을 응원하고 좋아하는 분들께서도 진실을 아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휘겸, 너는 내가 누군지 알 거라고 생각해.

나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더 이상 너를 TV에서 보는 일이 없게 해주면 좋겠다.

+ 자퇴를 해서 졸업 앨범 대신 수학여행 때 기념으로 찍은 사진과 학폭위 개최 통지서를 첨부합니다.]

예찬은 빠르게 글을 세 번 정독했다.

타이밍은 달라졌지만 올라온 내용은 기억하는 것과 거의 일치했다.

우휘겸의 얼굴만 빼고 모자이크 처리를 한 사진과 우휘겸의 이름이 똑똑히 적힌 학폭위 통지서가 글의 신뢰도를 확 높였다.

빠르게 훑어본 댓글들은 대부분 우휘겸을 욕하는 내용이고 아주 간간히 중립을 지키겠다는 글들이 섞여 있었다.

‘하필 합숙 중에 터지다니.’

왜 폭로 글이 나오는 시기가 당겨진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예찬이 끼어들어서라기엔 오히려 우휘겸은 리셋 전보다 순위가 하락했다.

작성자의 말대로 잘나가는 게 아니꼬워서 터트렸다기엔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리고 저 학폭위 통지서.’

전에는 올라오지 않았던 물건이었다.

증거도 없이 올라온 학폭 폭로 글에 초반엔 생사람 잡는 거 아니냐며 사리던 대중들이, 우휘겸이 하차한다는 기사가 나오고 난 후 진짜 학폭러였냐며 뜨겁게 달아올랐던 기억이 선명했다.

전과 달라진 폭로 시점과 철저한 증거 첨부가 누군가의 입김이 들어갔음을 짐작하게 했다.

‘달라진 거라곤 나랑 정찬양뿐이니 뻔하지.’

묘하게 의기양양하던 정찬양의 얼굴이 떠오르자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휘겸이는 감독님이 부르셔서 지금 내려갔어. 우린 어떡하지?”

예찬이 생각을 정리하며 침묵을 지키고 있자 남지유가 불안한 듯 물어 왔다.

그 사이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글을 찾아본 임채진이 펄쩍 뛰었다.

“휘겸이는 뭐래요? 이거 사실이래요?”

“물어 보지도 못했어. 갑자기 스태프가 데려가길래 뭔가 해서 찾아보고 알았단 말이야.”

남지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임채진이 끄응 소리를 내며 탄식했다.

“하, 우리 경연은 어떡해요? 여섯으로 연습도 다 했고, 우휘겸이 메보인데 망했네.”

임채진이 우휘겸을 부르는 호칭이 변한 것에 예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예찬이 저를 매섭게 흘겨보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임채진은 한숨을 팍팍 내쉬었다.

“휘겸이 말도 들어 보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건 성급한 거 같은데.”

냉랭한 예찬의 말에 임채진이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나는 그냥 혹시 진짜면 너무 큰일이다, 이 말이지. 하하, 예찬이도 참. 왜 그렇게 무섭게 봐.”

강약약강의 표본 같은 놈이 금방 꼬리를 내렸다.

예찬은 침착하게 다른 조원들의 반응을 살폈다.

‘기태랑은 놀라서 눈물이 쏙 들어갔군. 남지유는 평범하게 걱정하는 것 같고, 배새벽은 뭔 생각인지 모르겠네.’

“휘겸이가 와야 판단을 할 수 있으니 일단 기다려 보죠.”

조원들과 한 사람씩 눈을 마주친 예찬이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저는 이 폭로 글이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으응, 그렇지! 나도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해.”

예찬의 눈치를 보던 임채진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지유와 배새벽을 방으로 돌려보낸 예찬은 힐끔힐끔 자신을 바라보는 임채진을 무시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제정신이 박혀 있다면 여기 앉아서 기다리는 게 맞아. 우휘겸한테 마음에 빚이 있다만 어제 알아듣게 얘기했고, 같이 데뷔해야 하는 파티 동료도 아니고.’

제작진에게 미운털 박히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니라면 그냥 얌전히 결과를 기다리다가 나온 결과에 겸허히 수긍하는 것이 옳았다.

‘선택창이 등이라도 떠밀면 또 모를까…… 잠깐. 나 지금 선택창한테 등 좀 밀어 달라고 생각한 거야?’

거기까지 생각한 예찬은 헛웃음을 한 번 터트렸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은 덤이었다.

“예, 예찬이 형?”

기태랑과 임채진이 당황한 것이 느껴졌으나 대답할 시간도 아까웠다.

신발을 구겨 신고 방 밖으로 뛰쳐나온 예찬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발소리에 연습생들이 문을 열고 내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합숙 중 가장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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